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경욱 - 더 넓은 세상을 디자인하는 즐거움 국제금융기구」
우리 아이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한국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걸 스카우트 회장직을 맡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명절을 맞아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은 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걸 스카우트에서 마련한 작은 선물을 전달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안목이 아직 어른스럽지 못했던 저의 눈에 비친 그분들의 모습은
최소한의 삶의 조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가히 비참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가난'이라는 것이 특정한 국가 혹은 특정한 지역에서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극한의 빈곤과 질병, 전쟁, 기아 속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삶의 개선을 위해서 미약한 일이라도 하리라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개발도상국의 빈곤 퇴치를 위해 일하는 국제개발 기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WB를 처움으로 알게 되고,
대학원 시절 하계 인턴으로 일하면서 WB의 여러 가지 사업과 비전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최소한의 생존권과 인권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희망과 사명감을 안고 입행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1984년,
매년 1만여 명이 훨씬 넘는 지원자 중에서 매우 까다로운 채용 절차와 심사를 거쳐
40~50명을 선발하는 Young Professional Program(YPP)으로 WB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주로 했던 업무는 사업을 개발하고 이행하고 평가하는 Operation 업무입니다.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 40여 개 국가의 개발 사업에서
Investment and Policy Loans - Guarantees - Analytical and Policy Work 등
다양한 상품을 활용하여 개발도상국을 지원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한국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가지기 전이었던 중국의 개발 사업에 참여했고,
1980년 후반 IFC 근무 시절에는 뉴욕 및 런던의 주식시장에 상장되었던 한국 및 태국의
Country Fund를 관리하는 팀의 팀원이었으며,
Foreign Investment Advisory Services(FIAS) 자문 그룹의 일원으로도 근무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에 WB 최초로 구 소련 국가들의 개발 사업에도 참여를 했습니다.
최근 3년 동안은 베트남의 하노이에 매니저로 부임하여 50억 달러 규모의
sustainable development program을 관리하면서 베트남에 대한 개발 전략 등을 수립하는 일을 했습니다.
현재 주목받고 있는 신흥시장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베트남의 환경,
교통, 에너지, 상하수도, 농업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를 관리, 감독하면서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많은 나라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겪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살을 에는 추위를 이기기 위하여 두꺼운 코트와 모자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콘택트 렌즈를 만지작거리면서
출장 후에 돌아가면 반드시 라식 수술을 받으리라 굳은 결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기억 중 하나는 중앙아시아 어느 국가를 방문했을 때
출장단 단장이던 저에게만 특별히 귀한 음식이라며 양의 눈 요리를 내왔던 일입니다.
많은 곳을 다니며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았지만 이것만큼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채식주의자라고 정신 없이 둘려대면서 음식을 준비하신 분들이 섭섭하지 않도록
예를 다하고자 주린 배가 잊혀질 만큼 노력했던 경험이 떠오릅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수행해온 많은 일 중에서 중국 상하이 지역 상수도 사업은
가장 소중하게 기억하고 싶은 결실입니다.
원래의 취지는 관계사업이었는데,
출장을 다니면서 이곳의 많은 젊은 여성들이 다리를 절름거리며 힘들게 걷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유는 식수에 플루오르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가 있는 식수를 지속적으로 마셔서 많은 여성들이 출산 이후에도 고통을 받고,
뼈가 녹아서 절름발이가 되어갔습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아이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며 간절히 하소연하던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식수공급을 사업에 추가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혼신의 힘과 정열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26년간 WB에서 근무하면서 의지는 있으나 현실적 여러 어려움에 처한 국가들과
그 국가가 돌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인
국민들의 인권을 국제기구의 관심과 노력으로 살리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이 인류의 평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저는 머지 않은 미래에 WB 같은 국제개발 금융기관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체제 미전환 국가인 북한이나 미얀마 등에서 개발 원조 사업을 수행하리라 예상합니다.
은퇴 후에라도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 국가의 빈곤 퇴치 및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가난한 국가들의 재정 악화 및
상업 금융기관등을 통한 개발 조달 재원을 더더욱 어렵게 만들어
WB 같은 국제개발 금융기관에 대한 원조 요청이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국제개발 기구가 담당하는 역할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원조를 받았던 국가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로 성장한
국제개발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더욱이 G20 개최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지위가 상승해 국제개발 기구에서도
한국과 파트너십 구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국제기구의 중요성,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 및 국제기구 출연 규모 등을 감안할 때
아직은 국제기구에 진출하여 근무하는 한국인의 숫자가 다소 적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서 한국 정부가 국제기구 및 국제개발 기구의 성격,
해당 기구에서 한국인들이 어떠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젊은 세대들에게 알려주려는 노력은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세대와는 달리 현재 한국의 젊은이들 중에는 유창한 언어 능력,
국제적인 감각, 전문성 및 업무에 대한 열정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국제기구에 더 많이 진출해 열정을 가지고 현신적으로 근무한다면
이 또한 한국인의 위상을 제고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들이 국제기구와 한국의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면
한국의 국익에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조만간 도전 정신, 능력과 열정을 가진 더욱 더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국제개발 기구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기를 기대합니다.
김훈애
미국 UC Berkeley University에서 화학공학을, 캐나다 McGill University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미국 Cornell University에서 석.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4년 WB의 YPP로 입사하여 26년간 WB에서 다양한 분야의 경제학자로서 혹은 매니저로서 근무했다.
현재는 Middle East and North Africa의 섹터 매니저로서 워싱턴 D.C에서 일하고 있다.
※ 이 글은 <더 넓은 세상을 디자인하는 국제금융기구>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허경욱 - 더 넓은 세상을 디자인하는 국제금융기구
기획재정부 - 2011. 05. 20.
[t-23.05.29. 220526-165516]
'일상 정보 > 사람들(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스 고딘-보랏빛 소가 온다/한국어판 저자 서문 (0) | 2023.06.02 |
---|---|
박완서의 리듬이 담긴 아치울 이야기/호원숙 작가 인터뷰 (0) | 2023.06.01 |
새로운 세상의 탄생에 기여하는 딴짓의 가치/데니스 홍(로봇공학자) (0) | 2023.05.14 |
태양의 여행자-프롤로그 (0) | 2023.05.11 |
자본이 젊은이들의 사랑도 장악해 버렸다/박범신 작가 (0) | 2023.05.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