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미셸 투르니에 -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
글 쓰는 사람은 때로는 연애편지,
때로는 모험소설을 써서 고독한 독자에게 말을 거는 은자(隱者)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반면에 말하는 사람은 청취자를 필요로 한다.
혼자 하는 말은 미치광이의 중얼거림 같기 때문이다.
정치 연설가는 소란스러운 대중을 원하고,
종교 설교자는 명상적인 신자를 원하고,
이야기꾼은 벽난로 주위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을 원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의 귀를 원한다.
말은 좁은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지만, 순식간에 사라진다.
반면에 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말이 살아 있는 것이라면, 글은 죽어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사람들은 큰 소리로만 책을 읽었다.
그래서 유행성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약해진 사람은 책을 펼 수조차 없었다.
요컨대 독서 훈련의 첫단계는 소리내어 읽는 것이었다.
눈으로 읽거나 소리내지 않고 읽는 묵독(默讀)이 그 두 번째 단계이다.
이렇게 볼 때도 말은 글보다 우선이다.
신은 세상을 명명하면서 창조하였다.
이것이 창조자의 말이다.
수천 년이 지난 후에 나타난 글은 말에서 연유한 것이고, 글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였다.
모든 문학사는 살아서 생기를 띠는 '말'의 근원 위에 '글'이라는 항구적인 회귀를 취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위대한 작가란 우리가 그의 책을 펴는 순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알 수 있는 작가를 의미한다.
그 작가는 말과 글을 하나로 만드는 데 성공한 작가이다.
그러나 말에 너무 의존하는 글은 위험성이 있다.
길이 물에 잠기면 통행이 중단되듯 너무 구어화된 글은 통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플로베르가 목소리 높여 초고를 읽을 때,
그것은 말로 글을 다듬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발음이 거북한 모든 문체를 다듬고자 하는 것이었다.
플로베르의 산문보다 말과 동떨어진 산문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의 목소리는 그의 편지 속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의 편지를 소설 작품보다 우위에 두기도 한다.
텍스트로 전해오는 훌륭한 설교자의 설교는 매우 흥미있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진정한 웅변술이 문제를 야기시키듯 이런 설교는 어떤 측면에서는 즉석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런 설교가 사후에 어떤 식으로 냉철하게 명상록으로 쓰여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보쉬에에게서 제기된다. (p115)
인용 - 인간의 말은 동물의 무언(無言)과 신의 침묵의 중간에 속한다. - 루이 라벨르 -
※ 이 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의 일부를 필사한 것임.
(단행본) 미셸 투르니에 -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
역자 - 이용주
한뜻 - 1995.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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