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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 - 신문 기자에서 대학교수로 변신한 아내

by 탄천사랑 2021. 12. 25.

인문ㆍ사회 안병훈 - 「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

 

 

결혼은 신세계다.  내게도 그랬고 아내도 그랬을 것이다.
아내는 결혼후 경향신문도 그만두었다.
아내는 아들 승환(承煥)과 딸 혜리(惠利)를 낳고, 뒤늦게 교원 자격증을 땄다.
전업주부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당시에는 여자가 결혼 후에도 자유롭게 재직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았다.
교직은 그 중 하나였다.

 

아내는성산여고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모교인 서울대 대학원으로 돌아가 불문학 공부를 계속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상명대학 교수가 되어 20여 년 재직하며 사법대학장 등을 지냈다.
최근에는 동아일보에 격주로「박정자의 생각 돋보기」라는 칼럼을 2년 넘게 쓴데 이어
지금은 객원 논설위원에 위촉되어 3주에 1회씩 칼럼을 쓰고 있다.
이 기간동안 딸 혜리는 중앙일보 「분수대」란에 매주 1회씩 글을 올리고 있다.

 

아내와의 대화는 늘 새로운 자극을 주고 영감을 고취시킨다.
2013년 조선일보 전직 사우들의 모임인 조우회 인보길 회장의 강청에 따라
조우회보(朝友會報) 지상(紙上)에서 아내와 어색한(?) 대담(對談)을 나눈 적이 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부부의 신혼 시절을 추억하는 대목이 있어 여기에 옮겨본다.

 

박정자 - 우리에게도 20대가 있었어요. 우리는 신문사 동료였고, 가난했었죠.
6. 25 전쟁 이후 가세가 몰락한, 비슷한 가족사에 대한 공감으로 우리는 만나,
결혼하고 가난하게 살림을 시작했어요.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고, 그때는 여자가 결혼하면 퇴직해야 했어요.
당신은 신문기자인데도 집에 전화가 없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던가, 기사를 낙종한 적이 있었어요.
전화 한 대 값이 집 한 채 값에 맞먹는 때었지요. (....)

 

그때 우리는 TV도 없었어요.
남대문시장과 신세계백화점 중간에 , 지금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백화점이 하나 있었어요.
어느 날 그 백화점 4층에서 홀 전체로 노래가 울려 퍼졌는데,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였습니다.
그 강렬한 애잔함에 눈물이 울컥 솟았어요.
그 때 한창 인기를 끌던 히트곡이었는데, 집에 TV가 없던 나는 그 노래를 처음으로 들었거든요.

 

안병훈 - 정말 가난했었지.
그래도 우리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든가, 위로가 필요하다든가,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필요하다든가 그런 건 아예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어.
모두들 가난하고 힘들고 일자리도 없었지만 사회 전체 분위기는 언젠가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차 있었어.
(2013년 가을호 조우회보)

 

결혼하던 해, 인류가 달에 발을 디뎠다.
결혼한 후 채 3개월이 지나지 않았던 때라고 기억한다.
인류의 달 착륙 영상을 보며 나는 보도 매체로서의 신문에 대한 무력감을 절감했다.

 

조선일보는 1969년 7월 21일 호외를 발행하며 관련 사진을 실었지만
영상매체가 지닌 신속성과 파급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백번을 읽어도 한번 보는 것을 이길 수 없다.
신문이란 무엇인가.  이미 영상으로 다 본 것을 사진과 활자로 전달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이런 무력감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무력감은 곧 새로운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신문은 살아야 한다.
신문의 역할이 있다.
신속성과 파급력에선 영상매체와 경쟁이 안 되지만 신문은 뉴스의 가치를 매기고
각종 현상과 정세(情勢)를 분석하며 사회적, 국가적 아젠더(議題)를 설정하는 기능이 있다.

 

이것이 신문의 특화된 역활이다.
이런 역활은 특히 정보의 홍수 속에서 더욱 빛나는 기능을 한다.
고요의 바다를 뛰어다니는 우주인들을 보며 깨달은 내 생각은 그랬다.

1960년대가 저물어가던 무렵, 내겐 신문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리고 있었다. (p48)

 이 글은 <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

 

 

안병훈 - 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
기파랑 - 2017. 04.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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