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

대한사이버문학 - 고독한 합창

by 탄천사랑 2007. 4. 28.

· 「대한사이버문학 2005. 05.」

 


(1)
“아, 왜 이렇게 지랄을 한댜아~~ 어련히 알아서 줄까 봐 그랴? 에구! 쯔쯔쯧...”

음폭이 고르지 못한 옥천댁의 탁한 음성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구정물 속으로 흡수되고, 밖은 이유없이 질러대는 돼지의 소리로 시끄러웠다. 다스려지지 않는 돼지의 본능은 끼니때마다 온 집안을 뒤흔들었고 옥천댁의 입힘도 나날이 좋아져갔다.

그 실랑이는 꽤 오래 계속되었다. 나는 코끝을 맴도는 싸한 바람을 피해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 덮고 잠에서 깨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옥천댁은 평소대로 돼지와의 소란스런 대화를 끝냈고 난 모자란 잠을 채우려 여전히 이불 속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연일 계속된 야근 때문이었다. 벽지 생산량이 주문량에 못 미쳤다. 생산 방법이 후진한 탓이지 결코 주문량이 많은 게 아니었다. 더딘 일손으로 만들어내는 벽지 생산량으로는 경영에 성공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민식은 고급벽지 생산을 고집하면서 투자는 무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직원들은 돌아가며 야근을 했다.

두 달째 이 일을 하고 있었다. 기어이 몸뚱이가 트집을 잡으려는 것 같았다. 천식 환자처럼 그르렁거리는 돼지의 신음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곱지 않다.

“야! 이 작것아, 조용히 좀 못 허냐? 원, 처먹는 것두 어찌 그리 잡상스럽냐, 에그으!”

밥그릇에 부어놓고만 가면 좋으련만 돼지우리에 붙어 선 옥천댁은 말 상대라도 만난 듯 사설이 길다. 마치 나를 생각해 민망해하는 것 같지만 사실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입 걸게 욕은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식처럼 아끼는 연민의 정과 고독이 진하게 담겨 있었다. 간혹 돼지 밥을 주기 전 대문을 빠져나가는 남자가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한들 혼자 된 여인의 빈 가슴이 채워질리 없었다. 다른 날 같으면 한번 깨면 다시 잠이 들 수 없었는데, 이 아침은 눈꺼풀이 무겁다.힘겹게 떠올려보지만 저절로 감기고 만다.

“아니! 이게 누구여 어엉?” 마른 나무껍질처럼 건조한 노인의 손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할머니!”
“그려! 난 다시는 안 오는 줄 알았구먼, 이리루 들어 와 어서!”

노인을 따라 들어간 방안은 밤처럼 캄캄했다. 겨울을 준비하려고 창문의 덧문까지 몇겹의 창호지로 꼭꼭 봉해 놓은 탓이었다. 햇볕이 아주 희미하게 비쳐들다 말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안의 집기들이 죄다 낯이 익었다. 북쪽 벽면에 걸려있는 작고 네모난 때 낀 거울과 그 아래에 놓인 검게 절은 반짇고리, 그리고 웃방에 있는 앉은뱅이 책상과 퇴색된 장롱 등 모두가 눈에 익었다. 손에 닿으면 금세 익숙한 감각이 되살아날 것 같았다.

“그런디 지금 워디 사남?”
“.......”
“결혼은 했남?”
“네”

노인은 정말 모르고 있는 사람처럼 묻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답에는 관심이 없는 표정이다. 노인은 속옷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 안에는 끝이 접힌 학생복 차림의 여자 사진이 매듭없이 편편하게 잘 싸여져 있었다.

“이게 누군지 알겠남?”
“이건 저잖아요?”
“그럴 리가 있나? 자세히 살펴 봐!”
“돌아가신 할머니에요.”
“아이, 그럴 리가 있나, 내가 할머니를 못 알아볼까봐서”

노인이 답답해하며 내 손에 있던 사진을 홱 하고 빼앗을 때였다.

“색시! 아즉두 자남?”

바로 귀밑을 때리는 듯한 옥천댁의 걸찍한 소리에 놀라 화들짝 눈을 떴다. 돼지 아침을 주고 안마당으로 사라져가는 옥천댁의 발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머나! 깜박 잠이 들었었나 봐요.”

나는 손바닥을 펴 시려오는 코끝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꿈속에 노인은 할머니 친구였다. 할머니가 다니던 절에서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자식도 남편도 없는, 할머니와 처지가 비슷해 자주 놀러오곤 하였는데, 어느날부터 아예 눌러앉아 집사처럼 할머니의 안팎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고 나서 집에 오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 출생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돌아가신 할머니의철저함으로 미루어 추측해도 충분히 비밀로 할 성격이었지만, 그래도 하는 마음으로 할머니를 만만찮게 많이 괴롭혔었다. 지금도 그 설마는 버려지지 않은 채였다.

아무튼 나는 노인을 많이 따랐었다. 특히 할머니가 병환중일 때부터 돌아가신 후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노인의 도움이 컸었다. 평소 할머니 말씀도 있었지만,그런 연유로 나는 노인에게 할머니의 집과 전답을 모두 맡겼다. 조금 있던 땅돼기는 할머니 병환 시중으로 다 처분되었고 남은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낡은 집 한 채였다.

남편 곁에서 결심을 굳히고 노인을 찾았을 때 노인은 집을 정리해 양로원으로 갈 준비를 마친 뒤였다. 거동이 불편해 조석 끓이기 조차도 힘들었다. 아무튼 노인을 방문한 그 후부터 노인은 내 꿈속에 자주 등장하였다, 오늘 아침에는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는데 옥천댁이 잠을 깨운 것이다.

“기척이 없길래... 일어났구랴?”

옥천댁은 방문을 열 틈도 주지 않고 안채로 사라졌다. 나는 구석에 쭈글쭈글한 채로 푸석 주저앉아있는 작은 가방에 눈길을 멈췄다. 노인이 건네준 할머니의 유품이 든 가방인데 그 속에는 내가 알고자 아는 것은 한가지도 들어있지 않았다.할머니 도장과 빈통장 등인데 버려버리겠다고 하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가방 안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만 같아서였다.추스려 세운 어깨의 힘과 신경질적으로 꼿꼿했던 의지와는 달리 나는 이불 속으로 다시 미끄러져 박혔다. 한 겨울 추운 바람이 해일처럼 사납게 밀고 들어왔다. 그래도 어김없는 햇볕은 출입문 띠살 위로 평화롭게 비쳐들었다.

부모에 관한 질문에 굳게 입을 다물었던 할머니는 죽음에 이르러서까지도 침묵했고 끝내는 가슴에 품고 떠났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내가 할머니의 외손녀라는 것도 믿을게 못되었다. 우리들 사이에는 증명할 수 없는 사실만 존재하였다.

출생의 비밀은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완강하게 고집을 부려도 임종 전에는 당신 딸 부부의 사연을 털어놓겠지 라고 믿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대로 떠났다. 꿈속의 할머니는 외할머니와 마음을 나누던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혹 짐작 가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만날 때마다 이것저것 묻곤하였는데, 똑같은 질문과 대답이 쇠약해져 가는 노인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2)
남편에게 난 교육이 잘된 비서며 하녀였다. 나는 언제나 그의 시계 안에 있어 그가 불편하거나 힘들어하면 뛰어나가 ‘왜죠’라고 묻곤 때론 비서처럼, 때론 아내처럼 행동했다. 남편의 사업친구들에게는 이미 알려져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여자들에게는 시기 질투의 대상이었다. 일부 여자들은 여권을 추락시키는 매우 의존적이며 창녀같은 여자라고 말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 부부의 많은 나이 차가 그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결혼한 여자들은 다 창녀가 되는 것이었다. 무엇으로 그것을 구분할 수 있을까. 난 남편의 경제에 만족했고 부부관계에 기쁨을 느꼈다. 내가 싫은 것을 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여자 얼굴이 조금 반반하고, 학벌이 있고, 또 부자집 딸은 기갈스럽다고 했다. 기가 센 여자를 경계했던 그는 배경이 없는 나를 선택했다고 했다. 나는 그의 회사에 초창기 경리겸 비서였었다가 나중에는 남편의 가사 도우미까지 자청했었다. 남편이 자존심때문에 상류층 규수를 데려올 수 없기에 나를 선택했을 거라는 생각은 빗나간 판단이 아니었다. 그는 고아로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나는 외할머니의 작위적인 차단으로 혈연을 잃었지만, 그는 혈육을 찾을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고아 열등감인지 남편은 아기를 낳지 않을 거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말을 이따금 들어왔지만 난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편은 내게 늘 일을 주어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 그랬었다. 결혼한 지 오년이나 지난 지금 아기 타령을 하는걸 보니 그랬다.그렇다면 결혼을 하면 아기를 기다릴 거라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었던 것이다.

내 아기에게 조건을 갖춘 아버지를 갖게 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비굴하고 비겁하게 여겨졌다. 나처럼 개성과 자아가 없는 여자도 드물 것이라고 말하는 남자와는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었다. 남편은 치대는 사람을 정리할 줄 아는 과단성있는 사업가였던 것이다. 비로소 난 곧 결코 하고 싶지 않은 결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곧 굴욕적인 생활을 이쯤에서 매듭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너무 오래 함께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려왔었다. 그래도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해, 정말 아기를 원치 않는 거냐고 묻자 그는 단호하게, 너는 아야!. 그 말은 많은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었다. 왜 나는 아니냐고 묻거나 설득하기에 남편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니까 남편은 자신의 욕구배설의 한 방법으로, 사회적인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합법적인 결혼을 선택하였다. 내가 그를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하였던 것과 같았다.


(3)
할머니는 부모에 대한 궁금증의 일부분도 내게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에둘러 감추는 것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피했다. 난 그 사연을 알아내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할머니는 네가 이 자리에서 칼을 물고 죽는다 해도 말 할 수없다고 했다. 죽는다고 하면그냥 죽으라고 했다. 앎보다는 죽음이 나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숨기는 이유가 무엇이길래 손녀의 죽음과 그 비밀과 바꾸려고 하였을까. 난 할머니 설득에 실패했고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방안 깊숙이 비쳐드는 햇볕을 받기 위해 가만히 손을 펴 무릎 위에 얹었다. 햇살의 온기가 따스한 팔뚝을 타고 심장으로 옮겨갔다. 햇살을 쥐었다 놓았다. 햇살은 끊겼다 이어졌다 하며 그 자리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나는 문득 따뜻한 생명의 숨결이라도 음미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유년의 뒤뜰, 굴뚝 모퉁이에 작은 엉덩이를 끼고 봄의 뜨락을 구경할 즈음, 꼬물꼬물 하늘로 오르는 더운 땅김의 형체에 정신을 홀딱 빼앗긴 적이 있었다. 그것을 손안에 쥐어보려 무진 애를 썼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하고 빠른 손놀림에도 불구하고 매번 내미는 손보다 먼저 달아나 버렸고, 손안은 늘 텅 비어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아지랑이를 잡으려는 동작을 반복했다. 끝내 지쳐버린 울음을 울적에 난 할머니가 아닌 어머니를 불렀다. 새겨진 기억 한 가지도 없는 추상적인 단어에 불과했는데도 난 어머니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처럼 불렀던 것이다.

엄마아~~
온화한 웃음이 걷혀버린, 일그러진 할머니의 표정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는 그 표정의 의미를 몰랐었지만, 성장하면서 나는 할머니의 침통했던 그날의 모습을 절망이라고 단정했었다. 드러난 자신의 죄목에 대해 체념과 절망을 순간 갖게 되는 죄인의 표정과 흡사했었다.

숨기고 있는 진실을 알아내려 작심하고 다가들려 하자 할머니는 불치의 병을 빙자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병상 머리맡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내 질문을 용케 견디던 할머니는 임종 직후에는 내게 접근금지령을 내렸다. 멀리 있는 자식도 불러들인다는 인간의 마지막 길에서 난 할머니 곁에 갈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숨겨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할머니의 자존심일까 아니면 내 미래일까. 납득이 안가는 할머니의 행동이었지만 할머니는 내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당신의 뜻대로 내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떠났다. 먼 길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났다. 난 할머니를 잃은 슬픔보다는 진실을 밝히지 않고 떠난 할머니를 원망했다. 나를 할머니 딸로 호적에 등재하였건만 내 부모에 대해서 알고있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여기가 객지였을 것이었다. 원망과 분노는 홀로 독립하는데 적지않은 힘이 되고 자극이 되었던 것 같았다.

“에구~~내 새끼가 다 먹었구먼 아주 깨끗이! 신통방통해라”

안채에서 다시 나온 옥천댁은 돼지우리를 돌며 마치 내게 들어보란 듯이 중얼거렸다.
지난 해 십일월 말이었다. 눈발이 제법 희끗거리던 저녁 무렵 나는 민식을 따라 이곳으로 왔었다.

“아주머니 아래 채 빈방 있지요?”
“비어있기는 한디...왜지유?”
“이 분에게 빌려드려요”

옥천댁은 아들 둘 데리고 수절하는 과부였다. 
큰 아들은 군 복무 중이고 작은 아들은 서울로 유학 중이었다.

“그러지유. 사장님이 부탁 하시는 건디...
  그렇게 해야지유.” 그러면서 옥천댁은 연신 나를 흘끔거렸다.
“아주머니는 적적하지 않아 좋고, 용돈 생겨 좋고, 그죠?”
“허긴 그려유, 근디 문간에 돼지 때문에 어쩐대유. 솔찬히 시끄러울텐디...”

민식은 나를 쳐다보았다.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머리를 끄덕였다. 
민식은얼른 옥천댁의 말을 막았다.

“그건 아주머니 수완에 달렸어요. 
  돼지는 배만 안고프면 조용한거니까”

아닌 줄 알지만 민식은 괜한 시간 끌 것 없다고 간단하게 마무리 져 주었다.

“그랴?”

과연 괜찮을까 싶지 않은지 옥천댁은 갸우뚱했다.
민식이 돌아간 뒤 옥천댁은 안채에서 연탄불을 떼어다 넣고 방안을 치웠다.

“쓰지 않았던 방이어서...
  아이구! 이런 방에서 지내실 수 있을런지유. 근디 어쩌케 되는 사이래유?”

옥천댁이 궁금한 건 바로 그거였다. 물어보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쉽게 일러주고 싶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니까 되물었다.

“아! 윤사장이 노총각인디 빨랑 장가를 가야하는디... 안 그런감? 
  뭘 그리 쇡이고 그런댜? 후딱 해 치우지 않고...”

꽉 믿고 있는 사람에게 아니라고 말한들 씨알도 먹혀들 것 같지 않았다. 
자칫 잘못된 소문에만 휘말릴 것만 같았다.

“아무 사이도 아녜요” 손에 든 걸레가 먼지로 새까맣다.
“그럼 곧 그렇게 되겄구먼. 괜찮은 남자여유. 잡아유.”
“뭐가요?”
“처녀 총각이니께.... 이 봐유 색씨! 
  윤사장은 왜 혼자 사는지 모른다고 동네에서 수군거린다우. 
  인물 좋고 사장이구.... 소문도 갖가지유. 
  혼자 사는 형수를 사랑한다는 말도 있구유. 
  우리는 그 형수 본적 없는데 혹 색씨가 아니우? 
  아이구! 처녀보고 이런 실수를.... 이거 큰일 났네 안할 말을 한거 아닌가 모르겄네”
“아주머니두!”

아무튼 옥천댁은 매우 흥미로운 화제 거리라도 발견한 양 신이 났었다.
그리고는 기척이 늦은 아침이면 조금 전처럼 방문을 두드려 생사를 확인했다.

하지만 민식과 나 사이에서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내 사생활로 관심을 돌렸다. 이것저것 묻는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당분간 머물렀다 갈 이곳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지 않아 옥천댁의 궁금증에 애매한 미소로 답했다. 그럴 때마다 옥천댁은 더욱 알고자 집요하게 물어왔다. 떠나고 싶어질 때는 바로 이런 때였었다.

공장 직원들은 간혹 저희들끼리 눈빛을 맞추며 나를 궁금해 하였다. 그러나 민식은 내게 무관심했다. 사장이 관심을 갖지않는 인물이건만 사장과의 관계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그들은 나를 소외 시키지 않았다. 따뜻하고 친절했다. 민식은 나를 경계하지만 난 민식에게 설지 않은 정을 뭉클하게 느끼곤 하는데, 그것은 베푼 자와 받은 자와의 차이였다. 난 수혜자였다. 내가 그에게 어떤 형태로든 애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였다.

지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 아침은 뭔가 어수선하였다. 할머니 친구를 꿈에서 또 뵈었기 때문이었다. 노인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경제적인 터를 빨리 마련해 노인을 모셔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은 요원했다. 오늘은 시설에 전화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꼭 하게될 자신은 없었다.늘 생각뿐으로 그쳐왔으니까.

문간을 넘어서며 나는 돼지우리를 힐끗 돌아보았다. 배가 부른 돼지는 바람이 덜 드나드는 곳에 크다막한 몸집을 넙죽 엎드리고 있었다. 불룩해진 배가 밉쌀스럽게 벌떡거렸다.

“며칠 있으면 저것이 새끼를 낳을 꺼래니께!”

옥천댁이 어느 결에 곁에 와 있었다. 오늘은 옥천댁 하는 행동이 왠지 천박해 보여 싫었다. 대답이 없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옥천댁은 일과 중 돼지를 바라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모양이었다. 돼지는 술렁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에도 시큰도 않고 느긋하게 눈을 감고 천식환자처럼 숨소리만 가르렁거렸다. 갑자기 코끝이 시려왔다. 코끝을 박박 문질렀다.

“그래서 이눔이 아침이면 그렇게 더 포악을 떤다우. 배고픈 걸 못견뎌 해. 
  매일 색씨, 오직 시끄러울까? 그지유?”

괜찮다거나, 아니에요, 라고 말하려 했지만 옥천댁은 내 대답을 무시했다.

“한 열 마리쯤은 낳을 것 같혀유 흐흐흐흑...”

나는 얼굴을 붉혔다. 
옥천댁의 말소리가 왠지 퍽 음흉하게 들렸다.

“워째? 그렇게 얼굴이 빨개진대유? 
  그동안 새끼 재미를 통 못 봐서 이번에는 아주 새끼를 많이 낳는다는 미국종을 샀지유. 
  워쨌든 두고 봐야 알겄지만.”

옥천댁은 아직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가는 것에 무척 흡족한 눈치였다.

“다녀오겠어요. 늦었어요.”
“그려유. 지각인가부네. 미안혀유. 
  어서 가유. 눈 조심 하구유. 눈이 웬만큼 왔어야지”

옥천댁은 손사래를 치고는 다시 돼지우리 난간에 몸을 기댔다.

옥천댁이 살고 있는 이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발자국 없는 눈길을 둑인 줄 알고 밟으면 밭두렁으로 발목이 삐끗했다. 나는 계속 허뚱거리며 길을 찾아 나갔다.


(4)
시작부터 내 것이라고는 없었기에 홀가분하게 집을 나올 수 있었다. 별거 첫날 곧바로 노인을 찾아 갔었다. 시설에 들어가려고 준비를 끝낸 노인과 함께 하루 밤을 묵고 헤어졌다. 자주 뵈러가겠다고 약속했지만 노인도 나도 믿지 않았다. 노인은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서운해 하였다.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라는 말만 연거퍼 중얼거렸다. 그리고 부모는 더 이상 찾지말라고 하며 이젠 너도 부모없이 살아갈,그런 나이가 되지 않았냐고 위로해 주었다.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말이다.

정류장에 서서, 내가 서있는 쪽 방향으로 가는 열 번째 버스를 무작정 타겠다고 결심하니 목표가 생겨 서 있는 이유가 그럴싸했다. 남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기 좋게 느껴졌다. 버스는 삼십분만에 한대씩 지나갔다. 윤민식을 떠올렸다. 궁여지책이기는 하였지만, 이 근처에서 공장을 갖고 있다고 말했었다. 남편이 아닌 나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해 애써 시간을 내었는데, 벽지 생산량과 납품 과정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청탁같은건 없었다. 그의 신상명세 기록을 보고 내가 물었다. 공장이 합덕에 있어요?

타는 목표가 없었듯이 내릴 목표도 당연히 없었다.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최근수신번호부에서 민식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눈발이 조금씩 흩날렸다. 
나는 오랜만에 싸늘하게 식어가는 체온을 느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번째 차보다 먼저 와 주어 고마웠다.

"윤 민식입니다. 우리 만난 적 있지요?”
"어디서일까요? 우리가요?"  난 모른척 남자를 보았다.
"저만 뵈었나 보네요."
" .... "
"신경쓰실 것 없어요. 지금부터 아는 걸로 하면 됩니다. 인사해요."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요. 
  갈 곳 없는 가출녀에게 일자리를 주면 고맙겠구요. 
  이후로 우리는 모른척하기로 해요. 
  제 과거에 미련갖지도 마시고 미래에 참견도 하지 마세요. 
  견딜 수 있고 없고는 제가 판단합니다. 못 있겠으면 떠납니다. 
  윤사장님은 제게 하실 말씀 있으시면 이 기회 이용하시구요. 
  민망해 하는 표정 직원들 앞에서 절대 짓지마시고 
  남 하는대로 하게 놔두시길 부탁드립니다."

주객이 전도된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데 민식은 예 예하고만 있었다. 
민식의 행동이 그렇게 웃을 일도 아니었는데 난 웃었다.
민식도 따라 웃었다. 
오히려 내 쪽에서 물었다. 왜 웃는데요? 
그러는 사모님은요? 
사모님? 그런 호칭은 좋지 않아요. 
윤사장님은 가출한 주부와 만나신거에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금세 마음을 틀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쌓게 된 것은 그날처럼 내가 웃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난 쉽게 다시 안 볼 수도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잃어버린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고, 남편과의 불화도 이야기했다. 곧 헤어질 거라는 당연한 결과에 대해서도 담담히 들려주었다. 난 그 어떤 상황도 두렵지 않았다. 내 나쁜 과거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 부모, 친지 없었다. 난 자유스럽게 고백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제게 조카가 있다는데... 본 적이 없어 기억 못해요. 보고 싶어요.”
“조카를 못 보다니요?”
“저하고 친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민식은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난 그 작은 동작에 알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민식은 건설업을 하고있는 남편 회사에 납품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다니러왔을 때 나를 보았다고 하였다. 첫인상이 익숙해 기억하고 있었고,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막상 만나니 할말을 잃었다고 하였다. 지금 그 잃었던 말을 해보라 하니까 천천히 라고 하면서 묘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만나보고 싶었는데 스스로 찾아주어서 감사하다고 몇번이고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그의 감탄은 내게 설득력이 없었다. 난 그저 멀뚱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자신이 감탄하는 이유를 차츰 알게 될거라고 하였다. 매우 아리송하였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서툰 방법으로 굴러들어온 나를 흔들어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남자 특유의 관심법일 뿐이라고 제쳐놓았지만 어쨌거나 이보다 더 고마울 수는 없는 것이기에 다소 엉뚱하고 힘들어도 관계유지에 신경을 쓸 생각이었다. 아니, 갈 곳없는 마음을 걷어준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심신의 안정을 찾으면 노인에게로 갈 참이었다. 할머니를 모셔 주었던 분이었다. 할머니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이었지만 돌이키지 못할 한을 남겨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노인은 그런 할머니를 모셔주었었다. 잘 해 드리고 싶었다. 아니었다. 난 노인에게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 부모에 대한 비밀을 단 한 가지라도 제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하지만 애절하고도 안타까운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민식은 날이 갈수록 말 수가 줄어들었다. 이렇게 재래식 방법으로 벽지를 생산한다는 것은 경쟁 시장에서 뒤처지게 되어있었다. 모든 작업이 수동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납품기일을 놓치기 십상인데 그런대도 문 안닫고 잘 꾸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사업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거라고 단정했다. 그러지 않고는 요즘 세상에 이렇게 수동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출근을 하면 그 생각은 곧 잊게된다. 공장 안은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활력이 넘쳤다. 겨울은 사방에 첩첩히 둘러쳐져 있는데 민식의 장사는 완연한 봄날이었다. 봄 인테리어로 들어 온 주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한쪽에서는 그동안 야간작업으로 생산해낸 제품들을 화물트럭에 적재하느라 바빴다. 생산라인은 모두 가동중이었다. 풀 먹인 종이 위에 갈포를 고루 올리는 직원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그러니까 난 지각을 한 것이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탈의실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오늘 저하고 갈 데가 있습니다.”

민식이 기계 바닥에서 기어 나오느라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돌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했다.

“저하구요?”
“네”
“......”
“지금요!”
“네”

민식은 공장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민식은 납품 수송을 할 계획인 듯 했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자신의 곁에 오르기를 권했다.

“이대루요?”
“괜찮습니다.”

꼬불꼬불한 산모퉁이를 돌아 읍을 빠져나온 트럭은 고속도로 위로 올라섰다. 
그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궁금하시죠?”
“......”
“우리 처음 만났을 때보다 들 친해요. 그죠?”
“경계하시는 것 같아요.”
“경계요? 뭣 땜에요. 하하하... 가영씨 참 엉뚱하십니다. 
  가영씨가 경계 인물이었으면 지금까지 놔둡니까? 차암~“  그러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교도소 가보신 적 있으세요?”  뜻밖에 질문에 가슴이 쿵쾅거려 할 말을 잠시 잃었다.
“놀라셨지요? 
  교도소라는 말만 나오면 사람들은 당장 에이즈라도 걸릴 것처럼 두려워하지요. 
  전 조금 이상한 능력이 있어요. 즉흥적인 느낌이죠. 
  순간적으로 떠오르고 판단하는... 개의치 마시고요. 함께 갑시다.”
“제게서 특별한 영감이라도 떠오르신 건가요?”
“하하하... 그냥 함께 가고 싶었을 뿐에요. 몇 달 동안 꼼짝 안 하셨잖아요. 
  바람도 쐴겸 드라이브해요. 비록 볼상 사나운 짐차지만요. 
  그리고 사실 나도 왜 이러고 싶은지 잘 모르지만요.”
“형수님이 계세요.”

형수 때문에 결혼을 안 한다고 하였던가. 
도착 첫날 들려주던 옥천댁의 말이 냉큼 떠올랐다.

“아~~네에”
“죄목은 살인에요.”

일부러 놀라지 않는 척했다. 
그런 말을 하였을 때 지나치게 놀라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왠지 그래야할 것 같아 참았다.

“남편을 살해했어요.”
“그럼 형님이잖아요?”
“그렇죠. 제 형님이죠.”
“어머니가 다른 형제에요. 
  함께 산 기억 없어요. 각자 자기 엄마한테서 아버지 없이 자랐죠.”
“그럼 어떻게... 형인 줄 알아요.”
“기본적인 신상파악은 하고 있지요.”
“왜 그랬을까요?”
“형은 의사였고 몰핀 중독자였지요.”
“그럼 그것 때문에?”
“그런데 사인은 타박상이었어요. 목이 졸렸어요. 
  약물과다 복용으로 아내를 괴롭힌 것이 형량의 도움이 안되네요. 
  법적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나 봐요. 아무튼 형수는 살인 무기수에요.”
“억울한 옥살이 하고 계신 거 아녜요?”
“그런지도 모르고... 진짜일수도 있겠지요? 
  사람 속은 알 수 없어요. 무죄 유죄에 관심 갖기에는 늦은 감도 있고요.”
“애정부족이겠지요.”
“그럴까요?”
“옥중에서 여아를 낳았다는데 그 아이 행방을 몰라요. 
  요즘 부쩍 그 아이가 궁금해요. 
  저도 늙어가나 봅니다. 핏줄 따지는걸 보면... 그간에는 전혀 관심 없었어요. 
  그래서 요즘 면회도 자주하는데 말씀 안하십니다. 
  가영씨만 할 것 같은데...”
“떠도는 소문에는 형수를...”
“형수 만나러 간다고 하니 지레 짐작들 하는 거죠. 내용을 모르니까요.”
“혹, 저를 조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닮았나요? 두분 중?”
“참! 가영씨 소설도 잘 쓰시네요. 
  전 말이죠. 가영씨가 조카일까 봐 겁나요. 연인이고 싶거든요.”

역시 노련했다. 
난 금세 할 말을 잊었다.

“나이 차가 웬만해야지요.”
“부군하고도 나이 차가 많지 않았나요? 아~~죄송. 근데 뭘 그렇게 일찍 결혼했어요?”
"그러게요. 
  할머니가 진실을 감춘 채 떠나시고,,, 갈데가 없었어요.
  살아가기 위해 결혼이란 제도를 이용했지요. 그 사람도 그랬구요"
"조카 외할머니는 손녀를 데리고 자취를 감췄어요. 못찾겠더라구요. 
  다른 사람 이름에다 손녀를 올린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작심하고 숨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왜 겁 나세요? 살인자 딸 될까봐서요?”
"네에?"

난 긴장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민식씨 형수가 아니더라도 내가 그보다 더 흉악한 부모를 만날 수도 있겠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점 민식이 버거워졌다. 가끔 유심히 쳐다보는 시선도 싫었다. 나는 살인자와 엮이는 게 싫었다. 그런 피가 자신에게 흐르고 있다고 상상하면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닥치면 어떨지 알 수는 없었다. 그 어떤 상황도 상상해 보지 않은 적 없었다. 핏줄인데 감당하지 못할 것까지야...또한 그 선택은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5)
그렇지만 민식을 몇 번 따라다니면서 교도소라는 말에 익숙해져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되자 호기심 발동은 내 쪽에서 먼저 하였다. 난 민식에게 그냥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들어 주면 좋고 말면 마는 거였다. 핏덩이를 떼어놓고 치르는 죄 값은 남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었다.
난 민식의 메모를 들고 민식이 가르쳐 준대로 교도소 면회실을 찾았다.

철조망이 그물망처럼 흔들리는 건너에 초로의 여인이 단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앞가슴 왼쪽에 쓰여진 수인번호가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임을 증명했다. 나는 높은 벽을 올려다 보는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민식의 메모지를 건넸다. 잠시 내려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내게 눈길을 주었고 아무 말 없이 쳐다보았다. 그녀의 허옇게 센 머리카락이 체념의 숫자처럼, 전사의 표상처럼 위대해 보였다. 그녀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아가씨가 올 곳이 아닙니다. 돌아가세요.” 돌아서 가는 뒤로 남기는 여인의 노여움이 작지만 매몰찼다.

그 해 여름 난 이혼을 했다. 남편은 산달이 가까워 오는 여자와 재혼을 위해 나와 헤어졌다.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문득 그 여인을 생각했다.

난 민식에게 가기 전 노인이 계신 시설을 찾았다. 노인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었다. 노인에게서는 그나마 기대할 게 한가지도 없었다. 할머니는 유품이 없었다. 지독한 두 노인들이 나를 상대로 완전범죄에 성공한 것이다. 대단한 분들이었다.

“왜 왔어요?”
“딱히 갈 데가 없네요.”
“여기는 가영씨가 있을 곳이 못됩니다. "
"이곳이 좋아요. 잠시만 있겠습니다. 잠시..."

답답했다. 어머니 뱃속에 갇혀있을 때에 느낌이 이러했을까. 지금 나는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발길질을 하며 엄마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었다. 지금 나는 또 다른 상황에 갇히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때 비탈길을 굴러 내리는 옥천댁의 고함에 놀라 집쪽을 향해 나도무작정 뛰었다.

“무슨 일에요?”

옥천댁은 돼지우리 이쪽저쪽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옥천댁을 잡으려 뛰었다.

“왜 그래요?”
“아, 이 죽일 눔의 돼지가 제 새끼를 다 잡아 처 묵고 그것도 부족혀서 울밖으로 뛰쳐나와 가지고....
  참말 속이 폭폭해서 죽갔구먼.”

주야로 쏟은 정성이 헛되자 분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훌쭉해진 돼지의 배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몰잇대를 들어 돼지의 배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소리 지를 기력도 없는지 돼지는 비실거리며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가엾잖아요?”
“가엾기는? 저 눔이 날 깜쪽같이 속였대니께? 
  새끼를 낳을 것처럼 배를 부풀려 사랑을 독차지하더니, 저 눔이 필경 새끼를 밴척만 한겨. 
  저 죽일 눔의 돼지가!”

나는 옥천댁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놓인 할머니의 가방을 끌어냈다. 언젠가 꿈 속에서 보여주었던 그 사진이 이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했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한 번 가방 안을 휘젓고 있을 때에 가방 바닥 밑으로 손톱 밑에 걸리는 게 있었다. 가방 밑바닥에 가려져 있던 사진을 발견한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까치할머니가 어느 여인과 함께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할머니 친구를 난 까치할머니라고 불렀는데 바로 그 할머니와 민식의 형수가 함께 서서 웃고 있었다. 사진 뒤에는 연필로 쓴 아라비아 숫자 밑에, 힘겹게 흘려 쓴 옛글씨체가 희미했다.<미안하다. 가영아! 용서를 네 몫으로 남겨서,,,> 난 그녀의 가슴팍에서 흔들리던 숫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옥천댁의 노여움은 쉽게 사그라들 줄 몰랐다. 출산에 실패한 돼지를 실성한 사람처럼 집요하게 괴롭혔다. 난 탯줄에 매달려있는 핏덩이의 고독을 떠올렸다. 옥천댁은 점점 잔인해져 갔고 돼지의 비명은 텅 빈 겨울 하늘가를 더욱 고독하게 휘저었다


글 - 서혜원
출처 - 대한사이버문학  http://cafe.daum.net/hankuk2003

[t-07.04.28.  20210403-1657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