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위하여」
"무엇 때문에 사느냐?"라고 물으면 정신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왜 살기는 왜 살아? 사니까 사는 거지!"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서울역을 물으면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물으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어떤 질문이 중요합니까? - 김수환 추기경 -
지나가는 사람이 형제로 보일때.
옛날에 어떤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 성자가 한 번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밤의 어두움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 온 것을 그대들은 어떻게 아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 중의 하나가
"동창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
새 날이 온 것을 알 수 있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스승은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제자가 말하기를
"창문을 열어 보고 사물이 그 형체를 드러내어 나무도 꽃도 보이기 시작하면,
새날이 밝아온 것을 알 수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스승은 역시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제자들이 나름대로 말했지만,
스승은 듣고 나서 모두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자들 편에서
"그럼 스승께서는 밤이 가고 새날이 밝아온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눈을 뜨고 밖을 내다 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형제로 보이면,
그 때 비로소 새 날이 밝아 온 것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열려서
모든 사람이 그냥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고 형제로 보여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에,
우리의 마음에 비로소 새 날이 밝아온다는 뜻입니다.
이는 바로 내 마음이 변하고,
내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한 새 마음이 되어,
남을 형제와 같이 사랑할 줄 알고,
남의 고통과 아픔을 나의 형제의 고통과 아픔처럼 느낄 만큼 공감하게 될 때에,
새 날은 비로소 밝아온다는 것입니다.
왜 이토록 사랑하기 힘든가.
우리는 참으로 사랑할 줄 압니까?
누군가가 성서(1고린 13장 4/7)에 나오는 사도 바오르의 '사랑의 찬가'.
즉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시기하지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에서 '사랑' 대신 '나'를 대치시켜 보아라.
그리고 반성해 보아라.
그러면 네가 참으로 사랑을 지닌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오래 참습니다.
나는 친절합니다.
나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례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
나는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이 반성에서,
이 채점에서 "나는 합격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선 나부터 낙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알 수는 없지만,
많은 분들도 아마 "나도 낙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지만,
어쩌면 완전 합격자는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대로,
우리 중에서 '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죄란 결국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을 거스리고 사랑을 깨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말은 하기도 쉽고 실제로 많이 쓰는데,
참으로 사랑하기가 왜 이렇듯 힘이 듭니까?
누구도 사랑이 제일 좋은 줄 알고,
사랑이 있으면 우리의 모든 문제, 가정의 문제, 사회의 문제, 교회의 문제,
온 세계의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알면서도 자비심을 가지지 못합니다.
남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믿고 사랑하면 다 해결되는데 왜 이것이 안됩니까?
많은 분들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치유의 은혜를 입으면,
이를 보고 놀라고 '큰 기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서면 이를 보고 놀라고 '큰 기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큰 기적'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찬미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누군가가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을 바꾸어 사랑할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더 큰 기적이요 가장 큰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죽은 생명의 부활'과 같은 큰 기적입니다.
우리는 물욕을 떠나 청빈의 마음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힘들지만 가능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 가난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헌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까지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듭니다.
수도자나 성직자에게서 보듯이 청빈(淸貧), 정결(淨潔), 순명(順命)은 거의 완벽합니다.
그런데 형제와 같이 함께 사랑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 같은데,
사람은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도 봅니다.
모순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대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미워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압니다.
앞서 이야기한 사도 바오르의 '사랑의 찬가'에 비추어 낙제라면 낙제인 것이 분명한데,
이 사랑이 결핍된 마음을 누가 바꿀 수 있습니까?
바로 나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용서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맺힌 것을 풀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용서가 포함됩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稅吏)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을 빌어주라"
고 까지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이 용서를 할 수 있습니까?
가끔 우리는 '용서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여전히 미움과 원한의 뿌리가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마음에 맺힌 것을 완전히 풀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나에 대해서,
남이 보기에도 크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기는 오히려 쉽습니다.
그 사람이 워낙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반대로 대범해질 수 있습니다.
이 때에도
'용서한다!'면서 실은 상대를 무시하려는 오만과 앙심이 흔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섭섭하게 해 준 사람,
무시하는 사람,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듭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용서할 줄을 모릅니까?
왜 용서가 힘들고 마음에 맺힌 것을 풀기가 힘듭니까?
근본적인 이유는,
나 자신이 얼마나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주 갖는데,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별로 잘 못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를 많이 느끼는 사람이 남을 용서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용서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들.
우리가 남을 참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근본 이유는
먼저 우리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성령의 은사(恩賜) 중에 '눈물의 은사'가 있는데,
곧 내가 죄인임을 깊이 뉘우칠 줄 아는 통회의 정(情)에서 우러나는 눈물이요,
더 나아가 나의 모든 죄의 용서를,
진홍같이 붉은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데서 오는 감사의 눈물,
하느님이 나같이 비천한 존재도 사랑한다는 하해(河海) 같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체험한 데서 오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은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작가 오혜령 씨의 작품 <일어나 비추어라>를 보면,
오혜령 씨는 분명히 이 '눈물의 은사'를 깊이 체험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실 불치병인 암의 치료를 받은 것 이상으로 깊은 내적 치료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많은 분들이 이와 비슷하게 '눈물의 은사'를 체험하신 분들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나는 이렇게 깊이 운 사람의 마음은 정말 깨끗하고 맑은 마음이리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이는 물론 반드시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회개입니다.
마음으로 울고 깊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맺힌 것이 풀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자만이
참으로 남을 용서해 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
가난한 이,
온유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 안에 꼭 닫혀있지 않고,
자신들의 초라함을 하느님에게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헐벗음,
궁핍과 예속,
허약성,
그리고 질그릇처럼 부서지기 쉬운 생활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착한 일을 하고,
법보다는 자비심을 더 높이 평가하고,
남에 대하여 아무런 적개심을 품지 않으며,
오히려 남의 고통을 덜어 주고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자들이므로
참된 행복의 소유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행위는 부드러운 마음씨와 인정에서만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비심에 의존하여 있으며
그 자비심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남을 죄인으로 판단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판단 받지도 않으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음으로 오직 선으로만 갚음을 받게 됩니다 .
형제를 단죄하지 않음으로 단죄 받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용서를 거듭 체험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줍니다. (P25)
※ 상기 글은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위하여> 일부를 필사한 것임.
김수환 -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위하여
엮음 - 신치구
사람과사람 - 1994.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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