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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정채봉. 류시화-신은 모든 곳에..../우리 어머니(김수환)

by 탄천사랑 2007. 4. 30.

「정채봉. 류시화-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200402-20-0402**]



우리 어머니 (김수환추기경)
어느 날 가을 들녘을 보고 싶어 시골에 내려왔다.
어느 수도원의 손님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가을 하늘 아래 뜰 가득히 피어난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왔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그 모습이 얼마나 청초하고 아름다운지 
잃어버린 옛 고향 집을 다시 찾은 듯했다.
어릴 때에 그러한 아름다운 뜰이 있는 집에서 살아 본 일이 없건만 내 마음의 고향,
어머니의 모습이 그 꽃밭에서 미소 짓는 듯했다. 

우리 어머니는 코스모스처럼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신 펀이었다.
그리고 젊었을 때는 분명히 그렇게 수려한 분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신 분, 
나를 있게 하고, 
나를 가장 사랑하신 분, 
나를 위해서는 열 번이면 열 번 다 목숨까지라도 바치셨을 분……. 
그런데도 나는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머니의 이 사랑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렸을 때에 우리 어머니는 가끔 다리에서 바람이 난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의 뜻을 오랫동안 전혀 알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내 몸에서 느껴 알게 되었다.

스물 몇 해 전, 
독일에 있을 때에 신학자 폴 틸리히가 정초에 독일 국회에서 한 연설을 방송으로 들은 적이 있다. 
그때에 그이는 이런 말을 했다.

“독일, 독일, 
 이 세상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독일……, 
 이것은 독일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제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독일이라는 나라는 어머니 같은 존재요, 
 마치 우리 어머니가 
 비록 객관적으로는 평범한 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에게는 둘도 없는, 
 세상에서 으뜸가는 어머니이듯이 그렇게 우리 독일도 우리에게는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내게도 우리 조국 한국이 으뜸이고, 
우리 어머니 서중하 여사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어머니이시다.

서중하 여사. 
여기 '여사'는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처음 붙여 보는 칭호이다. 
가신 지 30년이 되어가는 우리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그런 대접을 받아 보신 일이 없다. 
우리 어머니는 여사라는 존칭을 붙여야 할 만큼 사회적인 신분이나 학벌이 있는 분이 아니셨다.

우리 어머니는 당신의 이름 석자와 '하늘 천 따 지' 정도의 기초 한문과 한글밖에 아시는 것이 없었다. 
옹기 장사를 하신 우리 아버지와 혼인하신 뒤로 평생을 가난에 쫓겨 
여기저기로 이사를 다니며 옹기나 포목을 이고 그것을 파는 것으로써 생활을 해야 했던, 
고생도 무던히 한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는 말띠였는데, 말띠는 팔자가 세다는 속설대로 팔자가 드셌다면 
드셌다고 할 수 있는 한평생을 보내신 분이다.

내 마음에 새겨진 어머니의 영상은 늙으신 모습이다. 
이마에 깊이 주름이 잡혀 있고 70년의 풍상을 겪으신 모습이다. 
자식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은 비우고 또 비우신 분……,
그러나 위엄이 있으시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은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질수록 얼굴이 더 밝아지시고 미소가 많아지셨던 듯하다.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 속에 받아들이시고 초탈해지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당신이 원하신 대로 아들 둘을 모두 신부로 만드시고 뜻을 다 이루셨기 때문일까? 
또는 귀여운 손자들 때문이었을까?

우리 어머니에게서는 확실히 여장부의 기질을 엿볼 수가 있었다. 
시대를 잘 만나고 공부를 하셨다면 사회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실 소질을 갖춘 분이었다. 
그러한 자질과 리더십은 어머니가 언제나 자녀들에게만이 아니라 
당신의 친형제, 친척, 이웃에게 두루 베푸는 영향으로 알 수 있었다.

옛날 대구 천주교 신자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이로 서동정이라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남자이면서 동정을 지키신 분이라 이름을 그렇게 불렀는데 이 어른이 우리 외삼촌이셨다. 
이분은 주위로부터 그 인품과 돈독한 신앙심으로 존경받던 분이었다. 
그런데 이분이 우리 어머니에게는 큰오빠이면서도 십수년 연하요 누이동생인 우리 어머니를 
늘 존경에 가까운 경애심으로 대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어머니는 충분히 그 자질을 갖추셨으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셨던 분이다. 
오로지 자식들을 피어나게 하기 위해 당신은 밑거름이 되신 분이었던 듯하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내가 세 살인가 네 살을 먹었을 때에
*******(그때 우리는 경북 선산읍에 살았다)국화빵 기계에 빵을 굽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나는 그때 어머니에게 기대 앉아 있었고*******(곡마단인가 신파극인가가 벌어지고 있는 바깥 공터에서) 
어머니는 그 구경꾼들에게 팔려고 빵을 굽고 계셨다. 
또 머리에 무엇인가 이신 어머니 손을 잡고, 
밑에는 푸른 물이 흐르는 어느 긴 철교를 무서워하며 건너던 일이 떠오른다. 
그것 역시 어머니의 장삿길이었던 듯하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집 살림은 그즈음부터 아버지보다도 어머니가 맡아 꾸려 나가신 듯하다.

선산의 우리집 가까이에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어느 날 그곳 아이들과 내 바로 위의 형이 싸우는 자리에 나도 끼어 있다가 
일본 아이가 던진 돌이 내 이마에 맞아 상처를 입었는데, 그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다섯 살 때에 우리는 그런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했다. 
큰 재를 하나 넘어와 군위 용대동이라는 동네에 살 때에 나는 서쪽에 있는 그 산을 가끔 바라보았다. 
특히 해질 무렵이면 그 산을 자주 바라보곤 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우리는 저 산을 넘어서 왔고, 
지금 사는 이곳은 객지이며 저 산 너머 어디엔가 우리 고향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었던 듯하다.

군위에서 살 즈음에는 어머니와 나와 단둘이서만 집에 있을 때가 있었는데, 
어떤 때는 어머니가 옹기를 팔기 위해 먼 장에 갔다가 오신다는 저녁시간까지 돌아오시지 않으면, 
어둑어둑해지는 빈집에 혼자 있기가 너무나 적적하고 또 어머니도 몹시 기다려져 
한길에 나가 어머니가 오실 신작로를 바라보면서 앉아 있었다. 
그때 석양에 물든 그 산이 어린 내 마음을 말할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산 너머에 있는 선산도 우리 고향은 아니었다. 
우리는 도대체 정확히 어디가 고향이라 해야 좋을지 모른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자라기는 선산과 군위에서 자랐고, 
위의 형님과 누님들도 태어난 곳이 같지를 않다. 
우리는 모두 팔남매였는데 충남 합덕에서 시작하여 대구, 칠곡, 김천까지 태어난 곳이 제각기 다르다.

우리 아버지의 고향은 본디 충청남도 연산이지만 천주교도 박해 시대에 거기서 쫓겨나셨고, 
친척도, 아는 이도 전혀 없다. 
그러니 거기는 고향이란 정감이 들지 않는다. 
그보다는 경상도에서, 특히 대구에서 더 오래 살았으니 우리는 모두 대구가 고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구나 대구는 우리 어머니의 고향이다. 
어머니는 달성 서씨로 순수한 대구 분이시다.


나는 팔남매의 맨 막내였다. 
위의 형님과 누님들은 가난과 잦은 이사 때문에 공부를 시키지 못하셨는데 
내 바로 위의 형님과 나만은 그런 쪼들림 속에서도 어머니께서 공부를 꼭 시키고 싶어 하셨던 듯하다. 
그러므로 그때에 군위로 이사해서 살면서 형님과 나는 그곳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그 학교 1학년이었을 적에 돌아가셨다. 
그런 탓인지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마음씨가 어진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셨다.
충청도 억양으로 나를 부르셨고 그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 흉내를 냈던 것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이웃 사이의 싸움을 잘 말리시고, 
바둑이나 장기로 소일하시다가 해수병으로 돌아가셨다.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서울 동성학교에 다닐 때 
서대문에 사시던 친척 고모님이 나를 보시자 우리 아버지 이름을 부르시며,

“너는 어쩌면 꼭 네 아버지를 닮았느냐?”고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나면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기도 한다.

이렇듯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은 아주 적다. 
그러나 어머니 기억은 많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기르셨을 뿐만 아니라, 
공부를 시키시고 내가 성직의 길로 가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형님과 내가 군위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한 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건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에 성당에서 사제 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듯하다. 
그때 어머니는 깊이 감명을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시자마자 
우리 형제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님은 그 이듬해에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초등부 5.6학년)로 옮겼고, 
2년 뒤에 나도 그리 가게 되었는데 형님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러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영을 따라갔을 뿐이다.

우리 어머니는 본디 성품이 곧은 분이셨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한사코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어서 자식들 교육에도 그만큼 엄격하셨다. 
특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고, 
그 때문에 내 위의 형님과 나, 두 어린 형제를 더욱 엄하게 키우셨다. 
따라서 어머니의 영을 거스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또 우리는 어릴 때에 거짓말은 물론이요 욕 같은 상스러운 소리를 한마디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나에게 신앙을 심어 준 분은 물론 어머니이시다. 
그뿐더러 형님이 신학교로 간 뒤에*****(그 위 형님들은 돈벌이한다고 집을 나가 없을 동안에)
집에는 어머니와 나 둘만이 살았다. 
그때에 어머니는 날마다 저녁이면 긴 기도를 하셨고, 
나는 그 뜻을 잘 모르면서도 졸면서 어머니와 함께 그 기도를 바쳐야 했다.
그러시고도 자기 전에는 성서나 옛 성인의 이야기을 읽어주셨다. 
그것은 물론 내가 그런 성인처럼 되라는 뜻이었다.

이때 들은 성인 이야기로 기억에 남는 성인은 성 분도 라브로****(1748 – 1783년)라는, 
거지 행각으로 하나에서 열까지 복음이 가득한 청빈과 사랑의 일생을 살다 간 성인이다. 
그리고 효자전을 자주 읽어 주셨기 때문에 한 번은 어머니가 교리 문답 공부****(천주교 교리공부)를 
잘 안 한다고 꾸짖으시자 어머니가 들려주신 효자전의 이야기 그대로 밖에 나가, 
내 손으로 매를 만들어 와서 어머니께 드리며 종아리를 드러내고,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때려주십시오.” 라고 한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물론 그 매로 나를 때리지 않으시고 다시 한 번 조용히 타이르시는 것으로 그 일을 끝내셨다. 
이렇듯 비록 엄하게 다루셨어도 내 기억으로 우리 어머니가 손수 매를 드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집은 참으로 가난했다. 
늘 초가삼간에서 살았고, 대구에서는 한때 셋방살이도 했다. 
그런데 우리집 방은 언제나 깨끗이 도배한 방이었다. 
우리가 군위의 시골 동네에 살 때에도 그러했는데, 
그 무렵에 그 동네에서 도배한 방은 극히 드물었다. 
우리보다 형편이 몇 갑절 나은 집도 벽에 도배는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벽에 도배를 적어도 한 해에 두 번씩 하셨고
*****(봄, 가을 두 차례 시골 신자를 방문하러 오시는 신부님을 우리집에서 모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입은 옷도 깨끗한 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밥 또한 늘 잡곡이 좀 섞인 쌀밥이었다. 
이것도 그 즈음의 시골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교육에는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 자식들처럼 하셨다. 
그러나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는 엿이나 과자 따위의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에 우리집에서는 떡을 한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떡을 하신 것은 나의 큰조카****(어머니의 첫 손자)의 돌잔치 때였다. 
어머니는 이처럼 남들이 흔히 해먹는 떡조차 하지 않으셨으나 
끼니마다 먹는 음식만은 그즈음의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일류 음식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런 가난 속에서 어머니가 우리를 어떻게 그렇게 먹이셨을까 하고.

나는 뒤에 사람들한테서 부잣집 아들같이 보인다는 말을 가끔 들은 일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란 부잣집 아들처럼 전혀 궁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난한 우리집 환경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궁해 보이지 않고 부잣집 아들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그 가난 속에서도 귀하게 키우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무렵에 나는 어머니의 손은 참으로 약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가 아플 때에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 내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면 아픈 것이 씻은 듯이 낫고, 
체했을 때에 어머니가 바늘로 엄지손가락 마디를 따서 맺힌 피를 흘리면 
체한 것이 곧바로 낫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우리 큰형님이 이십대에 집을 나가 일본에 가 있다가 
다리에 큰 화상을 입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어머니는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형님을 데려오시어 집에서 조약으로 살리신 것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에게는 어머니가 일본말을 한마디도 모르시면서 일본까지 혼자 가시어, 
주소 하나만 들고 형님을 찾아내어 기어이 데려오신 것이 참으로 놀라웠고 
또 화상으로 다리가 썩어들어가 들것에 누워 돌아왔던 형님을 
어머니가 온갖 조약으로써 3년 뒤에는 완치시켜 자유로이 다닐 수 있게까지 하셨으니, 
어머니의 의술이 참으로 신기했다. 
나는 그때에 어머니는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자식의 병에 무슨 약이 좋은지 육감으로 아시는 어떤 지혜를 지니고 계시다고 느꼈다.

이렇게 다리가 나은 형님은 다시 집을 나가, 이번에는 만주로 가버렸다. 
처음에는 편지도 몇 번 있었으나 나중에는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우리 어머니는 다시 이 아들을 찾으러 세 번이나 만주에 가셨고, 
간도의 연길, 용정을 비롯하여 멀리 하르빈까지 찾아가 보셨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당신의 직업과 같이 되어버린, 포목을 이고 다니며 파시는 것으로 이 여행을 하셨다. 그러나 세 번 다 아들을 찾지는 못하셨다. 
세 번째는 하르빈역에서 꼭 아들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서 뒤에서 큰소리로 불렀더니 
그 사람은 한번 돌아보곤 그냥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형님이 아니었겠지요.” 라고 하면 어머니는,
“아니다, 
 어미의 눈은 못 속인다.” 라고 하셨다.

나는 가끔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들을 찾아 세 번씩이나 저 황량한 만주 벌판을 가신 그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나는 옛날에 어떤 이탈리아 소년이 어머니를 찾아 멀리 남미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가는 
눈물겨운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다. 
이에 못지않게 자식을 찾아서 일본으로, 만주로, 
그것도 세 번씩이나 가신 어머니 생각을 하면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찡해옴을 느낀다.

어머니의 사랑****(우리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크다. 
그것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산과 들을 헤매는 착한 목자의 사랑과 다를 바가 없다.
사실 나는 어머니의 크나 큰 사랑을 생각하면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상상해본다.

어머니의 권고를 거절할 수 없어서 신학교에 들어간 나는 예비과와 서울 동성학교*****(소신학교), 
그리고 일본 상지대학을 거쳐 대신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여러 번 신부가 되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마침내 신부가 된 것은, 
물론 첫째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어서였겠지만 어머니가 하신 기도의 힘이 더욱더 컸다고 본다.

대구에서 우리 어머니를 아는 이는*****(우리집은 내가 대구 신학교 예비과에 들어가자 다시 대구로 이사했다) 날마다 성당에서, 
또 대구 주교관 옆에 있는 성모 동굴 앞에서 기도하시던 우리 어머니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 말엽에 학병에 끌려갔다가 살아서 돌아오자 많은 분들이 
어머니의 이 기도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기도의 힘으로 내가 살아서 돌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학병 이야기가 나오니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생각난다. 
어머니는 내가 막내였기 때문이었겠지만 나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셨다. 
그런데 자식이란 크면서 어머니의 품을 좀 떠나고도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가끔 갈등을 느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가 나를 너무 사랑하시는 듯해서 그게 싫어졌고, 
어머니한테서 해방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럴 무렵에 학병에 끌려가게 되었고, 
하던 공부도 철학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했고, 
만일 죽는다면 어머니가 보시지 않는 먼 곳에서 죽고 싶었다. 
어머니가 내 죽는 것을 보시고 괴로워하실 것을 차마 보지 못할 듯해서 그랬다. 
그런데 학병으로 나가 막상 죽을 위험에 임박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나는 정반대로 어머니가 보고 싶고, 
어머니 품에서 죽고 싶은 강렬한 소망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 경험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떠 있던 배 위에서 했다. 
그때 우리가 탄 배는 근처에 나타난 미국 잠수함에게 어느 순간에 어뢰 공격을 받을지 모를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우리 배는 이천 톤급의 작은 화물선이었는데다 
기름, 폭약 같은 것만 잔뜩 싣고 있어서 한 방 맞기만 하면 그 즉시로 배도, 
사람도 한꺼번에 폭발해버릴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한 갑판 위에서 어느 한순간에 닥칠지도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나는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 불현듯이 어머니가 보고 싶고, 그 품에 안겨 죽고 싶은 마음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나는 평소에 내가 겉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인 이와 같은 내 본심을 깨닫고 참으로 놀랐다. 
어머니 곁을 떠나 죽고 싶다는 것은 순전히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고 
나의 본심은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그때 얻었다.

나는 이 경험말고도 두서너 번 꿈속에서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심적 반응을 일으키는 경험을 하고난 뒤에는 나의 본심이라는 것, 
즉 나의 마음속 깊이 있는 참된 나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튼 나는 이 경험 뒤로 어머니는 내게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 
참으로 모항(母港)과 같은 분이요 마음의 고향이라는 것, 
그 품을 떠나서는 내가 살아 있을 수도, 아니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우리 어머니는 당신이 원하시던 대로 먼저 우리 형님이 신부가 되는 것을 보셨고, 
그리고 6년 뒤인 1951년 가을에는 내가 신부가 되는 것을 보시고 참으로 기뻐하셨다. 
아마 내 기억으로는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기뻐하신 일은 달리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이날을 위해 얼마나 긴 세월을 기도 속에 기다리며 사셨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의 소원은 두 형제가 신부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참다운, 
성덕에도 뛰어난 신부가 되는 것이었다. 
지난해 돌아가신 우리 형님은 
어머니께 자상도 한 분이었지만 어머니 뜻대로 정녕 거룩하게 살다가 간 분이다. 
특히 세상을 떠나기 전 열몇 해 동안은 의지가지 없는 결핵 환자들을 위해 몸바치면서 
자신의 건강은 전혀 돌보지 못하셨던, 참으로 많은 이를 사랑하다가 간 분이다. 
내가 모습이나 성격이 우리 아버지를 닮았다면 형님은 우리 어머니를 더 닮은 분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마음씨도 다정하고 인물도 나보다 나은 분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아무튼 당신이 원하시던 대로 아들 둘이 신부가 되는 것을 보시고 
네 해 가까이 신부인 나를 위해 함께 사시며 기도로써 도와주시다가 
1955년 3월에 향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그때 어머니가 사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구 주교관에서 주교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위급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곧 의사를 불러왔으나 어머니는,
“어머니, 어머니!”하며 다급하게 부르는 내 가슴에 기대신 채 조용히 선종하셨다.

불효막심한 이야기이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 나는 별로 울지 않았다. 
그즈음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어쩌면 오래 사시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 속에 
그때도 셋방에 계시던 어머니를 자그마하나마 집을 하나 마련하여 옮겨 모셨고 
식량과 땔나무 따위를 갖추어 큰일을 치러도 좋을 준비를 막 마친 뒤에 가셨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평소에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에, 
그것도 성모님을 기념하는 토요일에 가시기를 원하셨는데, 
원하시던 대로 그 철에, 그날에 가셨다. 
가신 날에는 중풍으로 누워 계시던 병상에서 일어나시어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 드시고 
성당에 가셔서 그 십자가를 손에 꼭 잡은 채 성로 신공*****(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따라가는 기도)을 다 하셨고, 
때마침 기도하고 계셨던 나이 드신 사제에게 다시 한번 총고해*****(평생 지은 모든 죄를 뉘우치며 고백하는 것)를 하시고, 
집에 오시어 저녁을 잘 드시고 나서 그날 밤에 조용히 돌아가셨다.

아무튼 나는 어머니 장례 때에 별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고아처럼 느껴졌다. 
내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도 모든 것이 텅빈 듯했다.

어머니의 장례는 성대하였다. 
조문객도 많아서 미사 때는 성당을 가득히 메웠다. 
아들 둘이 신부인 것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어머니가 당신의 깊은 신앙생활과 
이웃 전교와 사랑의 실천으로 평소에 존경을 받아오신 것이 그렇게 많은 분을 오시게 했다고 본다. 
우리 어머니는 특히 가난하고 병든 이웃이나 상을 당하여 슬퍼하는 집을 반드시 찾아보시고 
기도로써 또는 적으나마 물질적으로도 도움을 주시고 이웃과 아픔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도 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어머니 가시고 난 삼십 몇 년 동안에 
나는 성묘도 자주 못 하였고 어머니를 위한 기도도 자주 드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가끔 생각하게 된다. 
나는 고린토 전서 13장의 ‘사랑의 찬가’를 좋아하는데 
이 세상에서 그 완전한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 
우리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라고 결코 완전무결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나에게 어머니의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 사랑이다. 
가실 줄 모르는 사랑, 
그것이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나는 어머니가 만주에 가서 소식이 끊긴 아들을 세 번이나 찾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는 아들을 찾으시기만 한다면 그 아들이 비록 폐인이었을지라도 
반드시 당신의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오셨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 
우리 어머니가 눈을 감으실 때에 가장 잊지 못하신 것이 그 아들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가을 들녘을 보고 서울로 돌아온 지 꼭 일주일 뒤에 
내가 묵었던 수녀원의 수녀님들이 모두 몇 마디씩 쓴 편지를 한꺼번에 보내주었다. 
그런데 모두가 지금 그 뜰의 코스모스가 더 아름답게 만발하였으니 또 한번 와서 보라는 것이다. 
내가 이틀을 묵고 떠나던 날 아침, 
그 뜰을 다시 보면서 코스모스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코스모스처럼 청초한 수녀님들의 글을 읽고 있으려니 
다시금 우리 어머니가 그 뜰에서 미소지으며 손짓하시는 듯하다. 
코스모스와 어머니, 
왜 이렇게 이 가을에는 가신 지 서른 해나 되는 어머니 생각이 더욱더 나는 것일까?  (p29)
※ 이 글은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정채봉. 류시화 -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샘터(샘터사) - 1998. 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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