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이충걸의 인터+뷰 - ILO 사무총장 도전 나선 강경화
지난해 10월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에 도전장을 냈다. 오는 3월 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에 당선될 경우, 한국인으로서는 물론이고 아시아·여성 첫 사무총장이 된다. 반면 국내 노동단체는 노동 비전문가라는 이유로 강 전 장관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국제노동계에 전달하기도 했다. 국내에선 첫 여성 외교부장관으로 3년8개월을 지냈다. 이전에는 유엔에서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부대표와 유엔 사무총장 특별보좌관을 거친 인권전문가였던 그는 국제노동 분야에서 어떤 구실을 하려는 걸까? ‘이충걸의 인터+뷰’에서 강 전 장관을 만났다. <편집자주>
인터뷰 전날, 그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반세기 이상 우정을 나눈 친구들과 와인을 마셨다고 했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더니 조금 피로가 풀린 것 같으면서 더 피곤한 것도 같다는 말이 소량의 위트를 주었다. 겨우 와인 한두잔의 회포란, 도망갈 곳도 숨쉴 시간도 없이 빽빽한 중력에 매달린 시간을 말해주는 건지도 몰랐다.
“와인 좋아합니다.
제네바에서 6년 살았는데, 거기는 일상적으로 물 마시듯 마시니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아닌데, 요새는 나이가 들다 보니까 양이 한두잔 정도로 줄었어요.”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대 국제교육관 1008호. 비스듬한 빛살이 비쳐 책상을 거울의 사각 테두리처럼 만들었다. 그 뒤로 남색 슈트와 스탠드칼라의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는 자기 목적을 찾은 것 같았다. 그가 있는 지점에 대한 날카로운 집중을 드러내면서.
2017년 6월, 그가 이 정부의 외교부 장관으로 등장했을 땐 거의 급작스러운 문학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뒤따를 모형도 없이 남성 본위의 어두컴컴한 계단을 오른 방식, 개인의 영역과 젠더 사이의 방정식, 본 적이 없던 글로벌 매너.
2021년 2월, 3년8개월간의 외교부 장관 재임 기간 만료 후 그는 다른 행로를 밟았다. 자기 충족감으로 용해되는 대신 국제노동기구(ILO)의 차기 사무총장 선거에 입후보했다는 기별은 즐거운 호기심을 주었다. 그의 퍼레이드는 어디로 향할까, 사이렌 소리는 어디까지 증폭될까. 결론은, 개인의 능력은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는 거였지만.
“노동권 확대, 그러나 아직 멀었죠”
노동이 포괄하는 범위가 국내 문제에서부터 국가 간의 지형도 전반을 아우르는 지금, 그는 역사가 탄탄한 국제기구에 폭풍을 일으킬 만한 영향력을 장착했을까? 대립적인 세계의 다수성 틈새로 어젠다를 지배할 수 있을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제노동기구를 어떻게 구상하고 있을까? 그의 답변은 유엔에서의 레퍼런스를 포함하고 있었다.
"인권과 노동권은 기반이 같아요.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정의의 철학적 기반은 현안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저로서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어요.
제네바에서 인권 업무를 할 때 국제노동기구와 여러 현안으로 협의를 했었거든요.
그 자리와 제 능력이 맞는가 따져봤을 때, 국제노동기구가 요구하는 리더십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고용노동부와 외교부와 청와대와 논의를 거쳐 후보로 나간 거고요.
무엇보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후보로 나섰다는 데 엄중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국내 일각에선 그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노동 관련 경험이 미흡한 비전문가라는 것이 반발의 핵심이다. 민주노총은 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은 중재자가 아니라 노동전문가여야 한다며, 강 전 장관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국제노동계에 전달하기도 했다.
“제가 노동 현장에 경험이 있거나 노사 관리의 활동을 못 한 거는 분명히 맞는 사실이죠.
그러나 회사를 운영하고 결국 손익을 따져야 되는 기관하고는 다르지만,
저도 외교부라는 큰 조직의 톱 관리자로서 직원들의 관리라든가,
해외 행정직원들의 노조 설립에 직접 관여를 했고,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측면에도 충분히 경험을 가졌다고 봅니다.
한국노총 지도부는 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발표해주셨고 국제노동기구에도 그렇게 뜻을 전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12월15일 민주노총 본부를 찾아갔을 때는 위원장과 간부들하고 굉장히 좋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노동 현장의 경험을 전제로 출마해야 되는데 그게 없기 때문에 지지를 할 수 없다, 하는 기존 입장을 면담 뒤에 내놓으 셨지만,
저는 굉장히 유익하고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노동 분야에 오랜 기간 종사한 분들에 비하면 채워나가야 할 부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노동단체, 경영자단체며 현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제 역할과 관련해 폭넓은 조언을 구할 생각입니다.”
포부는 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저는 유엔 체제에서 갖고 있던 경험과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충분히 활용해서 국제노동기구를 그 중심에 갖다 놓고 싶습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부대표로 재직하면서 가사노동자 협약,
여성노동권, 이주노동자 보호 등 이슈에 대해 국제노동기구와 많은 협업을 했습니다.
따라서 누구도 뒤처지지 않는 산업과 노동의 공정한 전환이 이뤄지도록 노사정 대화를 적극적으로 촉진할 생각입니다.
더 긴 호흡으로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 같은 임금노동자 이외 형태의 노동자를 보호할 사회안전망이나,
이들이 이익을 공유할 방안도 마련할 생각입니다.”
그것은 경험 과학일 것이다. 국제기구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것은 모든 국가의 목표니까. 이사국들이 표를 행사할 때는 또 다른 계산이 있겠지만, 국제노동기구 출범 이후 미국과 유럽의 백인 남성이 독식했던 사무총장의 역사 속에서 그가 후보 다섯명 가운데 유일한 아시아인이며 여성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핑크빛 수정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답이 정해진 질문이며 후렴구가 분명한 진군가라서.
위험천만한 변혁 기간에 노동의 숭고함이란 인류의 핵심과 재연결되는 가치이자 현재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묘사일 것이다. 그는 숨이 턱에 닿도록 국내외 노동 현안을 살피고, 노동단체며 경영자단체를 찾아 입장을 들었다. 작년 11월 제네바 국제노동기구 이사회에서 지지를 호소할 땐 주요국 대표로부터 ‘두렵기까지 한 후보’라는 소리도 들었다. 결국 3월25일 선거까지 남은 기간은 대화의 중재자이자 촉진자로서의 그를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서의 존엄성을 추구했던 1944년의 국제노동기구 헌장 이후 세계는 어디쯤 와 있을까?
사고(思考)의 중심에 노동이라는 영양은 얼마나 공급되었을까? 그는 필라델피아 선언이 있던 날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필라델피아 선언의 기본 철학은 분명하죠.
생산 과정에 있어 사람은 재료가 아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죠.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에는 제도권에 잡히지 않는 비공식 일이 60, 70퍼센트나 됩니다.”
어떤 계급은 주변에 강렬하게 존재하지만 특정한 형태를 띠지 않는다. 한국의 노동 환경 또한 국제노동기구에 자랑할 입장이 아니다. 고등학생이 실습 나가 목숨을 잃거나 청년들이 산업재해로 희생되는 일도 너무 잦으니까.
“우리가 선진이라고 얘기하기에는 거리가 멀죠.
사고와 질병을 얻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도 이제 시행 들어가는데 준비가 만만치 않고요.
저는 주 52시간제 안착을 통해 노동자의 일과 생활의 균형을 보장하고 기업 생산성도 제고한다는 방향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노동 문제의 교훈은 다른 나라의 백과사전 같아요.”
남수단에서 만난 인간의 존엄
그는 인터뷰 내내 펜을 들고 필기를 했다. 무엇을 적는 걸까? ‘최초의 여성’ 레이블로 수식되는 이의 습관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파악하던 행정 경험의 열매일까? 한편, 코로나의 본질을 둘러싼 불확실성 속에서 글로벌 보건 위기에 대응한 정부의 방법을 설명한 2020년의 <비비시>(BBC) 인터뷰는, 진짜 토론 실력은 어려운 주제일 때 드러나고, 품위는 연습으로 갖추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영국인들은 논리의 명료함과 팩트의 간결성 외에 그의 스탠더드 영어에 매료되었다. 그가 영국 수상이 됐음 좋겠다는 코멘트는 단순한 투정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사이 ‘제5의 코로나’는 한층 기세등등 변이된 세상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지금 오미크론 때문에 다시 긴장하는 상황이지만 백신 접종률이 많이 높아졌죠.
결과적으론 추가 사망자 수가 마지막 성적표일 겁니다.
유럽에서는 전면 록다운으로 가는 나라도 있지 않습니까?
2020년에 다른 나라에서 화상회의를 하자, 도와달라, 그런 주문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우리 공항 방역 노하우를 전수해달라는 나라를 위해 줌 회의를 몇시간 한 적도 있고요.”
그의 커리어는 여성 르네상스 자체이다. 같은 시간대를 살았으면서도 같은 시간의 경계를 넘지 않은 사람처럼. 그리고 지리적 한계와 문화적 제한이 상관없는 이즘으로 청년들의 표지가 되었다.
“아뇨, 저도 차별 많이 당했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지만,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을 땐 당연히 학교에 자리 잡을 줄 알고 한국 왔는데,
제 모교에 가면 여성이라고 안 써주고, 여자 대학교에 가면 타교생을 쓸 바에야 남성을 쓰지 왜 여성을 쓰느냐,
이런 반응이었어요.”
뭔가, 대한제국 단발령 반대 구호가 100년 뒤에 들리는 기분은 무엇일까.
“성평등과 법 제도 면에서 힘든 세월 많이 겪었습니다.
외교부 장관으로 일할 때 되도록 중요한 자리에 여성들을 등용했습니다.
퇴임하는 날 계단에서 간부들과 사진 찍고 차 타고 나왔는데, 나중에 사진 보니 제 뒤에 다 남자였어요.”
한국 최초의 유엔 고위직 여성이라는 사실은 분명 그의 연대기를 특별하게 만든다. 그러나 유엔이 아무리 세계 평화의 수호신이라 해도 1945년 이후 계속 증식해온 관료 조직이라면 충돌이 없을 리 없다.
“문화 코드가 다르지만 다양성을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즐겁죠.
제가 유엔에 있을 때 제 보좌관은 몽골 여성, 주니어 보좌관은 프랑스 남자,
제 앞에 있는 스케줄 오피서는 멕시코 여성, 그 보조원은 모로코 여성.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읽는 것처럼 위험한 게 없어요.
상대는 아무 뜻 없이 얘기했는데 거기에 의미 부여를 해 내가 아시아인이라서 우습게 보나,
나를 무시해서 지시를 안 받나, 의심하기 시작하면 피해의식이 생기고,
피해의식이 불신을 낳으면 유엔에서 일하기 정말 힘듭니다.
조직 관리자로서 저의 기본 전제는 국제사회의 대의를 위해 모인 이들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당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그를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남수단 내전이 끝난 시기에, 특정 지역을 점령한 군부대 옆에 난민들이 살고 있었어요.
그 마을 가장 연장자 할머니께서 나무토막 같은 손으로 저에게 악수를 하시더니
'어서 오십시오, 댁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의를 갖춰 손님을 맞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사람의 존엄성은 불이 안 꺼지는 거구나.
그런 현장을 보고 뉴욕이나 제네바 본부에 돌아오면 괴리감이 있어요.
나는 이렇게 풍요롭고 안전한 데서 일하고 있구나,
감사를 넘어서 한동안 정신적으로 흔들려요.
똑같은 존엄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지금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유대감이라고 밖에는 저는 설명이 안 되네요.”
그의 표준 발음에는 관료들의 압제적인 투가 없었다. 어떤 정치인의 과시적인 천박함과 소화하기 힘든 편협함, 붉게 번들거리는 얼굴만 대하다가 이런 엄격한 우아함이란 차라리 생경했다. 고요해진 실내 공기에 침착한 객관성이 스며들 때 그 옷깃에 달린 사랑의 열매 배지가 문득 반짝거렸다.
천지에서 남북 손잡던 그날
유엔은 공동의 어젠다를 만들고 새 규범을 만드는 기구지만 언제부턴가 낡은 영광에 집착하는데다 다자주의의 위기가 팽배한데 고위 관료들이 모여 한가한 소리나 하는 듯 보였다.
“다자주의를 이끌던 미국의 힘이 빠지면서 유엔 체제의 핵심 안보리(안전보장이사회)가 제대로 작동을 못 했어요.
테러리즘도 팬데믹도 그렇고, 챌린지는 계속 늘고 있는데 시스템 자체가 거듭나지 못했죠.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다음 팬데믹에 어떻게 대비할지 논의가 많아요.
다만 백신 관련해서 굉장히 아쉬운 건, 일찌감치 코백스(백신 공급 국제프로젝트)를 만들었고,
언젠가 백신이 개발되면 전세계가 공평하게 나누자는 목표가 있었는데 흐지부지돼버렸어요.
지금 백신 분배가 제일 큰 현안인데, 시간이 걸려도 꼭 달성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세계사의 페이지 안, 그것도 서로 먹고 먹히는 격랑의 중심부에 있었다. 무엇보다 세차례 남북 정상회담과 남·북·미 정상의 회동에선 한국 정부의 공식 수행원인 채 몸소 창과 방패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비핵화와 평화 정착, 두 축이 운반하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골몰해도 종전선언은 들릴 듯 말 듯 여전히 가물가물한데 그 모든 분투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를 도출 못 하면서 그 이후 계속 교착 상태지만,
지금과 2017년 중반을 비교하면 훨씬 안정된 상황이죠.
지금까지 지켜지는 ‘남북 군사합의서’로 인해 휴전선 근처 긴장은 확실하게 관리되고 있잖아요.
그 합의가 없었고, 휴전선의 이런저런 사고로 긴장이 고조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을 겁니다.
비핵화 평화 정착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나아갈 부분이 많지만
분단의 안정적 관리라는 면으로는 큰 평가가 있어야 될 걸로 봅니다.”
그 날들이 그의 언어 속으로 다시 흘러들어왔다.
길고 두터운 호흡으로 밀고 가던 세월에는 영원히 방부 처리된 찰나도 있었다.
“2018년 평양에서 3차 정상회담 마치고 백두산에 올랐는데 그날따라 기적처럼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에,
천지를 배경으로 양쪽 대표단이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서로 사진 찍어주고 농담도 하고 그랬어요.
가끔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정말 특별한 순간이었어요.”
그의 마음에는 모호함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삶의 오류들을 그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거나. 정말이지 궁금했다.
외교부 장관 임명장을 받은 첫날과 퇴임하는 날은 얼마나 닮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달랐을까.
“제가 외국 생활 오래 하다가 들어와 청문회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해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국내 상황에 감이 잘 없었어요.
그래서 직원들한테 늘 그랬어요.
눈치 없는 나를 큰 실수 안 하게 보좌해 줘서 고맙다.
언론을 대할 때마다, 국회 현안 질의를 할 때마다 직원들이 많이 도와줬죠.
질의응답을 잘 못해서, 또 제 개인사로 인해서 많은 비난도 받았고, 그건 직원들이 준비해줄 수 없는 거잖아요.
퇴임할 때 경륜이 쌓인 상황에서는 다르겠지만, 정부 각료로서의 초심은 크게 변한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 호기심 많죠”
그러나 세상이라는 광기의 인큐베이터 속에서 그 사람이라고 결핍이 없었을까?
“젊었을 때는 저의 외모나 성격에 대해 고민도 많이 했어요.
근데 지금 나이에는, 영어로 멜로 아웃(mellow out)이라 그러죠, 각진 부분이 둔화되었달까요.
젊었을 때의 무심함은 아버님을 닮은 것 같지만, 인도 지원, 구호 현장에는 호기심이 많습니다.
특히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어쩌면 아주 긴 질문에 대답하는 이 순간일까? 그리고 잠깐의 망설임.
“글쎄요,
저는 글쎄요… 아이들 어렸을 때 여름 휴가를 내서 같이 속초 해변에서 놀 때….”
처음 본 것 같은 멜랑콜리가 어른거렸다.
“가장 후회스러운 건…” 그는 말없이 상체를 숙였다.
“제가 일을 하느라 그랬는지, 무심해서 그랬는지,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같이 못 했던 것….”
그러니까 그는 고전적인 동시에 모던한 사람이었다.
가끔 무테 안경 위로 올려다볼 때 좁아지지 않는 미간 아래 다감한 눈초리. 그사이 나이는 새로운 여권이 되었다.
“나이가요,
한순간도 헛되게 지나가는 건 없어요.
나태하면 나태한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다 인생에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나이 드는 걸 한번도 두려워한 적이 없어요.”
올이 살아 있는 은색 머리에 모랫빛이 섞인 채 언제나 자기의 머리칼 그대로인 모습.
회색 머리카락은 덕망 있는 삶 안에서만 가질 수 있다던 속담은 어디에서 왔을까.
“저는 사랑을 굉장히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가족, 친구, 동료, 선배 사랑을 과분하게 많이 받았어요.”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알아챌 수밖에 없다.
초조가 덜어진 눈에 평화가 깃들어 있으니까.
시간의 시작과 끝이 종이처럼 접혀 맞닿은 건지, 두시간 넘는 인터뷰가 순식간에 끝났다.
헤어지기 전, 그는 제일 좋아하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드라마틱하게 퍼붓는 눈보라 속에서 늠름하게 선 그 사람 주위로 남자들이 도열해 있는 사진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자족한 듯 넓어졌다.
“2017년 12월,
공관장 회의 때 대사들과 함께 현충원에서 참배를 했는데 갑자기 눈이 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들을 다 이끌고….”
이야기는 말줄임표로 끝났다.
이것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남자들을 ‘이끄는’ 강경화의 선포식.
후추처럼 톡 쏘는 겨울바람이 빈 캠퍼스에 칼날의 금을 긋고 있었다.
계절의 묵직한 빛 속에서 과거의 불꽃을 되찾아 다음 세대의 불빛으로 가져오는 사람의 책무를 생각했다.
여성의 리더십을 키우는 것은 그의 새로운 공식적 발화.
또 하나의 시간이 순환 속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3면)
한겨레 커버스토리 - 2022. 01. 08. 1~4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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