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환 - 수유리 가는 길(단행본)」
고 박생광 화백 (이미지 다음에서)
모란과 노인
빈집일까. 기별은 하고 왔지만, 벨을 눌렀으나 얼마간 인기척이 없었다.
조막만 한 맞배지붕 국민주택을 유월의 신록에 휩싸안긴 도봉산 자락이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용히 신발 끄는 소리, 이윽고 페인트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철대문이 열렸다.
노인이었다. 오 척 단구.
뼘으로 젤 만한 좁은 뜰에 만개하여 어질러지는 판국인 모란 덩어리들이 눈에 들어찼다.
아무렴, 모란이었다. 자모란도, 황 모란도 있었다.
오만한 검자줏빛 모란의 자태에 잠깐 멈칫했다.
"모란 좋아하십니까? 지금쯤 창경원 모란이 좋을 낀데."
칠십을 넘긴 노인의 목소리치고는 피치가 높고 고갱이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오백 나한 상의 어느 하나같이 온화하고 둥그스름한 얼굴에 어느새 웃음이 가득했다.
들고 간 정종과 생선을 마루 끝에 밀어두고 방으로 들어섰다.
"선생님의 흑모란이 갖고 싶어 왔습니다."
주변머리 없기는 예나 이제나. 절을 하고 앉자마자 튀어나온 말이 그것이었다.
뜰에서 본 모란의 흥취 때문에 거두절미 본론으로 직행해 버린 셈이다.
씨익 웃었다.
반긴다는 듯한 가냘픈 미소였다.
그리고 한 마디 '기랴(그려) 주지' 그게 다였다.
세평 남짓한 방안 풍경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리다 만 그림과 물감 접시, 붓, 화선지 뭉치 등속이 좁은 방을 가득 채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 작디 작은 노인 한 몸이 한구석에 웅크리고 누우면 차 버릴 방이었다.
요컨대 화구 외에 거의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림을 위하여 우정 세간을 배제한 방이 아니라 살림 나부랭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편이 옳았다.
가난이 인테리어가 된 그 방에서 무르팍과 엉덩이가 자신의 피부처럼 꺼칠하게 늘어진
바지의 허리춤을 배배 꼬인 넥타이로 건사하고 그 노인은 '기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진주 농업학교 후뱁니다.
어쩌고 몇 마디 공허한 중얼거림이 더 있었던 듯은 하다.
그러나 대화랄 것은 없었다.
노인의 대답이 그저 어렴풋한 미소뿐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초라한 방과 거의 잔약해 보이는 노인에게서
형용 키 어려운 위엄과 열기 같은 것이 내게로 끼쳐옴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에는 금방 주저앉을 듯한 형편없는 맞배지붕 국민주택을 나와
다시 한번 무르녹은 모란을 보고 페인트가 떨어져 나간 녹슨 철문을 열고 나오는 순서였다.
한 삼십 분 머물렀나?
내게는 설명할 수 없는 노인의 인력引力에 이미 사로잡힌 몸이 되어 있었다.
개울 건너 석양
1977년 6월 초순, 내고 박생광乃古 朴生光 화백을 그렇게 만나고 왔다.
수유리 4.19 묘지 근처, 수유리 버스 종점에서 그의 집으로 가자면 작은 내를 건너야 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李慶成이 언젠가 내 안내로 그를 만나고 와서 이런 말을 했다.
"징검돌을 딛고 기우뚱거리며 내를 건너 한 늙고 가난한 화가의 집에 갔다.
방바닥에 그림이 가득히 펼쳐져 있어 딛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고린내 나는 내 발자국이 그 위대한 노화가의 작품에 찍혀
역사 속에 남겨질 것을 생각하며 다시 징검돌을 건너 돌아왔다.
뭔가 장엄하고 감격스러운 경험이었다."
나는 말이 짧아 그렇게 극적으로는 표현하지 못하겠으나,
수유리의 그 가는 개울은 그와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돌아가는 내게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을 가르는 도도한 강물처럼 느껴졌다.
그의 수유리 집을 처음 방문한 때의 일을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또 있다.
'TV 미술관'이란 프로그램에 박생광의 작품세계를 담으려고
1980년 대 초에 수유리 그 집을 찾은 KBS의 PD 이상엽李相燁이다.
그때 이상업은 비가 새 벽과 천장이 얼룩진 뒷박 같은 방에서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내고와 오후부터 술을 마셨다고 한다.
마침내 해 질 녘이 되어 방안이 어둑해지기에 이르자
누군가 불을 커려 했으나 내고가 석양이 들이닥쳐 벌게진 서창을 가리키며 만류했다.
벌게진 서창 빛에 의지하여 술을 마시는 동안 서로의 동공은 점점 팽창하여 사물을 보기에 어려움이 없었다는데,
이때 이르러 이상엽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뭔가 새로운 세게에 눈뜬 신들린 사람' 같았다고 했다.
팔십이 눈앞에 닥친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열정 같은 것에 휩싸여 있었다는 것이다.
나도 몇 번 보았거니와, 저무는 석양을 아까워하는 내고의 모습은 석양보다 더 아름다웠다.
내고와 불타는 석양의 온유적 상관관계를 알아차리는 데에 나는 시간이 좀 필요했지만,
내고 스스로는 자신과 석양을 이미 동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흔셋과 마흔둘의 언약
내고를 만나기 얼마 전부터 일요일이면 도선사 나들이를 하고 있었다.
청년 시절부터 절집과의 인연이 깊어, 일주문만 바라보아도 마음이 평화로워지곤 했다.
도선사는 청담靑潭이 만년을 보내고 입적한 절이어서 나한테는 더 각별히 여겨졌다.
그러나 청담과 내고의 깊은 연緣은 나중에야 알았다.
아내와 함께 한 주일에 한 번씩 도선사를 거쳐 수유리 집에 들렸다.
아내는 처음 그의 화실 겸 침실인 방에 들어갔을 때
화구로 어질러진 방에서 마땅히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 엉거주춤한 채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날은 그가 그림은 밀어두고 낮술을 한잔하고 있었다.
마른 멸치와 고추장에 맥주, 아내는 노인의 술안주가 부실이 여겨졌는지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아내의 감상은 함축적인 짧은 한마디에 그쳤다.
"사시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아내가 '선생님 저희들 왔습니다'하고 수유리 집 페인트 벗겨진 철대문을
임의롭게 들어서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아내는 말 이랬자 몇 마디 나누지 않았건만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분이고 정이 가는 분'이라 하기에 이르렀다.
많이 더운 날은 러닝셔츠 바람으로, 그렇잖아도 작은 몸을 한 움큼밖에 안 되게 웅크리고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우리를 맞으면 '이게 우떻노. 정미 엄마. 괜잖나?'하고 아내부터 반겼다.
흑모란은 언제 그릴 셈인지 갈 때마다 빨강, 파랑, 초록, 노랑이 범벅인 그림이었다.
우리가 아는 만년의 박생광의 혁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은밀히,
그러나 가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미 엄마'란 사람은 노인의 상냥함에 고양되어 나는 차마 묻지 못하는 말,
"좋습니다. 선생님. 근데 뭘 그리십니까?" 하기 일쑤였고 그의 대답은 언제나
"응, 인제 내가 한번 기리(그려)보는 거지"였다.
뭘 그리냐는 데 한번 그려본다는 대답은 합당치 않다.
그러나 나중에 돌이켜 보니 그 대답은 다시없이 정확한 것이었다.
내고가 비로소 내고의 그림을 한번 그려보는 참이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흑모란은 끝내 받지 못했다.
그해 연말쯤 불러서 갔더니 자모란 한 폭과 진주 남강변의 아름다운 누각 촉석루를 건네주었다.
그는 왜 자모란 인지 말하지 않았다.
나 또한 흑모란 타령을 더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은 그 자리를 떠나왔다.
화료라는 것을 내 처지로는 넘칠 만큼 넣어가지고 갔지만
쑥스러워서 그가 앉은 아랫목 한구석에 슬그머니 밀어놓고 왔다.
수유리 걸음은 그 뒤에도 일요일마다 빠짐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내고가 수줍은 듯이 망설이며 이렇게 말했다.
"김 선생, 내기 인자(이제)부터 기리고 싶은 기림이 있소.
후학들이 그 그림을 좀 봐야 해. 그럴라 문(그러려면) 전시회도 해야 하고, 날 좀 도와주겠나?"
털어놓건대, 나는 그 당장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내가 감히 그를 어찌 돕는다는 말인지 헤아려지지가 않더라는 말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내고는
'나중에, 천천히...,'하고 한번 생각해 보라는 듯이 여운을 남기고는 말머리를 딴 데로 돌렸다.
털어놓건대, 집에 와서 곰곰 생각하고, 사무실에서도 그 말을 떠올려 곱씹어 보았다.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는 듯했다.
우선 일흔이 넘은 내고에게 간절히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으나,
여러 현실적인 정황으로 그것이 여의치 못하다는 것이 하나요.
그 정황을 누구러 뜨리는 데에는 누군가의 조력이 요긴하다는 것이 둘인 것이다.
나는 머릿속을 간단히 정리했다.
내고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에게 그 역을 청한 것은 긴 말 필요 없이 그가 나를 소중한 인연으로 여기기 때문이겠고,
그렇다면 힘이 닿는 데로 해보자는 것이었다.
다시 수유리에서였다.
"제 형편 것 해보겠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싶은 대로 한번 해보시지요."
내고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건너다보았다.
내고 일흔넷, 나는 마흔셋이었다. (p19)
※ 이 글은 <수유리 가는 길>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일환 - 수유리 가는 길
이영미술관 - 2004.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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