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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영-나만 위로할 것/그렇고 - 그런 - 거죠

by 탄천사랑 2021. 11. 24.

김동영 - 「나만 위로할 것」

 

 

15년 동안 매해 겨울이면 이 농장을 찾는다는

스위스 사람 우루스는 내게 보여줄 게 있다며 늦은 오후 농장 건너에 있는 자작나무 숲으로 날 데리고 갔다.
우리는 설상 부츠를 신고 있었다.
이것이 없으면 눈이 허리까지 쌓인 숲을 걷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그가 만들어놓은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 걸었다.
그는 자작나무 사이를 걸으며 그의 지난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의 일흔 인생은 꽁꽁 얼어붙은 호수처럼 반짝였고 단단했다.

 

히피로 살며 유럽을 돌아다닌 20대.
알코올 중독과 무기력함에 빠져 지냈던 30대.
가족을 이루고 새 인생을 시작한 40대.
특별한 일 없이 고요하기만 했던 50대.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60대.
그리고 마치 20대처럼 다시 길을 떠나기 시작한 지금....,

그의 인생은 여기저기 해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다른 천으로 덧대어져 있었지만
그건 그의 망토였고 깃발이었으며 그의 지도였다.

 

그는 내게 물었다.
한국의 다른 친구들도 너처럼 이렇게 살고 있냐고,  나는 그의 질문에 아마 그렇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도 내 말에 동의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네나 나처럼 사는 건 쉽지가 않지.
  우리에겐 지속적인 안정이라는 것이 없으니....."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당신과 닮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내게도 안정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돌려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거긴 우리의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자네도 알게 될 거야.
  나이가 들게 되면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안정이라는 건 없다는 걸.
  열심히 일을 하고 있건 가족을 가지고 있건 그리고 돈이 많이 있건 모두가 결국엔 불안하지.
  우리는 가진 걸 잃을까봐 언제나 불안하고 정말 잘 살고 있는지 의심하고,
  그래서 오히려 별로 가진 게 없는 것이 더 행복한 인생인지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도 하질 않나?"

"하지만...,
  대부분 안정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직장과 가족을 거느리고 열심히 살아가잖아요."

 

그는 내 말을 듣고 한 박자 쉬더니 다시 걸으며 말했다.
"그렇지.
  어쩌면 그게 인생인지 모르지.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사는 것에 불만이 없네.
  비록 나쁜 일이 더 많은 인생이었지만 만약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렇게 살고 싶네."
"가족은 있으세요?"
"물론 있었지."
"그런데 왜 혼자 여행 다니세요?
  부인과 아이들은요?"   그는 뒤따라오는 날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있었다고 했지.
  지금 있다는 말은 안 했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결혼했었지.
  아이들은 딸 둘, 아들 하나,  물론 내 피를 이어 받은 아이들은 아니었네.
  다 이전 남편들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들이지.
  모두 자네보다 나이가 많아.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고 있어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연락은 자주해."
"실례지만, 외롭지 않으세요?
  친자식들이 없다면...,"
"비록 내 피를 나눈 아이들은 없지만
  내가 사랑했던 여자의 한 부분이니 그들 모두를 사랑하고 있네.
  나에겐 그게 더 자연스럽거든.
  다행히도 아이들도 날 친아빠처럼 대해줘서 아주 만족하네."
"그런데 왜 지금은 같이 안 사세요?"
"음....
  마음이 변했으니깐,  때로는 그녀들이 변했고 가끔은 내가 변하기도 했지.
  원래 다 그런 게 아니겠는가?"

 

나는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죠'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더 깊은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거친 우리들의 호흡 소리만이 눈 덮인 자작나무 숲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스노우 부츠를 신고 걷는데도 눈 위를 걷는 게 쉽지 않네요."   그 역시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갈증 나나?"
"조금.
  그래도 참아야죠.
  물을 안 가지고 왔으니까?"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물?  갈증 나면 눈을 먹으면 되잖나?
  널린 게 눈인데."   나는 주변에 쌓인 눈을 둘려보았다.
"그냥 눈을 먹어도 괜찮아요?"
"더럽다고 생각하나?"

 

그는 장갑을 벗고 눈을 뭉치더니 한 입 베어 먹었다.
맛있게 눈을 먹는 그를 보며 나도 따라 장갑을 벗고 눈을 뭉쳐 한 입 베어 먹었다.
순간 입 안과 혀로 차가운 기운이 퍼졌고 금세 눈은 녹아 물이 되어 목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마치 신선한 공기가 몸 전체를 통과한 것처럼 기분이 깨끗해졌다.

 

"눈을 먹은 건 처음이에요."   그는 손에 묻은 눈을 바지에 닦으며 말했다.
"그렇지.
  아무 눈이나 먹을 순 없지.
  하지만 여기 눈은 세상에서도 제일 깨끗할 테니 걱정 말게."   그는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더러운 건 우리의 손이지 눈이 아니라네."   나는 그를 말없이 따라갔다.

"신기한 건,
  나이가 드니 옛날에 있었던 일들이 너무나도 또렷이 생각난다는 걸세.
  젊었을 땐 기억도 안 나던 일인데 말이지.
  그래서 요즘은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책장 정리하듯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네.
  마치 역사책처럼 시대별로 말이지."
"전 너무나도 자주 중요한 것들을 잊곤 하는데
  저도 나이가 들면 지나버린 그것들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까요?"

"아마 자네가 잊은 건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어.
  만약 중요한 거라면 다시 생각날 걸세.
  그냥 자네가 알고 있고 경험한 기억들 사이에 그것들은 납작하게 파묻혀 있을 거야.
  그냥 시간을 가지게,
  자연스러운 시간을,  그럼 어느 날 마법처럼 모든 게 생각날지도 모를 테니."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손으로 숲의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거기에는 꽤 큰 뿔을 가진 북극 사슴 한 마리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얼른 카메라를 커내 사슴을 향해 다가가자 사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겅중겅중 뛰어 숲 속으로 도망가버렸다.

 

"보여주고 싶다는 게 이거였네.
  어떤가?"   나는 사슴이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았다.
"제가 정말 멀리까지 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에,
  겨울에 또 오게.
  그래서 다시 만나자고,  나는 내 몸이 움직이는 한 매해 겨울 여기에 올 테니까."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정화를 거친 듯 더 푸르렀다.
사슴을 사냥하는 것도 아닌 그냥 단지 사슴을 보고 싶어서 이 깊숙한 숯 속으로 눈을 헤치고 오다니....,
그가 보러 오는 것은 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올게요,
  다시 솔직히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올게요."


그는 이제 돌아가자고 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앞서 걸으며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다시 우리의 세상으로...,

 

나는 아쉬웠지만 그는 충분히 충전을 마친 듯했다.
자작나무 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불었다.
그와 내가 내쉬는 거친 숨소리와 눈을 밟는 뽀드득 소리만이 그 숲 속에서 나는 소리의 전부였다.

물론 우리는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맹세를 하지만,  그 맹세들은 그저 말뿐이고 그 말은 그저 바람이기 쉽다.
내가 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약속이 바람이 되어 어디론가 날아가지 않길 바랄 뿐이다. (p309)
※ 이 글은 <나만 위로할 것>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김동영  -  나만 위로할 것

 - 2010. 1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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