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룡 - 「뒤통수가 멋진 사람」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2000년 넘게 이어진 서양 철학의 체계를 세우고 서양 학문의 토대를 딲은 철학자이다.
광법위한 저작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고 많이 활용된 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이란,
양극단을 배제한 중간의 자리나 산술적 평균이 아니라 여러 사정을 고려한 복합적 균형으로 본다.
탁월성을 보여주는 중용의 덕목을 살펴보면, '무모'와 '비겁'이 양극단이라면 그 중용은 '용기'이다.
예를 들어,
경주용 자동차 선수에게는 과감함이 중용이겠지만,
유치원 통학버스 운전자에게는 조심스러움이 중용일 것이다.
사람됨에서 '허풍'과 '자기비하'의 중용은 '진실성(aletheia)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탁월성을 보여주는 덕목들이 습관을 통해 내면에 갖추어 실천으로 발휘할 때
'가장 좋은 삶'을 살 수 있으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행복한 삶이 항상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닐 수 있다.
때로는 탁월성을 실천하는 삶은 고통을 동반하기도 한다.
한국의 민족 문화와 역사 속에도 균형잡힌 융합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음식문화에서 비빔밥이 그렇다.
비빔밥은 재료를 따로따로 요리한 다음 나중에 함께 넣어 먹을 때 맛의 창조성이 살아난다.
밥그릇에 음식 재료들을 함께 넣어 요리를 하면 그 맛은 떨어진다.
그 이유는 각각의 특성 있는 음식재료가 살아나지 않고 섞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융합적인 성격으로 드러나는 단순한 섞임이 중용이라기보다는 각각의 본성을 잃지 않고
서로 하나가 된 모습으로 나타나 창조적으로 일치를 이루는 것이 중용의 의미이다.
그러한 중용은 융합이전의 본질이 융합이후에도 변형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창조적 새로운 본성으로 발전된다.
한국의 종교문화에서 유불선의 가치가 한국인의 삶에 함께 녹아 있듯이,
그리스도교도 이웃종교들의 가치를 섞지 않고,
그런 삶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지닌 진리와 가치를 지향하고 실천하는 것이 요청된다.
이렇게 중용이란 모든 것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 것이라기 보다
있는 개별 존재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서로 스며들어 모자람이나 넘치지 않고,
부딪히거나 멀리 갈라지게 하지 않는 일치를 살아가는 인간의 융합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p209)
※ 이 글은 <뒤통수가 멋진 사람>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곽승룡 - 뒤통수가 멋진 사람
마음나무 - 2013. 04.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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