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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의 영적(靈的) 과부하(過負荷)

by 탄천사랑 2022. 3. 11.

 「 문화저널21 -  강인칼럼」

 

 

 

 

필자는 한때 법정(法頂) 스님을 가까이했던 시절이 있다.
실제로 만나 뵌 적은 없다. 
그러나 지난 1984년 그의 수상집(隨想集) 〈산방한담(山房閑談)〉을 증정받아 읽기 시작한 후 
글을 통해 늘 만나는 중에 종교적 신념보다는 인간적 느낌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심오한 설법(說法)보다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로부터 시작하여 

대중교화(敎化)를 펴나가는 언어가 마음에 와닿았다.

그러나 정작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필자와 취미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자고로 취미가 같은 사람과 쉽게 가까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스님의 저서 〈아름다운 마무리〉 119쪽에 보면 

“어느 날 아침 내 둘레를 돌아보고 새삼스레 느낀 일인데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차(茶)’와 ‘책’과 ‘음악’이 떠올랐다. 
  차와 책과 음악이 곁에 있어 내 삶에 생기를 북돋아 주고

  나를 녹슬지 않게 거들어 주고 있음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분의 취미는 ‘차를 마시는 것’과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인 듯하다. 
필자의 취미인 ‘커피’와 ‘책’과 ‘음악’을 생각하면 기호(嗜好) 면에서 그분과 오십 보, 백 보다. 
만일 마음을 넓혀서 속세에서 즐기는 ‘커피’를 ‘차’와 같은 과(科)로 인정해준다면 취미가 같아진다.
이어서 스님은 취미의 내용까지도 설명하고 있다.

”차를 우리되 아무 물로 우리지 않는다. 깊은 산속의 개울물을 길어다 우려 마신다.“
”책도 아무 책이나 읽지 않는다. 양서(良書)만 엄선해서 읽는다.“
“음악도 아무 음악이나 듣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필자도 십분 공감한다. 
그러나 그다음 이어지는 설명에 자못 신경이 쓰인다.
〈아름다운 마무리〉 134쪽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전에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를 즐겨 들었는데 

  요즘에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자주 듣는다.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로 들으면 감흥이 더욱 새롭다."

이 부분이 퍽 조심스럽다. 
즉, 바흐 음악에 능통한 거장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특히 이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을 통해 

젊은 나이로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른 글렌 굴드(Glenn Gould)의 연주는 
'성에 차지 않고' 안드라스 쉬프(Andras Schiff)의 연주는 '감흥이 더욱 새롭다'는 표현은 
자칫 많은 이에게 ‘굴드의 연주보다는 쉬프의 연주 수준이 상위(上位)’라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있어서 
글렌 굴드의 연주가 성에 차지 않아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로 들으면 감흥이 더욱 새롭다는 표현에서 
역시 스님의 남다른 청각(聽覺)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음악의 전문적 분야까지 언급한 것은 음악을 전공하고, 
다년간 방송에서 음악을 해설하고, 
(評)을 하며 지내온 필자로서는 일반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성직자로서 영적 통찰력이나 섭렵(涉獵)을 통한 남다른 탁월함은 인정하나, 
앞서 세 가지 취미 중 음악의 전문분야만큼은 

속세(俗世)에 양보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더더욱 존경스러웠을 텐데, 
살아있는 동안 이미 성불(成佛)하신 모습을 보는 듯하여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그러나 
'삶에 무슨 정답이 있겠느냐?'라고 한 그의 설도(說道)와 같이 
음악을 통한 감흥이란 주관적이라는 점에서 애써 이해하려 한다.

필자가 과거 미국 유학 시절 

L.A. 토랜스시(市)에 소재한 어느 교회에 성가대 지휘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주일 낮 예배 후 성가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지휘자, 반주자, 오케스트라 연습 지휘자, 임원 및 각 파트장이 참석하였다.
회의를 주재하는 성가대장(장로)이다.

”우리 성가대는 오는 추수감사절에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연주하려 합니다. 
  이는 이미 담임목사님께서 분부하신 내용이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라고 하신 구약성경 사무엘상(上) 15장 22절의 말씀대로

   모두 순종하는 마음으로 맡은 일을 잘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참석자들은 모두 ‘아멘’하며 박수로 호응하였다. 
이는 회의라기보다는 성가대장을 통해 담임 목사의 공개 명령을 통보하는 모임이었다.

성가대 지휘자는 예배의 찬양을 위한 직분을 맡은 사역자이고 
담임목사는 설교와 목양(牧羊) 그리고 전도 등의 직분을 맡은 목회자이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연주의 레파토리는 지휘자가 결정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담임목사의 요청이 있을 때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이에 따르는 것 또한 순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견을 제기하였다. 
〈메시아〉를 추수감사절에 연주하는 것은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헨델(G. F. Händel)’이 작곡한 불후의 명곡이다. 
서곡과 3부 53곡으로 구성된 이 곡은 
제1부 「그리스도의 강탄(降誕)」, 제2부 「수난과 속죄」, 제3부 「그리스도의 부활」로 되어 있다. 
작곡자 본인이 
"이곡은 부활절을 위해 작곡했다"고 말한 바와 같이 
주로 부활절에 연주되어왔는데 근래에는 성탄절에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이렇듯 내용상 〈메시아〉를 추수감사절에 연주하는 것은 절기로 보아 무리가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연주회는 다음 해 부활절에 하는 것으로 연기되었다. 
그 후 필자는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다.

『과부하(過負荷, Overload)』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기기(器機)나 장치가 다룰 수 있는 정상치를 넘는 부하“를 말한다. 
  즉, 전력시설에 과부하가 걸리면 신호처리 회로의 신호는 왜곡(歪曲)이 생기며 
  전력처리 회로는 구성부품의 과열로 전기가 끊기거나 화재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과부하’도 있다. 
이는 절대 금물(禁物)이다. 

필자의 아내에게는 좋지 않은 습관이 한 가지 있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함께하는 것이다. 
예컨대 TV를 켜놓고 책을 본다든지, 뜨개질을 한다든지 하는 등의 행동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한 가지 일에 열중해도 완전(完全)을 이루기가 쉽지 않은데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며 어찌 원하는 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아내는 우스갯말로 '나는 천재니까...' 라며, 시간이 아까워서 그런다지만,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것 같지는 않다.

인간에게 부여된 주특기(主特技)는 한가지다, 
각자가 이를 통해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사회 전체의 소통이 원활해지는 것인데 
이에 지나쳐 만능을 소유한 듯 자신을 과시(誇示)하는 행동이 결국 과부하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는 겸손과도 상통한다.

그런데 일반인을 넘어 《성직자의 영적 과부하》는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왜냐면 종교는 맹신(盲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서 필자의 경험적 예시(例示)에 등장한 두 성직자의 언행은 모두 과만(過慢)에서 비롯된 자기과시이다. 
이것이 음악적 지식의 과시든, 영력(靈力)의 과시든, 
결국 성직자의 과만은 

영적 과부하를 발생케 하여 이를 맹신하는 신자들을 통해 오류(誤謬)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조물주 외에 모든 존재(存在)는 피조물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름받을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될 수는 없다. 
혹 신(神)의 전적의지(全的意志)에 의해 초인간적인 능력을 부여받아 행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방편 일 뿐이다.

방편(方便, 기독교/구원의 방편, 불교/중생 구제를 위한 10가지 덕목<십바라밀> 중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일부 인간 성직자들 중에는 
머리털 밀고 장삼(長衫) 걸쳤다고 부처가 된 듯 행세하는 사이비 승려들이 있는가 하면, 
성직을 받을 때 안수(按手)받은 것을 마치 신 내림이라도 받은 듯 
전지전능(?)함을 과시하는 목사들의 영적 과부하가 만연하고 있다.

얼마 전 대선(大選)을 앞두고 무속(巫俗) 논란이 정치 쟁점화로 떠올랐었다. 
한 후보의 손바닥에 적힌 왕(王)자나,  모 법사(法師)를 만나 정치적 조언을 들었다는 소문, 
또한 한편에서는 소의 가죽을 벗긴 제물을 올려놓고 굿판을 벌였느니 하는 
의혹을 둘러싸고 설왕설래(說往說來)하는 모습이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그 후보의 부인이 지난 2월 14일 우리나라 보수 개신교계를 대표하는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를 찾아가 3시간에 걸친 대화를 통해 조언을 들었고, 
이어서 17일 봉은사 주지승인 원명 스님을 찾아가 1시간여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위 두 성직자와의 만남에 관한 보도내용을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대선이 임박한 민감한 시기에 특정 후보의 정치적 행로에 대한 조언은 분명 ‘성직자의 영적 과부하’이다. 
이는 자칫 국민들에게 역술인들의 무속 행위와 유사(類似)하게 인식될 수 있는 우려를 낳게 한다.

오늘은 이 나라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 날이다.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인 성직자들은 속세와 영합하는 영적 과부하를 차단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성직자로서 맡겨진 본분에 정진하는 것이 새 대통령, 새 정부를 돕는 길이라 여겨진다.

앞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나아갈 정치 대열에 
이렇듯 성직자들을 통한 조용한 종교혁명이 함께 펼쳐지기를 신앙인의 한사람으로서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글 - 강 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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