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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메이브 하란 -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 '결코 물어 보려고 하지 말라'

by 탄천사랑 2021. 12. 17.

메이브 하란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 그 일을 모른 척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내가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건 그 일이 확실치 않다는 거야.
  우린 언제나 서로 솔직하게 얘기해 왔지.
  문제가 생기면 항상 의논을 했어.
  나는 그가 정말 바람을 피우고 있는지,  또 그게 그가 그토록 화를 낸 이유인지 모르겠어.
  모든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면 훨씬 쉬워질텐데."

 

"농담하는 거니?  절대로 그래선 안돼.
  그러면 모든 것을 망치게 되고 말아.
  '결코 물어 보지 말라.' 우리 엄마가 부부문제에 대해 일찍이 해주신 유일한 충고야."

 

"하지만 멜,  지금 이대로는 정말 끔찍해.
  그건 우리 어머니들 세대에서나 통하는 말이었을 거야."

 

그 순간 멜은 지금 막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 한 쌍의 남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테이블을 안내 받는 동안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리즈는 그들이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순간 섬찟한 공포를 느끼며 리즈는 왜 멜이 그들을 보고 얼어붙었는지를 깨달았다.

 

그 남자는 데이빗이었다.
함께 온 여자는 막 자리에 앉아 웨이터에게서 커다란 메뉴판을 건네받고 있었다.
리즈 쪽에서는 짧은 금발 머리에 값비싼 하얀 슈트 차림을 한 여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리즈는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데이빗의 점심은 언제나 외식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사무적인 자리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여자'였던 것이다.
뱃속에서부터 고통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쪽에서는 구석에 있는 리즈와 멜을 보지 못했다.
그 여자가 웨이터에게 주문을 하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리즈는 놀랍게도 그것이 브리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즈는 안도감으로 하마터면 큰소리로 웃을 뻔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왜 데이빗이 브리트와 점심을 하기로 했다는 말을 자기에게 해주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며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
하긴 오늘 아침엔 그런 사소한 얘기를 나눌 겨를이 없었잖은가.

 

테이블 가까이에서 리즈는 문득 브리트가 항상 뿌리고 다니는 강한 사향 향수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어째서 이 냄새가 신경 쓰이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진실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폭발하듯이 터져버렸다.
너무도 강한 깨달음에 그녀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가 그 향수 냄새를 맡은 것은 데이빗의 옷에서였다.
그때 비로소 그녀는 데이빗의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상대는 품행이 단정치 못한 홍보담당기자도, 데이빗을 숭배하는 비서도, 공상을 꿈꾸는 리포터도 아니었다.
바로 브리트였던 것이다.
자신의 친구 브리트.

 

그때 데이빗도 그녀를 발견했다.
그 역시 똑같이 몸이 얼어붙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순간 그는 하던 말을 멈췄다.
그 순간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자신의 의혹을 증명하는 고통스러운 빛을 보았다.
'결코 물어 보려고 하지 말라' 부부간의 행복에 관한 어머니의 비결이 그녀를 조롱하듯 귓가에서 울려왔다.

 

"당신, 브르트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건가요?"  그녀는 나지막하지만 또렸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브리트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빗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데이빗이 얼마나 거짓말에 서툰가를 상기했다.
그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그의 장점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래서 그를 믿을 수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생각엔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 같군요."
리즈는 브리트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브리트는 마녀였다.
배신자였던 것이다.
데이빗은 자제력을 잃지 않고 천천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전부가 그녀의 잘못은 아니오."  그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미안하오, 리즈. 정말 미안하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녀는 이성을 잃은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내부에서 분노와 저주의 불길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술잔을 천천히 들어올려 그의 얼굴에 끼얹었다.
포도주는 브리트의 하얀 슈트에도 스며들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은 짐을 옮기는 게 좋겠군요."  한 순간 데이빗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할 말이 있다면 이런 것일 터였다.
'그러지마, 리즈. 우리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길 좀 해보자구.' 그랬다면 아직 그들의 결혼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말했을 뿐이다.
"알겠소."  그녀는 무미건조한 그 목소리에서 이제는 너무 늦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그녀에 대해서 가진 감정이 어떤 것이었든 이제는 모두 끝난 것이다.
"알겠소." 하고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래야 되겠지"

 

리즈가 레스토랑 안을 돌아보자 사람들은 재빨리 자기들의 접시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들이 이 모든 것을 다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등을 돌렸다.
적어도 짓밟힌 아내처럼 보여서는 안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순간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어디선가 박수갈채라도 쏟아져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돼.' 그녀는 무작정 레스토랑을 걸어나오면서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이건 TV  CF의 한 장면이 아니야. 현실이라구.'
택시를 불러세웠을 때, 그동안 필사적으로 참았던 눈물이 마침내 쏟아졌다.
끝없이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이 오전 내내 정성들인 화장과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밝은 노랑색 수트를 얼룩지게 만들었다. (p201)

이 글은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메이브 하란 -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역자 - 한기찬
둥지 - 1992.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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