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아 - 「이별을 위하여 해후를 위하여」
며칠 전 장농을 정리하다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결혼반지를 보았다.
결혼 후 몇 년 동안은 으레 그래야 되는 줄 알고 끼고 다니다가,
나중에는 거추장스러워서 장농 속에 처박아 두다시피한 결혼반지.
나는 이것을 대할 때마다 그 무렵의 내 갈등과 고통을 보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내가 결혼할 당시 신랑과 나, 우리는 똑같이 가난했었다.
사실 혼기에 처한 젊은 남녀들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혹은 병역 의무를 필하고 일자리를 물색 중이거나 이제 막 취직한 사회의 후렛쉬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는 특별히 더 가난했었다.
신랑은 당시 꽤나 늦게 입대하여 육군 졸병으로 있다가 갓 제대하여 이렇다고 내놓을 만한 명함이 없는 처지였다.
공교롭게도 내가 결혼하던 날은, 나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던 처녀 교사들이 셋이나 똑같은 날 결혼하였었다.
(그때 나는 모 여자 고등학교의 교사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신랑은 종합병원의 의사,
유명한 재벌 회사의 중견사원이라는 으리으리한 이름들을 가졌었기 때문에,
나는 좀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물론 겉으로야 그렇지 않은 듯 대범하게 말하고 행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 숨어 있는 열등의식은 은근히 신랑을 다그쳤던 것이다.
우선 나는 형편이 어려운 신랑에게,
나와 같은 날 결혼하는 동료들이 모두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는다는 걸 알렸다.
그냥 알린 것이 아니라, 여러 번 힘을 주어 강조했었다.
그 당시에는 극성스럽게도 그 다이야몬든가 금강석인가 하는 보석이 유행하여서,
마치 그가 결혼에 성공했느냐 아니냐를 구분하게 하는 척도라도 되는 양 기세를 떨쳤었다.
결국 내 신랑은,
홀어머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는 방법밖에는 딴 도리가 없었을 텐데도,
내 손에 그 반지를 기세좋게 끼워 주었다.
나는 양심을 걸고 말하거니와 내게 특별한 허영심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리고 내 자신을 내용없는 형식에 구속되는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온양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갈 때에도
역마다 쉬는 보통 열차의 보통석에 앉아 떠나는 것을 조금도 창피하거나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 도착해서도 자진하여 2등급이나 될까한 허술한 여관에 투숙했었다.
그러고도 이튿날 새벽
여관의 지붕에 덮힌 하얀 눈을 보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라며 감사와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었다.
우선 머물러 살 집을 정하고 인사차 친구들을 청해 저녁을 대접할 때,
우리의 안방에는 신혼 가정의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가재도구는 없고
웃목에 그득 쌓인 책들만 쏟아질 듯 벽에 기대어 있었다.
너무나도 당당한 초대자의 표정을 보고 오히려 친구들이 얼마나 당황해 하는 눈치였던가?
일체의 허례와 허식을 넘보고 무시했으면서도 아,
저놈의 들깨알보다 조금 클까말까한 하찮은 반지를 나는 왜 그토록 천박스럽게 고집하고 싶었던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신랑 앞에서 내보인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실수이며 결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그런다고 어려운 처지였음에도 선선히 응한 신랑도 나와 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도 역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미흡함을 감추고 메꾸는 수단으로 값비싼 반지를 이용했음에 틀림없다.
남에게 보이려고 겉으로라도 지지 않으려고 헛웃음처럼 날린 공허한 몸부림이었음에 틀림없다.
두 사람의 애정이 뿌리 깊은 정신의 소산이며, 그 정신으로 평생을 동행하리라는 각오가 서 있다면
약속의 징표인 결혼 예물의 가치는 화폐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 이상의 것이 아니겠는가.
팔아서 돈으로 쓸 것이 아니라면 비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진실.
서로의 소중한 애정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나는 반지를 꺼내어 손가락에 껴 보았다.
그 시절 그와 나, 우리들에 대한 연민이 애상처럼 전신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매우 작은 것이긴 하지만 내가 지닌 몇 개 안 되는 반지 중에서도 제일 값이 나갈 듯한 다이아몬드 반지.
이것은 우습게도 내 남편이 가장 가난하고 암담하던 시절에 선물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 가난의 표상이며 흔적이다.
부자연스럽고 슬픈 증거물이다.
이향아 - 이별을 위하여 해후를 위하여
맥밀란 -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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