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선 -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내 일기장에 나무가 여러 그루 등장했다.
마인드뱁을그려본 것이다.
일렬로 쓰는 것보다 원인과 과정을 나무로 만들어 보니 정리가 더 잘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꼭 나무가 아니어도 무언가를 적어 보는 것은
분명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보다 정리나 해결에 도움이 된다.
학창 시절, 내가 풀 수 있는 문제와 친구에게 공식을 써가면 설명할 수 있는 문제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분명하게 알면 적을 수 있다.
아니 그전에, 적다 보면 분명해지기도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의 현상만이 아니라 반응하는 나까지 객관적으로 적어 보는 것도 필요하다.
개선의 노력도 해야겠지만, 남이 알아주길 바라는 내 모습을 우선 나 스스로 분명하게 정리해 주어야 한다.
우리 각자가 반응하는 것에는 일련의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때로는 공지영 씨처럼 자신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한다.
어느 산문집에서 그녀가 말했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정도이면 나는 피를 흘릴 만큼 아프다'라고 말이다.
내가 작가가 아니라면,
몇십만 권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라면 좀 번거로워도 지금보다 더 자주 말해야 한다.
나를 지치게 하는 것은 늘 하나다.
피곤한 몸도,
밤샘도,
교통 체증도 아니고 슬프게도 아직 사람이 으뜸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리고 건강하게 함께 사는 방법은 그들에게 나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라.
싫을 때 싫다고 말하라,
원할 때 원한다고 말하라.
속으로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말해야 한다.
특히나 그러한 표현이 필요한 나의 대상들은
대부분 사람 마음을 먼저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언제나 꼭 겉으로 말해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속으로 소망하기만 하여 이루어진 것이 무엇인가.
해결된 것이 있는가.
남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라.
그가 내 속을 아는 것보다 내 맘을 모르는 게 더 정상이다.
그러니 미워하지 말고,
대들지 말고 화나기 전에 공손하게 상대에게 자신을 전하여 서로 잘 사는 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도 못하겠으면 자신이 힘들게 사는 걸 탓할 일도 아니다.
내성적인 사람의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다고 한다.
남에게 요구도 안 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감내하던 그들이 더 두고두고 칭송받아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사건의 주인공이 되거나 끝내 나약하게 세상을 떠난다.
상대가 모르게 참았던 시간이 길어 어느 날 폭발하는 이유를 남들은 결코 모른다.
그리고 그럴 때 상대는 미안해하기보다는 왜 그러는지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니 제발 부디 말하라.
말하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참다가 대들 듯 말하는 것,
공격적인 것들이 분명 문제이니 평정 상태에서 상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히 전함으로써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이렇게 대하도록 내가 그를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비굴함으로,
소심함으로, 나약함으로 어느덧 그에게 나를 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를 이렇게 대하셔도 괜찮아요'라고 말이다.
자신이 이렇게 전하고서 그렇게 반응하는 상대를 미워한다면 그것도 사실 어이없는 일이다.
결국 상대 잘못이 아니게 된다.
법정까지 가는 시비가 아니어서 그렇지, 끝까지 따지면 모두 내 잘못이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보면 한눈에 정보를 처리한다.
'아, 이런 사람이구나. 이렇게 대하면 되겠구나'라고 말이다.
그러니 제발 상대에게 나를 막 대해도 된다는 정보를 주어서는 안 된다.
무조건 강해지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보다 자신을 줄이지도 확대하지도 말고 그야말로 '자~알' 전해야 한다.
그러니 일단 본인이 자기 자신을 알고 있어야 전하든지 말든지 할 텐데,
자신의 생각을 수시로 적고 자신에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아예 순서가 시작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일단 적고,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라.
그리고 나서 상대에게 말하라.
그러나 한 가지 미리 당부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변명처럼 사람들에게 다 설명할 필요는 없다.
물론 관계의 처음에는 필요하다.
변명이 아닌 설명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을 길게 설명하며 동의를 구하지는 마라.
오해를 막고자 시작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고, 결국 그 피드백에 자신이 상처 받는다.
자신에 대해 분명히 파악하고 자신을 이해한 후,
상대에게 분명히 말하고 때로는 요구도 하며 자신을 건강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는 의연하게 긴 설명 따위는 피하고 당당하게 고개 들고 전진할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보다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들이 그걸 알든 모르든 말이다.
아니,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상대가 나의 우월함을 알면 경계하거나 시기하는 게 바로 세상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그들은 모르게 하고 나는 날마다 지혜로워져야 한다.
순수를 간직한 지혜,
그것만 갖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P295)
※ 이 글은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이종선 - 멀리가려면 함께가라
갤리온 - 2009.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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