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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메이브 하란 -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 그 황홀한 주말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전율했다.

by 탄천사랑 2021. 10. 24.

메이브 하란 -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브리트 월리엄즈는 시계를 보고 입 속으로 욕을 했다.
밤 열 시였다.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더 일을 해야 했다.
자영업의 문제라면 만사를 자기 손으로 직접 뛰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른 아무도 그 일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잠깐 동안 그녀는 자신의 텅 빈 아파트를 생각해 보았다.
여느 때라면 치약을 중간부터 눌려 짜거나 더러운 양말을 사방에 던져 버릴 사람이 없는 자기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흐뭇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밤은 사정이 달랐다.
그건 아마도 오늘 아침에 잠을 깼을 때 남아 있는 숙취의 찌꺼기로 침울한 기분이 된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자신이 독신으로 지내며 자기 일에 매진하는 데 대한 위안이라면 지난밤 리즈가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브리트는 리즈의 삶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리즈의 삶은 그저 주고 또 주는 행위의 연속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브리트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녀는 받고 또 받는 그런 삶을 영위했을 터였다.
그 때문에 텅 빈 아파트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일 것이다.
아무튼 섹스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섹스라면 출장 중에 아무런 단서도 없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브리트는 지난 달 칸느에서 이탈리아의 어느 영화감독과 함께 보낸 그 황홀한 주말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전율했다.
두 사람은 서른 여섯 시간 동안 침대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교가 능란해서,  거의 몇 시간 동안이나 그녀를 황홀경에 빠지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가 사정(射精)을 하고 난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마침내 침대에서 나왔을 떄 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키스를 하면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적었다.
전화를 걸지는 않을 거야,  하고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그와 헤어진 후 그녀는 꼬박 사흘 동안 밤마다 전화기 옆에 붙어 있었다.
결국 그는 전화하지 않았는데,  그 사실이 놀라울 것은 없었다.
아무튼 여기엔 단서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녀 역시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회사의 수익을 볼 때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4년 전 기업용 비디오를 제작하는 회사를 만들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2만 파운드나 되는 당좌대월을 얻어 가까스로 꾸러 갔으나, 지금은 당기 매출에만 3백만 파운드에 달했다.

 

브리트 월리엄즈는 다행스럽게도 사업에 그다지 서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고향을 떠올려보았다.
무기력한 폐광촌.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침체된 마을이었다.
대체 그녀의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삶을 꾸러 갈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서류를 챙겼다.
더 이상 일할 기분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텅 빈 사무실 문을 잠그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성공의 상징인 빨간 포쉐 카레라가 그녀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그녀는 차체의 지붕을 접고 여름밤 속으로 나섰다.
그곳에서는 소호의 플루트 주자가 연주하는 그린슬 리브즈가 울려 퍼졌다.
(런던에 있는 소호 광장과 그 일대. 한때 외국인 거주지역이기도 했으며, 지금은 레스토랑 거리로 유명함)

 

포장해서 파는 중국 음식과 핫도그 같은 도시의 냄새가 흘러왔다.
이국적인 정취와 대담성, 칼날 위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하는 것 같은 불안감이 한데 뒤섞여 런던 특유의 정취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름밤이어서 그녀는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술집 앞마다 사람들로 들끓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은 초대받지 않은 파티처럼 비춰졌다.

 

그녀가 크라이스트 교회 안뜰에서 데이빗을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이런 밤이었다.
그들은 이튼교 출신이 들끓는 무리 속에서 유일한 북쪽 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소개가 없었는데도 자연스럽게 함께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들은 샴페인 한 병을 훔쳐 체어웰 강 위에서 배를 탔다.
그 후부터 두 달 동안은 그녀가 옥스퍼드에서 보낸 3년 간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얼마 후 그는 이제부터 일에 전념할 생각이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거절하는 정중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인적이 점점 뜸한 동쪽 구역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문득 데이빗이 이 모든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고 싶어졌다.
데이빗은 리즈보다는 오히려 그녀 쪽에 더 가까운 타입이었다.
그녀는 어째서 데이빗이 그녀를 두고 리즈와 가까워졌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엾은 데이빗.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는 해고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잠을 설칠 게 뻔했다.
직장을 위태롭게 만들고 이 모든 소동을 야기시킨 장본인인 리즈를 그가 어떻게 참고 볼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리즈는 필시 메트로와 자기 아이들에 너무 푹 빠져서 데이빗이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 이리라는 것조차 모르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직장과 아이를 함께 가지려 할 때 생기는 문제점이었다.
자기 배우자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볼 시간도 그럴 여력도 없어지는 것이다.
데이빗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아마 제이미와 데이지만큼 위로를 필요로 할 터였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데이빗이라면 결코 위로받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데이빗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리즈를 만나기 전까지 그 눈부신 두 달 동안 그녀는 데이빗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이따금 자신이 그때 이후로 그렇게 재미있는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브리트는 팔을 뻗어 테이프를 넣고 볼륨을 높였다.
에릭 클랩튼의 '원더풀 투나잇(Wonderful Tonight)'이었다.
데이빗은 리즈 때문에 그녀 곁을 떠나기 전 그 테이프를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p107)


----가스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흥분시키는 본능적인 재주를 갖고 있는 듯했다.
대체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운 걸까?
아마 요즘 여자애들은 <페미나>의 충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내들에게 자기들이 잠자리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고스란히 일러주는 모양이었다.
멜은 황홀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기대한 만큼 멋진 몸매를 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신세대 남성이 모두 이 정도라면 그동안 그녀는 구닥다리 사내들과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 아침 베개를 베고 잠든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녀는 문득 아까부터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긁고 있는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들 서로가 나눈 그 쾌락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토록 격렬하고 즐거운 이 행위가 사랑의 열정에서 우러나왔다기보다 기교에서 억지로 짜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했다구?"  리즈는 놀란 어조로 숨기려 애쓰며 친구들을 둘려보았다.
그들은 모두 지니네 집에서 열리는 편안한 점심 식탁에 모여 있었다.
게다가 눈앞에는 멜과 그녀의 새 남자 친구가 앉아 있었는데, 마치 카마수트라(고대 인도의 성전(性典)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제발, 리즈.
넌 너무 깐깐하게 굴고 있잖아,  하고 리즈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질투심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와 데이빗은 정상 체위로 오 분만 있어도 뻗어 버리고 마는데.
한때는 그들도 온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층계에서든, 식탁에서든, 심지어는 다림판 위에서까지 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필립스 증기다리미를 볼 때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 저절로 미소가 나왔는데)
물론 그건 모두 아이가 생기기 전의 일이었다.

 

리즈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어떻게 여길지 궁금했다.
지니는 불안한 시선으로 정원 저편의 물놀이 기구에서 첨벙 대는 아이들 쪽을 보고 있었으나,
아이들은 자기들이 내는 소란 때문에 이쪽의 말소리를 듣지 못했다.
가빈은 장난기 어린 미소로 자기 아내를 쳐다보며 시선을 붙잡으려 했다.
지니가 돌아보자 그는 눈을 찡긋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시선으로 보건대 그들 역시 괜찮은 밤을 보낸 게 분명했다.

 

데이빗은 불만스런 얼굴이었다.
그는 멜을 싫어했다.
그는 멜이 눈에 거슬리는 둔감한 여자라고 여겼다.
물론 그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멜의 개성이었던 것이다.

 

.... 멜은 점점 더 밉살스럽게 굴었다.
"정말 굉장했다구."   그녀는 한숨을 지었다.   그녀의 어조는 감격에 겨워 나긋나긋해졌다.
"아무리 안돼도 길이가 9인치는 될 걸."
그녀는 감탄 어린 반응을 기대했지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10인치는 됐어. 

  정말이라구."  그러면서 멜은 두 손으로 아주 커다란 프랑스제 지팡이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 바람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모두 멜이 어떤 여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성희 기구 카탈로그를 봤는데 말이야."  브리트는 선정적인 몸짓으로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 했다.
"콘돔엔 세 가지 규격이 있데.
  그런데 그게 대형,  특대형,  초대형이라지 뭐야."   멜은 남자들의 허영심에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렇다면 가스는 초대형급이겠군." 하고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 생각엔 크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소"   데이빗은 점잔 빼지 않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멜이 대들듯 말했다.
"그런 말은 크기가 왜소한 사내들이 퍼뜨린 헛소리라구요."

 

리즈는 마침 점심을 준비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니를 따라갔다.
음란스런 긴장감으로 죄어들 것 같은 분위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섹스에 관한 얘기는 침착성을 잃게 만들었다.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하다니!

 

그녀와 데이빗 사이에서 최근 몇 년간 그런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대체 다른 사람들은 결혼 생활에서 그런 정열을 지탱 하기 위해 무슨 수단을 쓰는 걸까?

지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간 그녀는 그 쾌적한 공간을 보고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이 집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이곳은 언제나 향긋한 온기에 싸여 있어서, 한번 들어오면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곳은 꿈에서나 그릴 부엌을 현실로 옮겨놓은 곳이었다.
그렇다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벽에 수십 송이의 마른 장미를 걸어놓은,
여성지의 특별부록판에나 나오는 그런 공상 속의 부엌이 아니었다.
청색 오븐에서는 감미로운 냄새가 흘려 나오고 조리대 위에는 청백색 자기 그릇들이 놓여 있으며,
불쏘시게로 쓸 신문지 더미가 쌓여 있고,  조각조각 이은 커버를 씌운 낡은 소파가 놓여 있는 진짜 부엌이었던 것이다.

 

.... 지니가 수플레와 함께 요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지니는 레몬 푸딩에 쓸 소스를 젓고 있었다.
톡 쏘는 레몬 향내가 풍겨왔다.
"지니, 난 네가 부러워."  지니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스푼을 떨어뜨릴 뻔했다.
"네가 나를 부러워한다고? 하지만 넌 거물이잖니.
  넌 눈부시게 성공했고 텔레비전 일을 하고 있구,
  또 멋진 남편까지 있잖아.
  난 그냥 가정주부일 뿐이지만,  너는......, "
"알아, 알아."  리즈가 지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난 굉장한 여자지.

  뭐든 할 수 있는 여자란 말이야.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어."

 

지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전에는 리즈가 이렇게 신랄한 어조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은 잘돼 가는 거니?"   그녀는 리즈와 지난 몇 달 동안 제대로 얘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다음 주에 우리 시내에서 점심 같이 하면서 얘기 좀 할까?"

 

문득 리즈는 자신이 얼마나 자기를 이해해 줄 사람을 갈망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멜이나 브리트처럼 자신을 돌연변이나 미친 여자로 여기지 않을 그런 사람 말이야.
아니, 데이빗조차 자신을 그렇게 여겼다.

 

"아주 괜찮은 생각인데."   리즈는 맛 좋은 소스 속에 손가락을 담궜다.
"좋아.
  이제 기운 좀 차리고 저 섹스에 굶주린 잡지 편집자의 고백을 마저 들어볼까?"
"점심이 준비됐다고 말해 주겠어?"

 

리즈는 발코니 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갔다.
가빈이 아이들에게 물을 뿌리자 비명 소리가 났다.
멜은 꿈꾸는 듯한 눈으로 자기 술잔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자기의 남자 친구가 어떤 메뉴를 준비해 놓고 있을지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브리트는 깔게 위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버들 의자에 앉은 데이빗을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자,  점심이 준비됐답니다."   리즈는 가빈과 아이들에게 말했다.
"가요,  데이빗."  브리트가 그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리즈는 정원 쪽으로 내려가서 물놀이 기구 속에 들어앉은 제이미를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그녀는 데이빗이 일어날 때 순간적으로 브리트가 몸을 부딪치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그녀는 데이빗의 얼굴에 스친 흥분한 표정도 보지 못했다.
데이빗은 브리트의 그 행동이 고의적인 유혹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니는 그 모든 광경을 보고 있었다.  (p115)

이 글은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메이브 하란 -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역자 - 한기찬
둥지 - 1992.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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