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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보/공간

키친 - 11~13

by 탄천사랑 2024. 6. 29.

·「요시모토 바나나 - 키친 」

 

 

 

키친 - 요시모토 바나나 영웅 1991. 02. 13. p11~13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를 말한다면, 그곳은 부엌이다.
어느 곳, 어떤 곳이든, 그곳이 부엌이고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좋다.
가능하다면 편리하고 기능적인 곳이면 더욱 좋겠다.
청결한 마른행주가 몇 장이고 준비되어 있고, 하얀 타일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곳.

지독하게 더러운 부스러기들이 널려 있고,
슬리퍼 바닥이 새카맣게 더러워진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부엌은 넓을수록 좋다.
겨울 한철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식료품들이 가득 들어찬 거대한 냉장고가 떡 버티고 있고,
그 은빛 문에 내가 기대선다.
기름이 여기저기 튄 가스 레인지나 
녹이 슨 식칼에서 문득 고개를 들면창 밖으로는 쓸쓸히 별이 빛난다.

나와 부엌이 남는다.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느낌이다.

정말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을 때, 나는 혼자서 황홀한 생각에 잠긴다.
언젠가 죽을 때가 오면 부엌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홀로 추운 곳에서 죽든 누군가가 있는 따뜻한 곳에서 죽든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싶다.
부엌에서라면 괜찮을 것이다.

다나베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매일 부엌에서 잠을 잤다.
어디에 있든 무언가가 편치 않아 방에서 차츰차츰 편안한 곳으로 흘러가다 보니 
냉장고 옆이 가장 편히 잠들 수 있는 곳임을 어느 날 새벽 깨닫게 되었다.

나, 즉 사쿠라이 미카케의 양친은 두 분 다 내가 어렸을 떄 돌아가셨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나를 길러주셨다.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그래서 할머니랑 둘이서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다.

얼마 전, 그만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가족이라는, 
분명히 함께 해야 할 존재들이 세월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줄어가더니 
이제 혼자 여기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 때는 
눈앞에 있는 것들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방에서 
이렇게 주욱 시간이 흘러 이젠 나 혼자만 남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마치 공상과학 같다.
우주 속의 어둠 같다.
장례식을 마치고 사흘 동안은 멍청해져 있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슬픔의 포화상태에서 아슬아슬한 졸음에 몸을 맡긴 채,
볕이 잘 드는 적막한 부엌에 이불을 깔았다.
담요를 몸에 둘둘 감고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냉장고의 위잉하는 소리가 적막감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그곳에서는 그런 대로 긴 밤들이 편안하게 지나갔고 아침이 찾아와 주었다.

그저 별 아래서 잠들고 싶었다.

창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깨고 싶었다.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다 그저 담담하게 지나갔다.



※ 이 글은 <키친>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4.06.29.  20210605-180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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