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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히가시노 게이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제1장 / 6 답장은 우유 상자에

by 탄천사랑 2023. 8. 28.

·「히가시노 게이고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6
쇼타가 새 양초에 불을 붙였다.
눈에 익은 탓인지 촛불 몇 개로도 방 구석구석까지 환히 보였다.

"편지, 안 오네?"  고헤이가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이렇게 간격이 길었던 적이 없는데, 이제 편지 안 하려나?"
"이제 안 할 거야"  쇼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심하게 혼을 냈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기가 죽거나 화를 내거나 둘 중 하나야.
 그리고 어느 쪽이건 편지 따위는 다시는 쓰고 싶지 않겠지."
"뭐야,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아쓰야는 쇼타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도 너하고 똑같은 마음이고, 그 정도는 써 보내도 괜찮다고 생각해.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써 보냈으니까 답장이 안 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얘기야."
"흥,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쓰야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헤이가 말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했을까....?"  

"역시 그대로 훈련을 계속했을까?
 그래서 무사히 올림픽 대표로 뽑혔을까?
 그랬는데 가장 중요한 꿈인 올림픽을 일본이 보이콧했다면....., 어지간히 충격을 먹었겠지, 진짜."
"그랬다면 정말 꼴좋게 된 거지. 우리 말을 안 들은 게 잘못이야."  아쓰야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언제까지 살아 있을까?
 보이콧이 결정된 날까지는 살았을까?"

쇼타의 말에 아쓰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세 사람을 휘감았다.

"근데 언제까지 저렇게 해둘 거야?"  갑작스럽게 고헤이가 물었다.
"뒷문 말이야. 저기를 계속 닫아두면 시간이 안 가는 거잖아."
"하지만 문을 열어버리면 과거와의 연결이 끊어져. 그럼 그 여자가 편지를 보내도 못 받게 돼"

쇼타가 아쓰야 쪽을 보며 물었다.

"어쩌지?"

아쓰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가락 관절을 꺾기 시작했다.
왼쪽 다섯 개의 손가락을 모두 우두둑 꺾은 참에 고헤이를 바라보았다.

"고헤이, 뒷문을 열어라."
"그래도 돼?"  쇼타가 물었다.
"괜찮아. 이제 달 토끼라는 여지는 잊어버려. 우리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잖냐.. 
 고헤이, 얼른 가."

응, 이라고 말하고 고헤이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퉁퉁퉁 하는 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왔다.
세 사람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한순간 서로 마주 본 뒤에 일제히 시선을 가게 쪽으로 던졌다.

아쓰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향해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쇼타와 고헤이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다시 퉁퉁퉁 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셔터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마치 안의 상황을 살피는 듯한 두드림이었다.
아쓰야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이윽고 우편함 밑으로 한 통의 편지가 털썩 떨어졌다.

 
- 나미야 씨는 아직 이곳에서 살고 계시는지요.
  만일 나미야 씨는 안 계시고 다른 분이 이 편지를 받으신다면,
  정말 죄송하지만 이 편지는 그대로 태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별다른 내용도 아니라서 편지를 읽으신다고 해도 도움 될 게 없으니까요.
  여기서부터는 나미야 씨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오래간만에 소식 전합니다.
  저를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작년 연말에 몇 번 편지를 드렸던 '달 토끼'예요.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죠.
  벌써 반년이나 지났네요.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지요.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마치 친부모님처럼 저의 고민을 진지하게 상담해 주신 것,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편지에 써주신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심으로 가득했어요.

  전해드릴 일이 두 가지가 있답니다.
  첫 번째는, 
  물론 나미야 씨도 잘 아시겠지만 일본이 정식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하기로 결정했어요.
  어느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지만 막상 결정이 내려지고 나니까 정말 충격이 크더군요.
  저는 어차피 가지 못할 대회였지만 
  이미 출전이 정해졌던 친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요.
  정치와 스포츠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국가 간의 문제가 걸리면 꼭 그럴 수만은 없는가 봐요.
  
  두 번째 소식은 남자 친구에 대한 것이에요.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해 투병 생활을 했지만 올 2월 15일, 병원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마침 제가 훈련이 없는 시기여서 임종의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어요. 
  그의 손을 꼭 잡고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는 그를 배웅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건네준 것은 '꿈을 이루게 해줘서 고마워'라는 말이었어요.
  마지막 순간까지 저의 올림픽 출전을 꿈꾸었던 것 이겠지요.
  그게 그에게는 삶의 이유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의 임종을 지켜본 뒤에 저는 곧바로 훈련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선발 대회까지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떻든 이 마지막 기회에 최선을 다해 뛰어드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결과는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저는 올림픽 대표로 뽑히지 못했습니다.
  능력이 부족했던 거예요.
  하지만  최선을 다한 끝에 나온 결과였기 때문에 후회가 없습니다.
  물론 뽑었다고 해도 결국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지난 일 년 동안 제가 했던 훈련이 쓸모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나미야 씨 덕분입니다.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맨 처음 상담 편지를 드렸을 때,
  내 마음은 올림픽을 단념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어요.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지키면서 마지막까지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실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그즈음 저는 훈련을 받으면서 막다른 벽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능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하루하루였어요.
  라이벌들과의 경쟁에도 지쳤고 반드시 올림픽에 출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저를 짓눌렸어요.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던 거예요.

  그가 암 선고를 받은 게 그런 때였어요.
  이제는 운동에서 도망칠 수 있겠구나. 라고 안도하는 나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병으로 힘들어하고 있잖아요.
  간병에 전념하는 건 누가 봐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제 행동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무엇보다 나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는 그런 저의 나약한 모습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올림픽을 포기하지 말라고 줄곧 다짐했던 거예요.
  그는 자신의 꿈을 망가뜨리지 말아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원래 그런 식으로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저는 정말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을 돌봐주고 싶은 마음,     
  올림픽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그의 꿈을 이뤄주고 싶은 마음,
  그런 여러 가지 고민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어요.
  제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고민하다가 써 보낸 것이 그 첫 번째 편지였어요.
  하지만 저는 그 편지에 속마음을 솔직하게 쓰지 못했습니다.
  올림픽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것만은 감춰뒀지요.

  하지만 나미야 씨는 그런 교활한 면을 금세 알아보셨던 모양이에요.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뒤에 갑작스럽게 
  '사랑한다면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 주는 게 옳다'라고 딱 잘라 충고를 해주셨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속은 그만큼 순수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좀 더 교활하고 좀 더 추하고, 그리고 시시한 것이었죠.
  그 뒤에도 나미야 씨는 전혀 흔들림 없는 충고를 해주셨어요.

  '기껏해야 스포츠.'
  '올림픽 따위, 단순히 규모가 큰 운동회.'
  '망설이는 것은 쓸데 없는 것, 지금 당장 그에게로 가세요.'

  사실은 좀 의아하기도 했어요.
  어쩌면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하고요.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올림픽은 깨끗이 잊어버리라는 말씀을 제가 덥석 따랐다면 
  어차피 올림픽에 거는 기대가 겨우 그 정도일 뿐이었겠지요.
  그렇다면 훈련 따위는 포기해버리고 그 사람을 돌봐주는 일에 전념하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만일 나미야 씨가 아무리 포기하라고 해도 제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면 
  그만큼 올림픽에 거는 기대가 강하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눈앞이 환해지더군요.
  제 본심은 올림픽에 집착하고 있었어요.
  올림픽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꿈입니다.
  간단히 버릴 수는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항상 곁에 함께 있고 싶어.
   내가 훈련을 그만둬서 당신의 건강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할 거야.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다면 내 꿈을 버리고 싶지는 않아.
   지금까지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왔기 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 수 있었고,
   그런 나를 당신이 좋아했던 거니까.
   당신을 단 한시도 잊어버린 적은 없어.
   하지만 부디 내 꿈을 향해 달려가게 해줘."

  그러자 병상에서 그 사람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
  네가 나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설령 우리 둘이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마음만은 항상 함께 있다.
  아무 걱정 말고 네 꿈을 향해 후회 없이 뛰어보라고, 그는 말해주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망설임 없이 훈련에 뛰어들었습니다.
  곁을 지키는 것만이 간병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런 나날 속에 그 사람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말, '꿈을 이루게 해줘서 고마워'라는 그 말.
  그리고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은 저에게 무엇보다 큰 상입니다.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저는 금메달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어요.

  나미야 씨, 정말 고맙습니다.
  나미야 씨와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더라면 저는 소중한 것을 잃고 평생 후회할 뻔했어요.
  깊은 통찰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잡화점에 계시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부디 이 편지가 무사히 전달되기를 빕니다.

- 달 토끼 드림.


쇼타도 고헤이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거라고 아쓰야는 생각했다.
아쓰야 자신이 그랬기 때문이다.

달 토끼에게서 온 마지막 편지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올림픽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힘껏 노력했는데도 대표 선수로 뽑히지 못했고, 
그뿐만 아니라 이번 올림픽에 쏟은 노력 자체가 물거품이 되었는데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메달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고 오히려 진심으로 흐뭇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이 나미야 잡화점 덕분이라는 것이다.
아쓰야와 쇼타와 고헤이가 답답하고 화가 나서 대충 써 보낸 편지 덕분에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이건 비꼬는 소리 나 장난치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 짓을 하겠다고 이렇게 긴 편지를 보낼 리는 없다.

웃음이 스멀스멀 밀려나왔다.
정말로 우스웠다.
아쓰야는 입을 다문 채 가슴을 들먹거리다가 

결국 낮은 신음 소리를 흘리고 마침내 캬하하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왜, 왜 웃는 거야?" 쇼타가 물었다.
"아니, 웃기지 않냐? 이 여자, 정말로 바보지 뭐야.
 우리는 진짜로 올림픽은 깨끗이 잊으라고 말했는데 그걸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 버렸잖아.
 그러고는 결과가 잘 나왔다고 우리한테 감사하고 있어.
 깊은 통찰력에 경의를 표하며,라 잖아.
 근데 그런 게 어디 있나고, 우리한테."

쇼타도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아무튼 잘 됐어, 결과가 나왔다니."
"맞아. 게다가 나는 정말 즐거웠어." 고헤이가 말했다.
"다른 사람의 고민을 상담해 준 거,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야.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이라도, 
 어쩌다 결과가 잘 나온 것이라도 우리한테 상담하기를 잘했다고 하니까 정말 기분 좋다.
 안 그래, 아쓰야?"

아쓰야는 짐짓 얼굴을 찌푸리며 코밑을 쓱쓱 비볐다.

"뭐,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거봐, 역시 그렇잖아."
"너처럼 마냥 기분이 좋지는 않아.
 아무튼 이제 됐으니까 슬슬 뒷문을 열자.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세월에 아침이 올지 몰라."  

아쓰야는 뒷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아, 잠깐이라고 쇼타가 말했다.

"왜?" 하지만 쇼타는 아무 말 없이 가게 쪽으로 내려갔다.
"왜 저러냐?"

고헤이가 물었지만 역시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이윽고 쇼타가 돌아왔다.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야?" 아쓰야가 물었다.
"또 왔어......," 쇼타가 천천히 오른손을 쳐들며 말했다. 
"이건 또 다른 사람한테서 온 편지 같아."

그의 손에는 갈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 제 1 장 답장은 우유 상자에 끝 (p07~82)


※상기 글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히가시노 게이고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역자 - 양윤옥
현대문학 - 2012. 12. 19.

[t-23.08.28.  210814-0535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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