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나 - 「서울에서 하버드까지」
어느 누군가가 내게 이제까지의 내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요구한다면 난 주저없이 대답할 수 있다.
Antithese. 안티테제.
수년 전 찰스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 를 처음 대했을 때
소설의 첫 부분에 되풀이되는 상반된 문구들을 읽으며 매료되었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수년 후 세상이 나를 안티테제로 가득한 인생길로 막상 끌고갔을 땐
나는 매료되기는 커녕 대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지곤 했다.
한국에서 남다른 인정을 받던 나와 미국에 온 후 조롱의 대상이 된 나.
8년 전의 부모와 지금의 그분들
남들이 보기에 별다른 걱정거리 없고 밝은 모습의 혜나와 내 가슴 속의 상처투성이 모습의 혜나.
세속적 물질과 사회적 성공을 갈구하는 내 야망과 영적 행복과 안정을 추구하는 내 영혼,
반듯한 내 모습과 야위고 초췌한 부모님의 모습.
하버드에서 맛본 실패와 성공.
너무나 대조적인 이 모든것들,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안티테제들을 한꺼번에 어떻게 처리 해야 할지.
그 대처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서로를 향해 으르릉거리는 그들을 내 안에 모두 간직할 자신이 없었고,
또 그럴 만한 힘과 용기가 없었기에
상방된 두 가지 중 하나만을 골라서 '이것만이 내 것이다.'라고 못을 박아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서로 대조적인 것들일지라도 그 모든 안티테제들은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
떼어 낼래야 떼어 낼 수 없는 불가결한 요소들인 것이다.
이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자아는
각 안티테제적 요소 중 마음에 드는 면만을 골라서 간직하려고 고집을 부렸고,
그럴수록 나는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 혼란의 결정이 바로 하버드에서의 첫겨울을 맞았을 때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버드를 통해 나는 진귀한 인생 교훈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배운 사실은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대조적이고, 실망스럽고, 아픈 면이라도
내 자신의 모든 면을 진정한 '나'로서 용납하고 포용해야만 자아와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평정을 찾았을 때 비로서 나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었고
내 주위의 사람들을 아무 기대와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유 명사 중에 하나가 '하버드'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런 만큼, 사람들은 일정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 하버드와 하버드 생들을 바라보곤 한다.
하버드 대만 졸업하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성공의 길이 기다리고 있고
모든 하버드 생의 이마에는 '천재'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줄 생각하는 예가 많다.
자존심 세고 콧대 높은 하버드 생들도 이런 선입견을 부각시키는 일을 돕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려 들지를 않기 때문에 대중은 하버드를 더더욱 우러러보게 되는 것 같다.
'하버드 생이 그것도 몰라'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자신을 최고의 지성인이자
지식의 철벽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하버드 생도 흔히 볼 수 있다.
하버드는 지상 낙원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그리고 하버드 생들은 만물 박사들이 아니다.
하버드가 세계 최고의 경쟁률을 지니고 있으며 최상급의 교육 기관인 것은 사실이며,
다른 어느 교육 기관보다 더 높은 수의 다방면으로 뛰어난 학생들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사실들로 인해 일개의 교육 기관을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 일은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똑같을 수 없듯이
각 인간마다 진정한 '성공'에 대해 제각기 다른 의미와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인 부모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너 A라고 알지?
개도 재작년인가 하버드를 졸업했는데 말야,
뭐 동양학을 전공했다나?
대학 2학년 때 까진 의과 대학원에 가서 의사사 되겠다고 얌전히 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더니 글쎄,
어느 날 갑자기 동양학자가 되고 싶다고 기를 쓰기 시작했대!
찌찌찌...,"
참 안됐다는 듯,
아까운 재원 한 명을 잃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는 그분들을 바라보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왜 한인 부모들은 의사,
변호사가 아니면 인생의 실패자인 듯 젊은이들을 취급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아이비리그 대학, 의사, 변호사 등을 외치시는 그분들을 이해 못하지는 않는다.
이민 1세로서 말 못할 고생과 서러움.
이런 것들을 나는 어느 누구보다 더 가슴 깊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와 같은 목표를 지니고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
모든 인간이 똑같은 성공의 길을 걸을 수는 없다.
각 인간을 위해 예비된 인생길이 서로 다르듯 각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법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미술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 신경외과 의사로서 행복을 찾을 리가 없고,
타고난 연기자가 재산법 변호사로 만족할 리가 없다.
화가나 연기자가 신경 외과의나
재산법 변호사보다 질적으로 더 낮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대학 진학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학교가 작은 규모의 인문계 대학이라면 월리암스 칼리지에 갈 수도 있고,
신학을 하고 싶으면 위튼 칼리지에 갈 수도 있다.
거기에 비해, 하버드란 이름 하나만 믿고 선택한다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셈이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신의 취향과 인생 설계에 최상의 대학 교육을 받는 것이지
일생 동안 하버드 졸업생으로서의 이름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버드가 아니더라도 학생 자신이 원한다면 세계 어디서나 훌륭한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버드를 졸업한 모든 사람이 모조리 의사, 변호사, 대 기업인, 유명 인사가 되지는 않았다.
하버드 스퀘어 안에서 자그마한 옷가게를 운영하는 사람, 국민학교 선생, 아프리카 선교사,
무명 배우 등 세속적 눈으로 봤을 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만의 인생을 추구한 참된 성공인들이아 할 수 있다.
반면, 자신이 원하는 인생 목표를 추구하여 사회적으로 성공한 예도 많이 있다.
타미 존스, 엘리자베스 슈, 그리고 중퇴자 빌 게이츠 등 그 리스트가 끝이 없다.
중요한 점은 이들 모두가 어느 누구의 기대와 사회의 강요에 굽히지 않고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확실히 굳힌 채 자기 자신의 꿈을 끊임없이 좇아갔다는 사실이다.
'성공'에 대해 한 가지 더 말하고 싶다.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자신의 인생 목표를 이뤘지만 올바른 가치관과 믿음,
그리고 인격을 갖추지 못했다면 진정으로 성공한 인간으로 보고 싶지 않다.
부, 지위, 직업 등은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으며
죽음의 경계선을 넘지 못하는 보잘것 없는 것들이지만 한 인격체로서 다른 인간에게,
또 이세상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야말로 육체가 부패한 후에까지 남길 수 있는 업적이 아닐까?
시험을 잘 보고,
높은 성적을 받고,
명문 대학에 들어가고,
각종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해야만 값어치 있는 학생으로 칭찬벋을 수 있다는
삐뜰어진 관념을 우리 학생들에게 심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간의 경쟁심을 부추기고 학생을 자만하게 하며 다른 학생과 그 부모로 하여금
열등감과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현상이 일어날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대학 생활의 반을 이미 세월의 물결 속으로 떠나 보낸 스믈한 살짜리로서의 꿈은 무엇일까?
워낙 여러 개의 얼굴들을 지닌 꿈이기에 간결히 표현하기가 어렵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참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싶은 꿈.
바로 이것이 현재 내 꿈의 중심된 요소다.
허버드 인으로서 보낸 지난 2년 동안 나는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
두려움, 흥분, 좌절, 희열, 사랑, 평안....,
그 모든 것을 통해 무한히 배우고 자랄 수가 있었다.
94년 어느 가을날 보스턴 공항에 내리던 내 모습과
96년 여름인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해 볼 때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98년 어느 봄날 까만 색 졸업 가운을 걸치고
위풍당당하게 행진곡에 맞추어 하버드 야드를 걸을 떄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거대한 화산처럼 뿜어 나오는 희망과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이제 무엇이라도 감당할 자신이 있다.
당당한 모습으로 나 자신만의 꿈을 추구하고 나 자신만의 인생 길를 닦을 채비도 되어 있다.
이제 난 하버드 생으로서가 아니라 완전한 희생을 통해 완전한 사랑을 받아 온 행운아로서,
나의 조그만 꿈으로
어두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밝고 아름답게 비춰 줄 수 있는 빛과 소금이 되련다. (p323)
박혜나 - 서울에서 하버드까지
계몽사 - 1996. 12. 20.
'일상 정보 > 사람들(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니투데이-"목숨 걸고 있다" 이재용, 존경할 부자 첫 1위 (0) | 2022.06.20 |
---|---|
매일경제-김황식 전총리 특별인터뷰/자유의 가치 실현하려면 협치가 필수 (0) | 2022.05.11 |
중알일보 - “나보다 더 노력한 기사는 있어도 더 힘들게 공부한 기사는 없을 것” (0) | 2022.03.04 |
세계일보-딸 10주기 기일 앞두고 떠난 이어령… "하늘에선 오해 풀길" (0) | 2022.02.27 |
이어령 선생을 그리며 (0) | 2022.0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