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ORS LINE - 11 ± 12 2019
흔히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잘 만든 영화는 잘 쓰인 시나리오 위에서 자라난다. 영화의 타이틀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처음과 끝을 거듭하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시나리오 작가 배세영을 만났다.
Text-윤민지 photo-김범기 픽쳐 쑈 스튜디오
쫄깃한 '말맛'의 주인공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1.600만 관객을 웃긴 <극한직업>의 명대사를 탄생시킨 주인공,
배세영 작가는 최근 영화판에서 시나리오 작가를 주목하는 이유로
"높은 제작비와 한두 명의 톱스타를 기용해야 인정받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고 분석했다.
2007년 <사랑방 선수와 어머니>의 각본으로 데뷔한 그는 <킹콩을 들다>, <미나 문방구>,
<우리는 형제입니다>, <바람바람바람> 등 여러 작품을 쓰고 각색한 14년 차 시나리오 작가다.
지금까지 시나리오 작가는 감독과 배우에게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으나, 이러한 통념을 깬 것 또한 그다.
"영화에 있어 시나리오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겼어요.
시나리오 작가에게 러닝 개런티(Running Guarantee 흥행 결과에 따라 추가 보수를 지급하는 방식)를
주기 시작했거든요. 제가 그 시작점이 되었고요."
시작과 끝을 반복하는 과정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하나의 세계를 열고 닫는 문과 갔다.
작가들이 유독 해당 장면에 공을 들이는 이유다.
그 또한 매번 첫 신부터 수정을 거듭하며 다음 신을 이어간다고 했다.
오늘 첫 번째 신부터 다섯 번째 신까지 썼다면, 내일은 다시 첫 번째 신부터 열 번쨰 신까지 쓰는 식이다.
처음과 끝을 미리 정해두고 내용을 채워 넣은 게 아니다 보니 때로는 구상했던 시나리오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달라지기도 한다고.
"첫 장면은 아주 고심해서 써요.
스크린에 제목이 뜨자마자 관객이 몰임할 수 있도록 주제와 분위기, 인물을 잘 표현하려고 하죠."
배세영 작가가 최고로 꼽는 영화의 첫 장면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이창>의 프룰로그다.
건물 밖을 훑으며 그 안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비추는 롱테이크 신,
별다른 설명 없이 영화 배경을 드러내는 멋진 연출이다.
반면 나카시마 테츠야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중 주인공 마츠코가 한 계단씩 오르며
죽은 동생의 곁으로 가는 장면은 두고두고 곱씹는 엔딩이다.
"마츠코가 외로울 때마다 흥얼대던 노래를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 한 소절씩 불러요.
마츠코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모두에게 남긴 영향력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작가들은 으레 새 작품을 시작하거나 끝마칠 때마다 특정 행동을 습관처럼 반복한다.
술을 잔뜩 마시거나,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주변 정돈을 하는 식이다.
영화의 첫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랬든 하나의 세계를 여닫는 나름의 의식인 셈
배세영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는 새 시나리오를 쓸 때면 작업실 대청소를 한다.
바닥과 창은 물론 며칠에 걸쳐 모든 가구의 서랍 속까지 정리하고 나서야 컴퓨터를 켠다고,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 <완벽한 타인>이나 <극한작업>처럼 '잘된' 작품의 시나리오를 먼저 열어본다.
"작품의 기운을 받고 싶어서요(웃음).
마음에 드는 글을 보며 하루를 통째로 보내기도 하죠.
반면 작품을 하나 완성하고 나면 길게는 보름이 지나도록 열어보지 않아요.
작품을 끝내면 공허함이 무척 크거든요,
영화사에 송고해야 할 때가 다 되어서야 다시 읽어 봐요.
'메일을 쓰기 전까지는 아직 작품을 끝내지 않았다'라는 마음으로 품고 있는 거죠."
말을 그렇게 하지만 그에게 끝은 곧 시작이다.
작품을 쓰고 나면 감독의 평가가 시작되고, 영화가 제작되면 관객의 평가가 기다리기 때문,
영화가 개봉되면 극장에서 최소 다섯 번 이상 관람하며 관객의 반응을 살핀다.
집필부터 영화 제작 그리고 평가까지, 시작과 끝을 무한 반복하는, 시나리오 작가는 그런 존재다.
마지막은 관객에게 힘을 주는 영화로
영화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나리오 작가로 작업 요청이 쇄도하는 그.
<해치지 않아>, <나의 삼촌 브루스리>, <인생은 아름다워> 등 개봉을 기다리는 작품 또한 여럿이다.
요즘 한창 촬영 중인 작품은 <스텔라>다.
맞다. 현대자동차의 , 그러니까 한국 최초의 중형 세단 스텔라를 소재로 했다.
"새 차를 산 후 기존에 타던 차를 중고차 매장에 팔고 돌아섰을 때였어요.
비상등을 깜빡이며 견인되는 제 차를 보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옛 주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듯한 차를 보며
배세영 작가는 1980년대 인기 차종이었던 스텔라를 떠올렸다고,
서울 올림픽 공식 차량이자 택시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던 스텔라는 가족이자 친구 같은 차였다.
"자동차는 운전자와 어디든 함께 가는 친구이자,
혼자만의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공간이에요.
차 한 대가 폐차되는 장면에서는 모든 관객이 울였으면 좋겠어요."
'천만 관객 영화'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지만
새로운 세상과 인물을 창조하는 것은 여전히 고통이 따르면서도 매력적인 일이라는 그,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을 쓸 계획이다.
"사는 게 힘들지만 다시 한번 웃으며 미워했던 가족에게 전화를 걸게 하고,
연인의 손을 한 번 더 잡을 수 있게 하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그동안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게 하는 영화. 저는 이런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계속 쓰려고 합니다."
"언젠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써야 한다면 어떤 시나리오를 쓰고 싶냐"는
질문에 배서영 작가는 자신의 삶으로 눈길을 돌렸다.
"엄청 훌륭한 삶을 산 건 아니지만 제 인생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대학생 시절,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농약사를 소재로 졸업 소설을 썼지만
'엉뚱한 이야기를 쓰는 학생'이라면서 인정받지 못했거든요.
시나리오 작가로서 기회가 된다면,
제 마지막 작품은 농약사에서 자란 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p90)
Text-윤민지 photo-김범기 픽쳐 쑈 스튜디오
MOTORS LINE - 11 ± 12. 2019.
'문화 정보 > 책(일간.월간.사보.잡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동원-짧은 이야기 긴 감동2/제 1 부 8. 이심전심(以心傳心) (0) | 2022.01.24 |
---|---|
메타버스라는 신대륙이 열렸다. (0) | 2021.09.18 |
島山의 길 걸으며 시대를 일깨우다. (0) | 2021.09.15 |
마음만은 그곳에! 랜선 타고 떠나자. (0) | 2021.08.31 |
월간 가정과 건강-더 나은 삶을 위한 변화 중에서/비참하게 되지 말고 비범하게 되라 (0) | 2021.0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