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브 하란 -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동부 서섹스 지방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 속을 달리며 어머니의 집으로 가는 동안
리즈는 가책과 긴장감이 스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곳을 좋아했다.
그런데 이제, 9월 하순의 가을볕에 황금빛으로 변색되기 시작한 나뭇잎들을 보니,
메트로 방송국은 마치 터무니없는 상상력이 지어낸 허구처럼 생각되었다.
이윽고 파이브 게이츠 농장으로 난 진입로에 들어서자 그녀는 속도를 늦춰 한때 그녀가 살던 집을 바라보았다.
파이브 게이츠 농장은 전형적인 엘리자베스 시대의 견고한 농장이었는데,
마치 햄프턴궁을 축소시켜 놓은 것처럼 탁한 핑크색의 벽돌에 정교한 암적색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농장의 거대한 굴뚝은 오늘날이라면 감히 만들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변함이 없는,
한적한 들녘에 서 있는 이 평화로운 집을 보자 리즈는 어째서 자신이 이곳을 떠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행복의 산실이었다.
그녀가 올 때마다 어머니는 그곳, 테라스로 내려오는 현관 계단에 나와 그녀가 오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리고 다시 떠날 때에도 날씨가 어떻건 상관치 않고 굳이 그 자리에 나와서 작별인사로 손을 흔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번에도 어머니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계단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면서 미소를 보내 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문득 자신이 왜 이 평하롭고 아름다운 고향을 떠났는지를 상기했다.
이곳은 너무도 안락한 곳이었다.
그녀에게는 도시의 소란과 흥분이,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는 생활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삶의 수레바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온 것이다.
어머니는 층계를 내려와 자동차 쪽으로 다가왔다.
"잘 있었니,
애야!
제이미는 어떠냐?
네 상관은 네가 오늘 하루를 고스란히 땡땡이 친다고 하니까 뭐라더냐?"
어머니가 리즈에게 키스를 하고 제이미를 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거들면서 물었다.
꽃무늬의 원피스에 거의 백발을 한 어머니가 땡땡이 친다는 식의 표현을 알고 있다는 데 리즈는 좀 놀랐다.
아마 텔레비전을 너무 보신 탓이리라.
"펄펄 뛰죠, 뭐."
"가없는 리즈.
내가 제이미를 소파에 눕혀 주마.
그리고 차 마시기 전에 먼저 닭장에 가서 모이를 좀 주자꾸나."
자식들이 둥지를 떠나고 나자 리즈의 어머니는 닭을 키우기 시작했다.
남편이 죽고 난 이후,
목사관 파티 때마다 케이크를 굽는 일과 자선 바자회의 일 말고는 닭을 키우는일이 어머니의 소일거리였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닭장으로 개조한 헛간 밖에서 로즈는 어머니가 낡을 대로 낡은 물통 속에서 모이를 꺼내 뿌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모이를 뿌리자 색색가지 닭들이 달려왔는데, 어떤 녀석은 어머니의 손바닥에서 모이를 받아먹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닭들을 쓰다듬어 주며 구우구우하는 소리를 내었다.
마치 데이지를 재우기 위해 자장가를 부를 때처럼,
리즈의 세대는 어렴풋이나마 어머니 세대가 안됐다고 생각해왔다.
아무런 성취감도 없이, 남자들이 크고 넓은 바깥 세상에서 흥분에 찬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잔디밭에 앉아 차나 마시는 무미건조한 삶을 보내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라고,
리즈는 여자들이 그런 식으로 산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건 정말 낭비었다!
그런데 과연 어느 쪽이 좀더 인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어떻게 시간을 쓸지를 선택하며 이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축으로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어머니일까?
아니면 막대한 권력을 지녔지만
그 때문에 시간에 쫓기고,
돈은 벌지만
그것을 쓸 여유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녀일까?
"어머닌 제 삶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어머니는 닭들에게 모이를 주면서 거북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머니는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녀의 세대는 마치 신앙차럼 진실을 숭배하지 않았다.
그것이 모든 문제에 대한 치유책이었던 것이다.
"내가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게 좋겠니?"
"물론이예요." 리즈는 어머니의 말뜻을 모르는 채 그렇게 대답했다.
엘리노어는 리즈 쪽을 돌아다보지 않고 여전히 닭들에게 모이를 뿌리면서 말했다.
"좋아,
네가 정말로 진실을 알고 싶다면,
난 네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한단다.
넌 크게 성공했고,
또 그런 너를 나는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너는 정말 중요한 일들을 할 만한 시간이 없어.
넌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일조차 잊고 지내.
작년에는 내 생일도 잊어버렸잖니."
리즈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두 눈을 감았다.
그때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넌 언제나 일을 하고 있지.
주말에 내려올 때조차 넌 일거리를 들고 오잖니.
넌 네 아이들조차 키우지 못하고 있어.
오늘날엔 그게 예사로운 일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넌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거야"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면서 가엾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나쁜 것은,
네가 그 생활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거야"
멀리서 전화벨 소리가 났다.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는 거북한 자리를 피할 수 있게 되어 안도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놓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나는 어머니를 안됐다고 생각해 왔어.
한데 지금은 어머니가 나를 안됐다고 여기고 계서.
도대체 우리 여자들에게 무엇이 잘못된 걸까?
"네 비서의 전화야.
네가 어서 돌아오는 게 좋을 것 같다는구나.
콘래드가 무엇 떄문인지 잔뜩 화가 났대." (p136)
※ 이 글은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작가책방(소설 > 메이브 하란 -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 '결코 물어 보려고 하지 말라' (0) | 2021.12.17 |
---|---|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 오, 클로디아. 정말 대담하군! (0) | 2021.11.05 |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 그 황홀한 주말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전율했다. (0) | 2021.10.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