· 「전기정 - 대한민국은 혁신 중」
혁신은 이미 내 안에 있다
혁신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다.
혁신을 모르거든 원숭이를 보라.
아주 먼 옛날 나무는 원숭이들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기후 변화로 숲이 파괴되자 나무 위에서 생활하던 원숭이들 중 일부가 땅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지상에서의 생활은 나무 위의 생활과는 달랐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맹수들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원숭이들은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맹수들 때문에 늘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은 원숭이들로 하여금네 발이 아닌 두 발로 걷게 했다.
네 발보다는 두 발로 일어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걷는 것이 좀 더 안전했기 때문이다.
물론 직립 보행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뒤뚱거리는 모습이 보기 흉했고,
아직 나무 아래로 내려오지 않은 원숭이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무엇보다 두 발로 걷는 것이 몸에 익숙지 않아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비웃음과 불편함을 이기지 못한 원숭이들은 다시 네 발로 걸어 다녔고,
결국엔 맹수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꾹 참고 끈질기게 두 발로 걸어 다니던 원숭이들은
차츰 걸음걸이에 익숙해져 더 이상 뒤뚱거리며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이번에는 나머지 두 발로 돌과 나무 등을 갖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앞발이 팔이라는 기관으로 진화되어 도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변화한 것이다.
6백만 년이 지난 후 우리는 이 원숭이를 오로린 투게넨시스 Orrorin tugenensis.
즉 인간의 가장 오래된 조상으로 명하게 된다.
이후 인류는 돌칼이라는 도구를 처음 만든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한 호모 에르가 스테르(Homo Ergaster),
노동의 개념을 알게 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그리고 본격적으로 불 火과 도구를 사용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진화해갔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공유와 전파였다.
호모 하빌리스는 우연히 뾰족한 돌을 갖고 놀다가 손을 베이게 되었고
그 돌을 가지고 짐승의 가죽을 베어보았다.
그리고 뾰족한 돌로 동물의 뼈에서 살을 발라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호모 하빌리스는
돌을 더 날카롭고 정교하게 깎아서 돌칼이라는 도구를 만들어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인류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돌칼을 본 다른 무리들은 그것을 본떠 다른 돌연장들을 만들어냈고,
나아가 이것을 사용하게 된 더 많은 무리들이 음식을 얻고 장만하는데 필요한
좀 더 다양한 용도의 연장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식의 공유와 전파를 통해 더욱 성능이 좋은 연장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2005년 설날에 방영된 TV 다큐멘터리 <인류 오디세이>에서 보여준 내용들이다.
기후와 환경의 변화를 이겨내기 위해 네 발에서 두 발로 걷게 된 인류의 조상들을 보면서
필자는 고인류학 古人類學/Paleoanthropology 이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동안 필자의 머릿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혁신'이라는 단어였다.
오랜 세월 관습적으로 나무 위에서만 살던 원숭이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과감한 실행 Execution
직립 보행을 제대로 하기까지 수 많은 시행착오를 참아낸 열정 passion.
모방과 학습 benchmarking & learning을 통한 돌창과 돌칼 등과 같은 새로운 도구의 발명…..
이러한 노력들은 원숭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러고 보면 원숭이의 진화는 전형적인 혁신 프로세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는 과정,
주위의 비난과 냉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바로 그렇다.
원숭이가 자기를 극복해나간 힘겨운 과정은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아니 꿈도 꾸지 못했던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두 발로 걷게 된 원숭이는 자신이 훗날 돌칼을 응용하여 창을 만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6백만 년 전 한 원숭이가 작은 변화를 향해 내디뎠던 첫걸음!
그 첫걸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 맹수의 먹이가 되었거나,
아니면 지금도 나무 위에서 열매나 따먹으며 깩깩거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 첫걸음은 바로 ‘혁신’이었다.
변화에 적응하든가, 혹은 도태되든가.
생물들은 생각보다 빨리 환경에 적응해왔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체형을 바꿔버린 도마뱀의 예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미국의 동물학자인 조너선 B. 로소스 Jonathan B. Losos 박사는
큰 나무가 우거진 바하마 군도에 사는 도마뱀 몇 마리를 키 작은 덤불만 자라는
고립된 섬으로 옮겨놓았다.
새로운 환경에서 도마뱀이 멸종하지 않고 잘 적응해 나갈 수 있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20년 후 도마뱀 수는 오히려 늘어났으며,
작은 덤불이 많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도마뱀의 다리는 훨씬 짧아진 '쇼트 다리'로 바뀌었다.
(주 - <과학동아> 2005년 2월 호의 '진화하는 진화론' 에서 참조)
이와 같은 생활의 진화 속도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도마뱀의 사례는 진화하는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수 많은 종 種들의 가례 중 하나일 뿐이다.
지구상의 생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해가는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세상은 어떠한가.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이 변화할 때 재빨리 따라가거나 수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변화를 두려워하며 삶의 방식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비록 다람쥐 쳇바퀴 같은 단순한 삶이라도 그대로 안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세상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세상의 변화를 쫓아가려면 우선 머리 쓰는 것이 복잡해지고,
육체적으로도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보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자연이 변화된 환경에 잘 적응한 생물을 선택했듯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을 스스로 창조하든가,
그럴 능력이 없다면 반드시 패러다임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며,
적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혁신해야만 한다.
스스로 혁신을 하지 않으면 변화 적응력이 뒤처지는 생물 劣性個體이 자연 도태에 의해 멸종되듯
인간도 결국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자기를 혁신하는 일은 어렵다.
기존의 삶에 안주하려는 태도와 새로운 삶을 가꿔나가려는 의지 사이에서
커다란 혼란과 갈등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신이란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바꾸려는 의지이며 생존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혁신이 없는 한 새로운 세계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혁신이 자신과 상관없고 단지 귀찮은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
혁신의 ‘혁’자도 꺼내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
겨우 1~2년 혁신을 하고 ‘혁신 피로’니 뭐니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를 보러 가라고 말하고 싶다.
6백만 년 전 수백수천 종의 원숭이들 중에서
혁신을 한 종만이 오늘날의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종들은 여전히 동물원 철창 안에 갇혀 있다.
혁신을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 결과가 바로 원숭이 우리 안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도 지금 혁신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후손들은 동물원 철장 안에 갇힌 원숭이들처럼 먼 훗날 혁신에 성공한
미래의 종들이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나 주워 먹을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너무 냉정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지구상의 인간들은 출발선에 서 있는 달리기 선수와 같다.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들은 치열한 경쟁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이들은 혁신 과정에 점수와 서열을 매겨서 승자와 낙오자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게 하는 엔그램
그런데 '혁신'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을 느끼고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왜 혁신을 그토록 어렵게 생각하는 것일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자신이 갖고 있는 습관이나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약간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이 속담을 의학적으로 해석해 보기로 하자.
신경 생리학, 특히 대뇌생리학에서는 습관을 '엔그램 engram'으로 설명한다.
하나의 뉴런 neuron에서 다른 뉴런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면 '잠재 기억'이라는 신경 통로가 형성되는데,
이는 자주 사용할수록 분명하고 강력한 '형태 pattem'를 만든다.
(뉴런 neuron 신경 단위 또는 신경원 神經元이라고도 한다.
신경 세포와 거기에서 나온 돌기를 합친 것이다)
또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 많은 형태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다시 모여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큰 틀의 형태 macro pattem를 창조하게 된다.
이와 같은 큰 틀의 형태를 구성하는 뉴런의 네트워크를
유명한 뇌 생태학자인 에클스는 '엔그램'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체육 21> 2004년 1월 호에 실린 최창호의 글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습관을 고쳐라' 참조)
의학적인 해석으로 볼 때 습관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의 뇌가 이렇게 형성된 엔그램 회로를 따라 정보를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마치 공장의 라인을 뜯어 고치듯이 이미 형성된 엔그램 회로를 다시 짜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잘못 익힌 골프 스윙 폼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처음 배울 때보다 더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혁신이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혁신을 하려면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거추장스럽고 불편해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사회 현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일단 컴퓨터라는 기계와 익숙해져야 한다
컴퓨터 사용법을 익히는 것은 물론이고
컴퓨터를 좀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낯선 상황과 불편함을 힘들어하고 좀처럼 컴퓨터와 친해지지 못한다.
젊은 강사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배우며
'내가 학식도 더 많고 지위도 높은데 젊은 사람에게 이렇게 까지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하는 것인가?'하고 창피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컴퓨터 자판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단순 박복적인 훈련 기간을 지루해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게 '인터넷'이라는 문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도리어 비판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때문에 대중문화가 너무 가벼워졌어" 라든가
"요즘 아이들은 인터넷 때문에 책을 읽지 않아." 하는 식으로
인터넷의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시키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비판을 한다 해도
이미 인터넷 문화는 거부할 수 없는 뚜렷한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쇼핑도 하고 친구도 사귀는 등
우리는 이미 생활의 상당 부분을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인터넷이라는 문화에 대해 비판만 하고 새롭게 배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이 사회에서 스스로 '왕따'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혁신의 사전적 의미는 '일체의 낡은 제도와 방식을 고쳐 새롭게 하는 것'이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의식과 관행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25)
※ 이 글은 <대한민국은 혁신 중>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전기정 - 대한민국은 혁신 중
리더스북 - 2005. 05. 28.
[t-23.12.05. 20221203-14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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