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원 -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
하나 * 홍시
살아생전 어머니께서 유난히도 좋아하시던 것이 있었다.
바로 잘 익은 홍시였다.
어머니는 유독 홍시를 좋아하셨다.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한 자리에서 몇 개씩 드시기도 했다.
홍시를 드시면서 나와 눈이 마주치면
"네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홍시가 참 맛있어졌단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머니의 활짝 핀 웃음을 보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홍시 몇 개면 되었기 때문이다.
잘 익은 홍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의 표정은 금세 밝아지곤 했다.
그러면 덩달아 내 표정도 달라졌다.
별것도 아닌 홍시를 어머니께서 환하게 웃으며 맛있게 드실 때, 나도 더 없이 즐겁고 기뻤다.
어머니는 내가 사드리는 홍시를 특히 좋아하셨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어머니께 홍시를 공급하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3남 4녀 형제 중에 아무도 내 영역을 침범하지 못했다.
해마다 가을이 돼 신문 한 귀퉁이에 붉은 감이 매달린 사진이라도 실릴 즈음이면,
나는 어린아이처럼 들뜨곤 했다.
그리고 그해 첫 번째 홍시를 만났을 때의 기쁨이란! 첫눈을 만난 것만큼 부푼 기분이었다.
하도 많이 사다보니 홍시에 대한 안목이 생겨서 어떤 게 맛있는지, 어떤 게 최고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최고의 홍시를 고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늘 가장 비싼 놈을 찾으면 된다.
어머니께 드릴 홍시를 살 때, 나는 무조건 가장 비싼 것으로만 골랐다.
나는 그 돈만은 아끼지 않았다.
오히려 단골가게에 웃돈까지 얹어주면서 샀다.
나중엔 가게 주인도 최고로 좋은 홍시를 가져다놓았다며 나를 찾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밤늦게 귀가하는 내게 어머니께서
“오늘따라 어째 홍시가 먹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대뜸
“참, 그러고보니까 요즘 홍시를 사드리지 못했네요. 내일 꼭 사드릴게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로 귀가가 계속 늦어지면서 며칠이 지났고,
어머니께 홍시를 사드리겠노라고 했던 약속을 깜박 잊고 말았다.
내가 밤늦게 귀가하면
나를 맞는 어머니의 눈빛이 잠깐 빛났다가 순간 사그라지는 것을 나는 끝내 감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또 지났다.
그날도 늦게 귀가하는 길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려 받아보니 아내였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어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점심까지 맛있게 드시고 해거름에 밖에 나가셨다가 쓰러져 다른 사람에게 업혀 들어오셨는데,
돌아가실 것 같다는 얘기였다.
총알같이 달려 집에 도착했으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아들의 귀가조차 기다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으니, 나는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 아들이 되고 말았다.
체온이 식어가는 어머니의 몸을 끌어안는 순간이었다.
내 머리를 천둥 번개처럼 내리치는 것이 있었다.
“홍시!"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시던 홍시를 정작 돌아가시기 전에는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두고두고 여한으로 남는다.
이제 홍시를 맛있게 드시던 어머니는 이 세상에 안 계신다.
그래도 가을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터질 듯 잘 익은 홍시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잘 익은 홍시를 볼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나고,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작가후기.
우리 어머니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물에 만 식은 밥,
생선가시와 그 가시에 붙은 얄팍한 살점,
알맹이는 다 깎고 남은 사과 꼬투리,
뭉개진 딸기····.
우리는 오랫동안 그것들이 정말로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머니에게도 당신이 진짜로 좋아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면 그건 큰일입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그것 하나면 어머니의 표정이 금세 달라집니다.
그리고 매우 행복해하십니다.
그것을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챙겨드리는 것, 나에게는 작은 수고이지만 어머니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두고두고 후회를 남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p18)
※ 이 글은 <부모님 살아 계실 때>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입니다.
고도원 -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
그림 - 김선희
나무생각 - 2005. 0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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