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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성장교육(인문.철학.교양.

이어령-읽고 싶은 이어령/시작과 끝이 있는 삶.

by 탄천사랑 2022. 2. 21.

이어령 - 「읽고 싶은 이어령」

 

 

마지막 달력장이 퇴색한 벽 위에서 낙엽 지고 있다.

한 해가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끝이라는 말 속에는 이상한 서글픔이 잠겨 있다.

 

하루해가 지는 낙조가 그렇고 한 계절이 끝나가는 변절기가 그렇다.
시간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영화가 끝나는 영사막 위에는 공허의 앤드 마크가 찍힌다.
웃음도 눈물도 다 끝나버린 것이다.
찢어버린 좌석표처럼 이제는 모두 구겨져버린 흥분이 빈 복도에 뒹글고 있다.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우리는 이 같은 빈 의자의 적막을 발견할 수가 있다.

 

망년 회장이 아니라도 좋다.
사람들이 모여 술잔을 비우며 웃고 노래하는 밤 주막에도 그러한 적막은 찾아올 것이다.
말이 질주하던 경마장에도, 홈련과 함께 터져 나오던 환호성의 야구장에도,
삼각 깃발이 나부끼는 어린이놀이터에도, 사람들이 흩어지는 종말의 시각과 빈터는 있을 것이다.


시작과 종말의 의미.

모든 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듯이, 모든 시간의 끝에는 죽음의 종말이 있는 것이다.
하루의 끝이든,
계절의 끝이든,
그리고 한 해의 끝이든,  그것들은 모였다 흩어지는 우리들의 작은 죽음들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읽은 기억이 있는 후기 구조주의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흔히 시작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끝을 그 결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끝'은 언제나 시작하는 그 순간 속에 있다는 주장이다.

 

대수로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지만 되씹어볼수록 많은 의미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원래 '시작'이라는 말은 '끝'이라는 의미를 전재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끝이 없다면 시작이란 말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라도 끝이라는 생각 없이 시작이란 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한 해의 이 종말 감은 바로 1년 전 새해 아침에 있었던 것이다.
떡국을 먹는 순간과 망년회에서 기울이는 술잔은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보면 삶과 죽음도 역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흔히들 죽음을 생의 끝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생과 동시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옛날 이집트의 귀족들은 무슨 잔치가 벌어질 때마다 그 술자리에 관을 갖다 놓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즉 식사가 끝나고 주연으로 들어가게 되면

한 남자가 나무로 인간의 시체를 만든 모형을 관에 넣고 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실물의 크기이기 때문에 누가 봐도 진짜 시체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관을 든 사람은 회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체를 보이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시면서 마음껏 술을 들고 즐기십시요.
  당신도 죽으면 이러한 모습이 되어버릴 테니까!"

 

살아 있는 즐거움,

그 결정의 즐거움에 이르기 위해서 이집트인들은 죽음의 영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죽음을 삶의 현장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생의 강렬한 불꽃을 타오르게 한 것이다.

 

여러분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따금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우리의 유흥가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퇴폐적인 노래라고 생각한다.
젊어서 힘껏 일해도 시원찮을 나이에 놀라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을 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실증 주의자들이 많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집트인이 '관'을 갖다 놓고 술을 마신 것처럼 

이 노래 역시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효과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현대인은 '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세상은 메말라지고 그 죄악은 더욱 어둠을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종말 감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
죽음 속에서 시직 하는 사람,

죽음 속에서 삶을 느끼는 사람만이 생의 완전함을 지닐 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말 속에 시작이 있는 우주의 리듬.

... 바다의 조수와 하늘의 별자리에 이르기까지 이 순환의 법칙과 질서가 이르지 않는 곳은 없다.
그리스의 한 철인이 우주의 실체를 '리듬'이라고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최초의 잠을 이루었던 때도 바로 그 리듬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아이를 잠재울 때, 토닥거리며 두드려주는 어머니의 손, 그리고 요람의 흔들림---
그것이야말로 리듬의 언어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 이해했던 그 리듬은 본능의 언어로써 속삭였던 것이다.

 

왜 나뭇잎이 지는가를,
어째서 그렇게 빛나던 햇살은 쉬 어둠이 되고

들판을 욕망으로 부풀게 하던 소나기는 금세 눈보라로 바뀌는가를...,

 

밝음은 어둠을 필요로 하고 더위는 추위와 등을 대고 모든 움직임은 정지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대현상,
거기에서만이 리듬은 생겨난다는 원리를 당신은 최초의 그 잠 속에서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있어 그 최초의 잠은 바로 생을 읽는 최초의 독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문명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당신은, 

종말 속에 시작이 있는 우주의 리듬을 점차 망각해가고 있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것을 배웠지만,

당신은 기계의 공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는 단지 반복을 할 뿐이다.
생명적인 순환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곤충의 변신과 경이에 찬 그 계절의 변모 같은 것을 기계의 세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만약에 어떤 기계가 변신을 하려고 고치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래서 정지하게 된다면, 그것은 단지 고장 난 기계가 될 뿐이다.


한 해가 기울고 있다.
인류가 태어나던 날부터 믿어왔던 종말 속의 시각을 온몸으로 체험해 보라.
끝도 시작도 없는 반복의 그 나날들에 황금의 종지부, 과일 속의 씨와도 같은 정적을 찍어놓으라.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이파리들을 그 낙엽 속에 찍어두기를...., (p110)

※ 이 글은 <읽고 싶은 이어령>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이어령 - 읽고 싶은 이어령
여백 - 2014.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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