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 이은경 / 서교책방 2024. 05. 30.
에필로그
나의 친애하는 다정한 관찰자님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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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남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지금 당신이 일하는 경력에서 규현이가 지방 의대 정도 합격하면 그림이 거의 완벽한데."
말하기도 입 아픈 얘기지요.
애들은 이렇게 키워야 한다고,
이렇게 키워야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잘 나올 거라고 전국을 다니며 떠들고 다니는 제가
자식의 성적과 대입 결과로 증명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겠죠.
남편의 말대로 큰애가 의대 합격증을 받는 순간,
제 지난 책들은 긴급히 중쇄를 결정할 것이고,
'의대 합격시킨 엄마의 자녀교육법'이라는 타이틀의 신간 제안이 쏟아지겠죠.
아이의 초등, 중동 과정을 담은 제 유튜브 채널 속 해묵은 영상들의 조회 수도 꿈틀대기 시작할 거라 짐작해 봅니다.
그 모든 것은 '이은경'이라는 저자에게 돈과 명예를 넉넉히 가져다줄 것이며,
무엇보다 지금까지 제 콘텐츠를 신뢰하며 함께 자녀를 키워온 독자들께 얼마나 든든한 힘이 될까요.
도박하는 심정으로 지금껏 따라 했던 방법들이 틀리지 않았구나,
이 사람에게 정착하길 잘했어, 합격 기운은 내가 받아 가야지.
독자님들의 속마음을 예상해 보다가 혼자 실실거릴 때도 있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제가 하는 일들이 무섭고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앞세워 내 경력과 재산으로 만들기에는 손색없는 이 일이 갈수록 두렵습니다.
제대로 포텐을 터뜨러줘야 할 고등학교에서 정작 내신 등급 안 나올까 봐,
혹은 변변한 대학에 합격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이유가
아이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위함으로 둔갑해 버릴 수 있는 지금의 제 일이 솔직히 몹시 두렵습니다.
아이가 본인의 목표를 위해 지금의 삶을 즐기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닌,
본인의 성적과 입시 결과 때문에 난처해질 엄마를 근심하여 떨어진 성적을 미안해할까 봐 걱정됩니다.
그렇게까지 엄마를 살피는 타입은 아니라는 점이 한때는 서운했는데,
지금은 다행스럽습니다.
비단 저만 그렇게 여러분께 관찰당하는 중일까요?
이런 저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계실 여러분의 사정도 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에 비해 아주 조금 더 불특성 다수의 관심을 받는 중일 뿐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주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음먹고 참석한 반 모임에서,
두 시간 이용권을 결제했던 키즈 카페에서,
아이를 데리려 나간 교문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관찰합니다.
서로의 아이를 관찰하고, 눈에 들어오는 그 아이의 엄마를 유심히 살핍니다.
어쩌다 한번 마주치는 이웃도 그렇지만 친지들의 눈도 매섭습니다.
해마다 입시가 마무리되는 2월이면 사촌과 조카의 입시 결과를 궁금해하거나,
기다린 끝에 이제야 알게 되었다거나,
아직 소식이 없어 걱정이라거나,
결국 재수종합반에 등록했다는 조카 이야기는 우리네 살아가는 흔하고 평범한 모습인걸요.
그래서 저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성적을 기대하고, 목표를 상향 조종하고, 그 목표를 강요하고 싶은 지금의 내 마음이 나를 위한 것인지
아이의 인생을 위한 것인지 짚는 일에 일부러 시간을 냅니다.
아이 본인이 괜찮다는데, 이 정도면 만족하겠다는데,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데 부모가 포기하지 못하고 아이를 설득하는 데에 정성을 쏟는 이유가
정말 온전히 아이 인생을 위함인지에 관해서는 한 번쯤 짚어야 할 일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분이 계심에 감사합니다.
제가 제 욕심에 정신을 놓치고 방향을 잃어가는 순간마다 저를 깨워주고 혼내주세요.
선생님도 참, 욕심도 많으시다고,
그만하면 감사하고 사시라고,
엄마 인생 아니고 애 인생이라고,
그렇게 욕심내다가 그르친다고 정신이 바짝 드는 댓글을 남겨주세요.
어디 한번 잘되나 보자,라는 퉁퉁 부은 댓글도 거부할 자유는 없어진 지 오래지만,
이왕이면 다정한 마음으로 관찰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주세요.
제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의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결심한 저를
결과가 아닌 과정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저의 다정한 관찰자가 되어주세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저는
감지 않은 머리를 틀어 올린 채 벌건 얼굴로 달리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속 어떤 모습은 여러분을 실망하게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저라는 엄마의 소소한 일상이 여러분께 위로와 공감을 드릴 수 있다면
계속해 관찰당하는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을 다정히 관찰하겠습니다.
댓글로 남겨주시는 여러분의 일상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옆 집 언니가 되어드릴게요.
서로가 서로를 다정하게 관찰하는 중임을 기억한다면
덜 예민하고 덜 불안한 우리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친애하는 다정한 관찰자님들의 일상을 넘치는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이은경 드림.
[t-25.01.27. 20250125_173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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