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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ㅅ - ㅇ

작가의 말 -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은희경

by 탄천의 책사랑 2025. 6. 27.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 은희경/창비 2007. 03. 30.

 

작가의 말
야홉번째 책을 낸다.
그런데 훗날 이 책을 뒤에서부터 헤아리면 몇 번째가 될까.

뒤가 있다고 생각하니 이 정도면 됐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다음에 잘 하지 뭐,라고도.

실은 내 소설 모두가 다 이런 회피심리에 의지하며 쓰였다.
나는 비관적인 사람이고, 그래서 더욱 그런지 모르지만 헛된 힘을 빼는 일이 여전히 어렵다.

헛된 힘의 정체는 아마 상투성과 허위일 것이다.
좋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던 시절이 있었다.
덕분에 내 머릿속에는 상식적인 생각이 가득 차 있다.
머리를 열면 그것이 제일 먼저 튀어나온다.
에헴, 하고 점잖게 걸어 나오려는 그저 그런 생각들을 밀치고 
별처럼 빛나는 (틀림없이!) 나의 진짜 생각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중력과 반대방향으로 나 자신의 근육을 사용해야 한다.
헛된 힘을 빼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체력을 만들 필요가 있다.

소설 한편을 쓰고 나면 이로써 또 한 번 한국문학을 빛내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야 힐 텐데 
다만 가까스로 한가지의 고독을 이겨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잠깐이나마 낙관적이 되는데, 그때 짓게되는 안도의 웃음이 바로 소설 쓰는 체력이 돼주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기분이 좋았던 시절에 소설을 많이 썼던 듯싶다.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소설가는 행복할 때 소설을 잘 쓴다.
기고만장하면 더 잘 쓴다고 본다.
게다가 이제 나는 잠시 진지한 생각에라도 빠져 있으면 
누군가가 다가와서 요즘 얼굴이 안 좋아졌다며 건강을 챙기라고 걱정해 주는 나이이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웃지 않으면 자칫 표정에 풍상이 엿보인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영화관에서나 식탁에서나 책상 앞에서나 일부러 큰 소리로 웃기로 결심했다. 

소설 속에서도 역시.
이번 소설집에 그 여정이 조금쯤 보이는 듯하다.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시집을 뒤지곤 한다.
K도 도와준다.
그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에서 문장을 하나 골라냈다.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그 문장으로부터 표제작의 제목이 생겨났다.
내가 발견한 문장은 '하지만 지금껏 그가 삶을 시작한 적이 있던가'와
'사랑했노라. 자신의 내면, 자기 내면의 황야를'이었다.
고마워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소설을 꽤 여러 번 고치는 편인데 그것은 그만큼 초고가 형편없다는 뜻도 된다.
소설이 되기 이전의 어설픈 생각을 모두 들어주고 마지막 교정에 동반해주는 K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매번 빠짐없이 술을 사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산은 된 상태이다.

이 책에 실린 소설 중 절반을 원주의 토지문화관 작가 집필실에서 썼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평화롭고 건강했다.
크게 감사드린다.
책을 만드느라 고생해준 창비의 여러 담당자들께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지난여름 오래된 절이 있는 일본의 도시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절에서 딸은 사랑을 얻게 해 준다는 부적을 샀다.
절 입구에 한번 신기만 하면 남자를 절대 도망칠 수 없게 만들어준다는 무쇠 신발이 있었다.
아들은 여자 친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 반대를 무릅쓰고 그 신발을 신은 채 사진을 찍었다.
남편은 물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돈, 권력, 애정, 건강을 가져다준다는 네 가지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행운의 약수 앞에서였다.
네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에 나는 급히 돈 쪽으로 가서 줄을 섰다.
물을 마신 뒤 이번에는 애정 쪽 줄로 뛰어갔다.
그다음엔 건강 쪽으로, 덕분에 아마 모든 일이 잘될 것 같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딸이 이 책을 좋아할는지 궁금하다.
엄마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의 가족들에게도 이 책을 통해 안부를 전해본다.

소설은 혼자 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누군가 높은 곳으로 한발 올라가 시야를 넓혀놓으면 다음 사람은 그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
서로 번갈아 업고 업히며 함께 산을 오르는 것이다.
아무려나.
그동안 나와 유쾌하게 술을 마셔준 선후배 동료들에게 언제든지 한잔 사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시 골목 가득 꽃향기를 담고 봄밤이 당도했으니!

2007년. 봄
은희경


※ 이 글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5.06.27.  20250622_13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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