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영 - 「광기로 혹은 향기로」
별리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해가 바뀌었다.
1993년. 우리나라 풍속화가 담겨 있는 달력은 안방 경대 옆에,
세계 여러 나라 풍경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달력은 거실 소파 위에 각각 걸었다.
그 이전 해 겨울은 선거로 시끌시끌했었다.
대선 결과는 ..., 민자당의 김영삼 씨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신문에는 새 당선자를 보필할 준비 위원회가 발족되었다는 기사가 실렸고,
본인의 전공 분야인 경제와 함께 정치 동향에도 관심이 많은 그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면 신문을 정독하는 게 하루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인사 난과 부음 난에 관심이 많은 남자의 모습을 보면
우리 여자들 하고는 세포 구조가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친구나 선후배 중에는 관료 쪽으로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행정 고시나 사법 고시 합격자 중에는 그가 졸업한 K 고등 학교 출신들 명단이 가장 흔한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신문을 보는 동안, 나는여러가지 야채를 녹즙기에 넣고는 즙을 만들어 그에게 먹였었다.
냉동실에서 꺼낸 인절미를 해동시켜 꿀과 함께 내놓는 일도 함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를 위한 시중은 늘 즐거웠다.
비록, 솜씨는 서툴렀지만 뭐든지, 한번 배워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의 커다란 변화 중의 하나였다.
물론 그는 매번 너스레를 떨어가며 맛있게 먹는 척 했지만,
수술 후 부턴 음식들이 속에서 잘 안 받는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다른 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걱정이 되는 단 한 가지는 역시 그 사람의 건강 문제였다.
그는 나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진, 뽀빠이의 라이벌 '부르스터'처럼 건강해지겠노라고 허풍을 떨기도 했지만,
1월 하순 경,
우리 두 사람은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설악산을 찾기로 했다.
그는, 한국의 산 중에서 설악산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설악산도 설악산이지만, 자기가 군대 생활을 했던 강원도의 산과 바다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듯이 보였다.
우리는 그의 친구에게 빌린 콘도에 머물며, 근처 온천을 찾기도 하고, 아침마다 등산을 하기도 했다.
산기슭 입구에서 사 먹은 도토리 묵과 파전 맛은 일품이었다.
굽이굽이 빼어난 계곡과 능선을 보며, 나는 문득 '한계령'이라는 노래를 떠올렸다.
저 산은 네게 우지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 중
저 산은 네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네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산을 오르며 내가 나즉하게 노래를 부르자,
그는 무슨 노랜지는 잘모르겠지만, 하여튼 가사가 마음에 와닿는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새롭다.
맑은 공기와 눈덮인 설악에서 오랫동안 한가로운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자마자,
집에서는 그를 찾는 전화가 불이 났다.
앤서링 머신에서는 똑같은 목소리가 계속 입력되어 있었다.
그 후에 걸려 오는 음성들도 항상 듣곤 하던 동료 교수나 친구가 아니라 주로 낯선 목소리들이었다.
특히, 어떤 한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 오기만 하면, 그는 상당히 삼각한 표정으로 오랜 시간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누구예요? 내가 물었다.
고등학교 후배인데, 이번 선거 때, Y.S. 진영 참모였었어. 그의 대답이었다.
그 사람이 왜 당신을 찾냐고, 내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가 제의를 받은 자리는 경제 쪽 비서관이었다.
그가 설명해 주기를, 한 명의 경제 수석 밑에 1급에서 3급까지의 7명의 비서관이 있다고 했다.
그는 많이 갈등했다. 밤잠을 설쳐 가며.
처음에 나는 반대했다.
좁은 여자의 판단으로는 정년이 65세까지 보장되는 교수 쪽이,
정권 바뀌면 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비서관보다는 훨씬 나을 성싶었다.
나는 그에게 여당의 참모 자리로 가는 건 학생들도 싫어할 거라는 말도 했었다.
"그거 끝나면 뭐해요? 도로 학교에 돌아올 수 있나?" 그는 웃으며 말했었다.
"왜, 우리 각시 굶길까봐?"
하긴 나도--- 그의 아버지가 그의 몫으로 남긴 땅이나 재산이 꽤 있어서,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일생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의 마음이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사나이로 한 번 태어나,
자기 소신과 뜻을 펼쳐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국정에 도움이 되는 자리라면,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한컨에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마음 속으로 결심을 굳힌 것 같아서 나도 더 이상 말릴 수는 없었다.
3월 초, 정식으로 발령을 받고 난 후로의 그는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란,
그저 새벽에 아침 식탁에서 잠깐,
그리고 밤 늦게 퇴근해 눈 붙이기 전의 잠시 정도였다.
그나마, 그가 있는 청와대로는 전화 통화 하기도 힘들었던 것은,
수시로 회의하고, 사람들을 만나느라 바쁘기도 하겠지만,
또 하나는 싱글인 걸로 되어 있는 그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는 나의 배려 때문이기도 했었다.
반면 그 사람은 만일 나라는 여자가 문제가 되어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면,
자신은 미련없이 그만두겠노라고 했다.
명예, 재산, 기타 이 세상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대상이 바로 너라면서.
그는 또 내 여자를 향한 세상의 어떤 모욕이나 비난, 어떤 종류의 음해도 참지 않겠다고 에기 했다.
그는 놀랄 정도로 의욕적으로 일을 해나갔다.
4월이 시작되며, 그는 '신경제 100일 계획'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새벽 별 보고 나가 별을 보고 돌아오는 날들이 계속되자,
그의 얼굴은 안스러울 정도로 핼쑥해져 갔다.
내 딴에는 몸에 좋다는 보약을 지어서 먹이고,
비타민도 종류대로 챙겨 먹이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의 안색은 별로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다.
4월 말은 율곡 비리로,
그리고 5월 말은 슬롯머신과 관련해 박철언, 이건개, 엄삼탁 등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해 시끄러웠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신경제 5개년 계획 수립 안' 작성은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늦어도 6월 말까지는 완료가 되어야 한다면서.
7월 초, 드디어 그가 밤잠을 못자며 고민하던 '신경제 100일 계획' 입안이 끝난 것 같았다.
그동안 바짝 긴장하고 있던 게 일시에 풀어져선지, 그는 쓰러질 듯이 힘들어했다.
체중도 몇 달전에 비해 무려 5Kg이나 줄어 있었다.
자다가도 식은 땀이 흐르고,
미열이 계속될 때가 많았으며, 면도를 하다 베인 상처가 오랫동안 아물지 않기도 했다.
둘 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마음 밑바닥을 스치고 지나간 건 끔찍한 공포와 불안이었다.
그 사람은 내게 내색 안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나는 그가 떨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미를 때가 아니었다.
하루, 월차 휴가를 내서 종합적으로 검진을 받아 보자고 내가 먼저 나서서 서둘렸다.
재발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않는 것만 같았다.
투병 초기의 그는 왜 자신한테만,
그것도 두 번씩이나 가혹하게도 신이, 엄청난 힘으로 때리시는지, 극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정 시기를 거치며, 평정을 되찾았는데 자기 뒤에 남아 있을 내가 가엾다며 자꾸만 눈물을 흘렸다.
나는 또 그가 불쌍해서 울고, 둘이 마주보기만 하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횟수가 자꾸만 늘어갔다.
나만이라도 의연하려고 이를 악물수록,
어떤 때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닮은 신음과 절규 같은 눈물이 흘렀다.
퇴원 후,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으로,
누가 어떤 게 좋다고만 하면 나는 무엇이든 다 해 볼 요량으로 매달렸다.
나는 그가 학교에서 공직으로 옮긴 것조차 원망스러웠다.
이번엔 지난 번과는 달리, 퍼진 부위가 넓고 깊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 사람은 내게,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것 잊고 새 출발을 하라고 신신 당부 하기도 했다.
자기의 유언으로 생각하라면서,
그는 몰라 볼 정도로 여위어 갔다.
머리는 거의 다 빠져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만져지는 살이라고는 없어, 뼈가 흉하게 다 드러나 있었다.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이제는 오로지 하늘이 걷어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었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 다시 서울대 병원에 입원을 했다.
청와대 비서실에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관료들이 병문안을 다녀 갔다.
그들이 왔을 땐 나는 자리를 피했다.
어정쩡한 나의 존재가 병문안으로 다녀간 그들의 입에서 좋은 안주 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문병객들이 가고, 유언처럼 내가 줬던 만년필과 내 사진 하나는 자길 묻을 때 꼭 넣어 달라고 말했다.
나는 짐짓 명랑한 체, 당신 다 나면 늦가을이나 겨울쯤 진짜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했다.
신혼여행은 당신이 예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유럽이나 타이티로 가고----
예물은 당신 이름과 내 이름이 새겨진 14K 반지 하나면 족하다고 말했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정말 그럴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조금씩 가을 냄새가 나는 바람이랑,
창 밖의 뭉게구름이랑,
병원 창을 통해 바라보이는 동승동 거리,
너무 말라 눈만 보이는 아이처럼, 내가 해주는 말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심히 듣고 있었다.
불란서 종교 작가인 질베르 세스브롱(Gilbert Cesbron)이라는 사람의 말도 얼마 간의 위안을 주기는 했었다.
죽음을 앞두고 환희하는 자는 성인이요
평온한 자는 용자이다.
최악의 것은 죽음이 아니고 살아 있는 송장이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소금이다.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한 일이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산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우리에겐 반드시 찾아오기에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 한다.
모든 의욕을 잃고, 몽유병 환자처럼 헤매던 내게, 미지는 절절한 시를 적은 편지를 보내주었었다.
그 편지를 나는, 아직도 깊이깊이 보관하고 있다.
나경아!
어떻게 위로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옆에서 보기에 이제야 천상의 배필을 만났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은 질투가 많으신 분이신가 봐.
하지만 나경아, 너희 어머님이 말씀하셨다는 대로 순서만 바뀔 뿐이야.
그분을 편안하게 먼저 보내 드리고, 우리도 오래지 않아 그 곁으로 가게 될 텐데, 뭐.
그래도 말이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이승에서 만났었다는 것,
그와 많은 추억들을 공유하며 그 최상의 가치를 맛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의 마지막까지 지킨다는 생각으로, 네게 닥친 무지막지한 시련을 이겨 내리라 믿는다.
내가 좋아하던 고정희 시인 알지?
자기가 사랑하던 지리산에 등반 갔다가 그 곳에서 최후를 묻는 사람 말이야.
내를 건너다 급류에 떠내려갔다는데,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그녀의 시를 읽고 나면 언제나 고통과 정면 대결할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아.
나는 이 시가 너무나도 좋단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그레! 그의 마지막 길에 내가 있을 수 있음을 축복이라 여기자.
형편없이 야윈 그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당신 먼저 가 계세요. 저도 곧 따라갈게요'라는 말을 수 없이 되뇌고는 했었다.
93년 9월 15일 아침.
새벽녘에 설풋 잠이 들었었나 보다. 익숙한 그의 목소리가 날 깨웠다.
그는 실핏줄마저 다 드러나 보이는 듯한 여윈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여보."
밤의 행위 중이 아닌, 햇살이 있는 데서 듣는 '여보'라는 호칭은 특별한 감흥으로 다가왔다.
참, 그렇지. 오늘이 내 생일이었구나----
청천벽력과도 같았던 재발 소식과 정신없이 이어진 재수술,
그리고 깊디깊은 절망과 슬픔의 몸부림 속에서 내 생일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터였다.
그는 최대한으로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내 앞으로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다소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생일 선물이야."
그가 말했다.
속에는 놀랍게도--- 유효 기간이 일 년으로 된 타이티행 오픈티켓이 들어있었다.
"당신---- 정말, 정말 고마워요---- "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동에 말을 잊지 못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간 액체가 양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의 병세는 거의 절망적이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밝고 화사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께를 감싸 안고 말했다.
"그래요. 자기 병만 나으면, 우리 당장 타이티로 여행 떠나요.
햇살과 맑은 공기를 쪼이고 돌아 오면 당신 몸에도 훨씬 좋을 거예요."
"거기 가면 우리, 바닷속에서 한 번 할까" 그는 여유 있게 조크까지 던졌다.
그날 저녁은 11월의 바람이 유난히 매섭던 날이었다.
그는 토하고 나서 함께 있던 누님에게 자기 집에서 책 한 권을 꼭 갖다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몰랐었다.
둘이 남게 되자, 그가 마지막으로 나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 세리머니(Ceremony)를 원했던 거였다.
나는 옷을 벗고, 그가 누워 있는 침대로 올라 갔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이지만,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그가 모자를 벗으며 흉하지 않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웃음을 띤 채 전혀 그렇지 않다며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그의 머리에 다정하게 키스해 주었다.
힘이 없는 그를 대신해, 내가 그의 몸 위로 올라 갔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통곡을 하며 이 세상에서 둘이 갖는 마지막 의미를 나누었다.
그가 한두 번 경련했고, 다시 침대 밑으로 내려온 내 몸에선 그의 정액이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 정사를 치룬 잊지 못할 저녁 이후, 2주째가 지나고 있었다.
11월의 기온치고는 꽤 낮은 영하 8도라는 기온은 입원실마저 얼게 만들었었다.
며칠 동안 눈도 못 붙이고 그이 옆에 붙어서 간호하던 누님도,
워낙 피곤했었는지 한기가 도는 병실 안에서 꼬박꼬박 졸고 계셨다.
안스러운 느낌에, 내가 먼저, 오늘은 댁에 가셔서 잠 좀 편히 주무시라고 그녀를 깨웠다.
누님은 내게 미안해하면서도, 며칠 동안 찾지 못한 집을 향해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셨다.
어느새 그이 곁에서 나도 깜빡 잠이 들었던가 보다.
눈을 떠보니 새벽 세 시였다.
이불을 다시 덮어 줄 요랑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 셨다.
아, 그가 숨을 쉬지 않았다.
그 사람의 심장이, 맥박이 더 이상 뛰고 있질 않았다.
장례가 있던 날은 늦가을의 바람이 모질게 불던 날이었다.
11월 말이었고, 날씨는 을씨년스러웠다.
그가 어디 잠깐 다니러 갔다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제 이 지구상 천지 어디에도 그는 없었고, 오로지 나 혼자였다.
그는, 법적으로는 타인으로 되어 있는 내게도 유산을 남겼다.
자기 사랑의 최소한의 표현이니 마음 쓰지 말고 아무런 부담없이 받아 달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하도 울어서 눈물이 마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용인 선산에 그의 관이 입관될 때 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잊은 채 몸부림쳤다.
땅 속으로 영원히 들어가는 그를 향해 나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도종환 시인의 '그대 잘가라'를 그에게 바치고 있었다. (p311)
- 그대여 흘러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 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 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 졸시 <그대 잘 가라> 전문.
(도종환 시인의 시집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맨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그대 잘 가라> 시를 옮김)
※ 상기 글은 <광기로 혹은 향기로>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숙영 - 광기로 혹은 향기로
청맥 - 1994. 08.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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