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山의학 - Vol. 299」
지난 11월 17일은 배우 이순재가 88세를 맞는 날이었다.
미수(米壽)를 기념하는 축전(祝展)속에서 은퇴에 대해 생각을 했지만
그날 저녁에도 3시간 20분에 달하는 연극 <리어왕>의 러닝을 소화해 내며 대배우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날 사극 녹화를 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날에도 무대에 섰으니 여든여덟 생일날의 분장 또한 자연스런 다반사(茶飯事)임에 분명하다.
마침내 리어왕이 되다. 글 / 빅돈규(조선일보 기자) 사진 / 이태경 취재협조 / 파크 컴퍼니, 예술의 전당.
진실을 볼 줄 아는 나이 88세
이순재는 무대에 설 때마다 기록을 갈아치우는 배우다.
1934년생이지만 여전히 짱짱한 현역, 그가 연극 <리어왕>으로 2021년을 마무리하고 있다.
영국 배우 이언 매켈런(81)이 '형님'이라 불러야 할 국내 최고령 리어의 등장이다.
이순재는
"말년에 하려고 마뤄든 작품을 마침내 올린다"며
"문학적인 원전을 압축하거나 비틀지 않고 3시간 20분 길이의 정통극으로 완성해 내고 있다"고 얘기한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 King Lear>은 늙은 왕 리어가 세 딸의 애정을 시험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리어왕은 영토를 떼어주고 은퇴할 참이다.
그런데 두 언니의 애정 공세와 달리 막내 코딜리어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한다.
리어왕은 그 참뜻을 읽지 못한다.
비극의 시작이다.
거죽만 보면 상속을 잘못해 벌어지는 이야기 갔지만, 관객은 '진실을 보는 눈이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 앞에 선다.
진실에 눈이 먼 리어는 결국 두 딸에게 배신당해 황야로 내몰리고 점점 미쳐간다.
허허벌판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비로소 직관을 얻은 것이다.
이순재는
"크고 작은 폭풍을 견더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다고 리어왕이 후회하는 대목이 있다."며
"셰익스피어가 상류층을 향해 던진 메시지였는데 이 시대에도 어떤 펀치를 날릴 것"이라고 했다.
<리어왕>은 개막 전에 객석 3층 뒷자리까지 다 팔렸다.
전 회차 매진이라는 사건의 중심에는 이 노배우가 있다.
CJ토월극장 분장실에서 만난 이순재는
"연극 포스타에 '이순재의 리어왕'이라고 적혀 있다"며
"관객이 성원해 주시는 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다"고 했다.
"남자 배우라면 젊을 때는 햄릿, 중년에는 맥베스, 말년에는 리어왕을 꿈꾼다.
나는 햄릿도 맥베스도 놓쳤고 마침내 죽기 전에 리어왕을 연기한다.
이 연극 망하면 내 책임이다.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손님이 많으니 신바람이 난다.
그동안 이순재 연극은 <세일즈맨의 죽음>이었지만 앞으로는 <리어왕>이 될 것이다.
쓰러져도 좋다는 각오로 무대에 오른다."
리더란 무엇인가.
리어왕은 큰딸과 둘째 딸의 아첨에 속고 막내딸의 진심은 몰라본다.
진짜와 가짜,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지 못한 그는 결국 배신당해 황아로 내몰리고 미쳐간다.
"모든 것을 잃고 밑바닥에 추락한 다음에야 진실에 눈을 뜨고 세상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라며 노배우가 말을 이었다.
"높은 궁궐에서 내려다보지 말라는 뜻이다.
통치자는 여민동락(與民同樂), 즉 국민과 눈높이를 맞출 줄 알아야 한다.
리어왕은 쫓겨난 다음에야 '그동안 내가 백성을, 가난한 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구나' 참회한다."
이순재는
"리더란 무엇인가 묻는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시대를 초월한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정치를 권력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대통령도 국민이 위임해 준 자리다.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덧붙었다.
이순재는 1992년 총선에서 당선돼 국회위원(서울 중랑갑)을 한 번 했다.
안에서 본 정치는 어땠을까.
"낙선부터 당선까지 총 8년 동안 꽃의 아름다움과 하늘의 푸름을 못 느꼈다.
국회의원을 제대로 하려면 나와 가족의 행복은 포기해야 한다.
주민들과 동고동락해야 신뢰가 쌓인다.
나는 당시 환갑이 돼 '이제 내 자리(배우)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통령 후보들에게 바란다.
기네스북에 등재 신청을 한다면 '세계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록될 것이다.
영국 배우 글렌다 잭슨이 83세이던 2019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리어왕을 연기한 적이 있다.
이순재는
"가만, 간달프는 안 했나?" 반문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등장인물 간달프로 기억되는 배우 이언 매켈런(81)은 그보다 '새파랗게 젊은' 79세에 리어왕을 맡았다.
이순재는
"겪어보니 연륜 못지않게 힘이 필요한 배역이라 60대 후반에 할 걸 그랬다"며 웃었다.
바야흐로 대선(大選)의 계절.
리어왕이 대통령 후보들애개 바라는 점은 뭘까.
"다들 애국심을 가지고 나왔다고 말하지만 뽑아놓고 보면 그 애국심이 발휘가 안 되더라.
내 당부는 세가지다.
우선 국민 통합이 중요하다.
나를 반대한 사람도 국민이다.
둘째, 과거로 후퇴하지 말고 앞으로 가라.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라.
마지막으로 청렴해야 한다.
대통령은 돈 먹는 자리가 아니다.
국민의 엄중한 명령을 받들어 국가를 잘 보호하고 형편이 나아지게 해야 한다."
이순재는
"늙을수록 칭찬을 좋아하는데 리어왕도 그러다 속아 넘어갔다."며
"정치도 매한가지다.
칭찬이나 아첨에 휩쓸리지 말고
아프지만 정직한 충고를 새겨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배우의 길.
1934년 함경북도 회령 출생. 이순재는 서울대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지난 65년간 드라마, 영화, 연극 등 300여 편을 종횡무진했다.
그는
"존경하는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 말마따나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연극은 배우의 예술" 이라며
"연극은 내가 표현하기 나름이라 마음가짐부터 다르다"고 말했다.
이순재는 홀로 리어왕 역을 맡아
31회 공연을 모두 책임지며 한편으론 기억력 쇠퇴를 방어하는 중이다.
그는
"연기력은 배우의 필수 조건이고 그걸 못 하면 내려외야 한다."며 비방을 들려줬다.
"암기 훈련을 자주 한다.
기억력 감퇴를 막을 수는 없지만 늦출 수는 있다.
미국 대통령 이름을 1대 조지 워싱턴부터 46대 조 바이든까지 암송하곤 한다."
<리어왕>에는
"우린 울면서 세상에 태어났지.
바보들만 득실거리는 이 거대한 무대에 떠밀려 나온 게 슬퍼서 울지"라는 명대사가 있다.
리어왕은 모든 것을 소유한 절대 권력자에서 한순간에 전부를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넷플릭스 흥행작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해진 배우 오영수(77)에 대해선
"화려하진 않아도 늘 자기 몫을 해온 후배인데 그런 노력과 행운의 합작품이다.
기분이 좋다."고 했다.
리어왕처럼 은퇴를 궁리하고 있진 않을까.
그는
"배우로서 퇴장? 생각해 본 적이 없다.
1남 1녀를 뒀는데 사위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손자 손녀를 내가 교육시켜야 한다."며 웃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배우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인기 스타의 길과 액팅 스타의 길,
껍질을 벗어야 나비가 되는데 애벌레 때부터 인기와 돈을 얻는다.
후배들이 거기 안주하지 않기를 바란다.
젊은 배우들을 보면 양아치나 깡패 연기는 천재적으로 잘 하는데 지적 표현은 안 된다.
연기력을 다듬고 힘이 축적되기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껍질을 벗고 날아오를 수 있다."
거울을 들어다보며 노배우가 말했다.
그 안에 리어왕이 있었다. (p07)
※ 이 글은 <仁山의학>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仁山의학 - 2021. 12. Vol.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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