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바나나 - 키친 」
키친 - 요시모토 바나나 / 영웅 1991. 02. 13. p13~19
하지만 마냥 그렇게 지낼 수만은 없었다. 현실은 각박하니까'
할머니가 착실하게 어느 만큼의 돈을 남겨두었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살기에는
이 집이 너무 크고, 벅차 달리 내가 살 집을 찾아보아야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아파트 정보>를 사가지고 와 들춰보았지만
빼곡히 들어찬 고먼고만한 방들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빙들빙들 돌 지경이었다.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이사는 능력 있는 사람이나 하지, 내개는 무리다.
밤낮으로 부엌에서 잠만 잤더니 뼈 마디마디가 아프고 기운이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 머리를 더 골치 아프게 만들어 집을 보러 다니고,
짐을 나르고, 그 짐을 풀고....!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는 번거로움을 떠올리며 절망하면서 뒹글뒹글 누워만 있었다.
자다가 횡재를 한다더니,
그러던 중에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찾아온 그날 오후의 일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딩동딩동하고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구름이 낮게 깔린 봄날의 오후였다.
<아파트 정보>를 가끔씩 들여다보는 일에 완전히 지쳐 있었지만,
어차피 이사는 하게 될 것 같아서 끈으로 잡지들을 묶고 있던 중이었다.
거의 잠옷 바람으로 허둥지둥 달려나가 아무 생각도 없이 문을 열었다.
강도가 아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문 앞에는 다나베 유이치가 서 있었다.
"지난번에는 고마웠어요"
내가 먼저 말을 건냈다.
장례식 떄 많은 도움을 주었던 한 살 아래의 좋은 청년이었다.
듣자니 나와 같은 대학에 다닌다고 한다.
지금 나는 휴학 중이다.
"천만에요. 살 곳은 정했나요?" 그가 말했다.
"아뇨, 아직...., "하며 난 영문 모를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역시 그렇군요"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할래요?"
"아뇨. 지금 막 나가는 길이라 시간이 없어요"하며 그가 웃었다.
"잠깐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어머니와 상의해 봤는데요. 얼마 동안 우리 집에 와 있지 않을래요?"
"네?" 내가 되물었다.
"여하튼 오늘 저녁 7시경에 우리 집에 한번 들러주세요. 이건 약도예요"
"네에" 나는 몽한 상태로 그의 메모를 받아 들었다.
"자아, 그만 갈께요. 어머니나 저나 미카게 양이 와주시길 바라고 있어요"
그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밝아서 현관에 서 있는
그 사람의 눈동자가 훨씬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그가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어쨌든 한번 갈게요"
나쁘게 말하면 무엇에 씌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아주 담담했기 떄문에 그의 말이 진실임을 믿을 수가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암담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였다.
그 빛이 너무나 환하고 밝아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럼, 이따가' 하더니 웃음을 남기고 가버렸다.
나는 할머니의 장례 때까지도 그를 알지 못했었다.
장례식 날 돌연 다나베 유이치가 찾아왓을 때는 그가 할머니의 애인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그는 눈물로 부어오른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분향을 하고는,
할머니의 유해를 보자 또다시 눈물을 뚝뚝 떨구였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갖고 있는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그 사람보다 적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정도로 그는 슬퍼했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찍어누르며 말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 후 그에게서 여러 가지의 도움을 받았다.
다나베 유이치.
그 이름을 할머니한테서 언제 들었는지 생각해 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른 사람과 혼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할머니가 단골로 가는 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이었다.
'좋은 학생이 있는데, 다나베 군이 말이다. 오늘도 말이지....' 하는
말들을 할머니에게서 몇 번 들었던 기억이 났다.
꽃꽂이를 좋아했던 할머니는
언제나 부엌에 꽃을 꽂아두었으므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꽃집에 들르곤 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인 가는
그가 커다란 화분을 안고 할머니의 뒤를 따라 집에 왔던 적도 있는 것 같다.
그는 긴 팔다리를 가진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지만,
꽃집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오가다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아주 조금 알게 된 뒤에도 그의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인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행동이나 말씨가 아무리 부드러워도 그는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는 그 정도의 인연이 있을 뿐인 사람이었다.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촉촉하고 포근한 봄비가 거리를 감싸는 그런 밤에 약도를 들고 걸었다.
다나베는 중앙공원을 사이에 두고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맨션에서 살고 있었다.
공원을 빠져나가자 밤숲에서 나는 나무 냄새로 숨이 막힐 듯했다.
비에 젖어 반짝이는 도로에 무지개 빛이 반사된 길을 자박자박 걸어갔다.
사실 나는 그가 나를 불렀기 때문에 그 집으로 가고 있는 것뿐이었다.
특별히 어떤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높이 솟은 맨션을 올려다보니 그의 방이 있는 10층은 더욱 높아서
틀림없이 야경이 아름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울리는 내 발소리를 느끼며 초인종을 눌렀다.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내가 들어선 곳은 참으로 묘한 방이었다.
부엌으로 이어지는 거실에 놓인 중후한 소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넓은 부엌의 식기 선반을 뒤로 하고 테이블을 놓지도, 카펫을 깔지도 않은 채 그 소파가 놓여져 있었다.
소파는 베이지 색 천으로 감싸여 있었는데 마치 TV 겅고에나 나올 듯한,
가족들이 모두 둘러앉아 TV를 보는 옆에 외국에서나 기를 수 있는 커다란 개가 앉아 있을 듯한,
정말로 멋지고 훌륭한 소파였다.
배란다가 보이는 커다란 창 앞에는
마치 정글을 연상케 하는 많은 식물들이 화분에 심겨져 줄지어 있었고,
집안도 온통 꽃투성이였다.
곳곳에 놓인 병에는 각양각색의 계절의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 가계에서 잠깐 빠져나오겠다고 했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괜찮다면 집안을 들러봐도 좋아요. 안내할까요?
무엇으로 판단하는 타입이죠?"
차를 준비하면서 유이치가 물었다.
"뭘요?" 내가 그 푹신한 소파에 앉아 물었다.
"집과 그 집주인의 취향!
왜, 화장실을 보면 알 수 있다든가 하는 그런 말들 하잖아요"
그는 덤덤하게 웃으며 차분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부엌" 내가 대답하자,
"자아, 여기에요. 얼마든지 보세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가 차를 준비하고 있는 뒤쪽으로 돌아가서 찬찬히 부엌을 구경했다.
나무로 된 바닥에 깔린 느낌이 좋은 매트,
유이치가 신고 있는 고급스런 실내화,
최소한의 필요한 것들만을 쓰기 좋게 배열한 주방용품들....,
실버스톤 프라이펜과 독일제 껍질제거용 칼은 집에도 있던 것들이었다.
요령꾼인 할머니가 손쉽게 슬슬 껍질이 벗겨진다며 좋아하던 것이었다.
작은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그릇들,
반짝이는 유리잔, 얼핏 보면 모두 제각각이지만 전부가 기품 있는 것들뿐이었다.
특별한 요리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 대단히 큰 접시들도 눈에 띄었다.
또 뚜껑이 달린 생맥주 조끼가 놓여 있는 것도 왠지 마음에 들었다.
유이치가 괜찮다고 하기에 작은 냉장고도 열어보았더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오래전에 넣어 둔 것 같은 음식들은 보이지 않았다.
음음, 고개를 끄덕이며 둘러보았다.
좋은 부엌이었다.
나는 이 부엌을 첫눈에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 이 글은 <키친>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4.07.01. 20230701-160919-3]
'문화 정보 >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모두 책에 있다. (0) | 2024.08.03 |
---|---|
키친 - 11~13 (0) | 2024.06.29 |
김승옥의 무진기행 (0) | 2008.01.10 |
모래톱 이야기 (0) | 2007.10.25 |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흔들리는 영혼 (0) | 2007.05.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