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도 - 「참으로 소중하기에...조금씩 놓아주기」
젊은 시절.
내 별명 가운데 하나는 '화염 방사기'였다.
성격이 너무 급하고 다혈질이라 한번 욱, 하면 순식간에 주위를 태워버리는 불길처럼 뜨겁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그런 성격을 갖고도 인간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뒤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생각해도 한 번 화낸 일을 소심하게 따지고 들거나,
골백 번씩 되씹으면서 은근히 괴롭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니, 그런 좀스러운 성격을 타고나지 않은 걸 오히려 다행으로 알았다.
화끈하게 화낼 때 화내고 깨끗이 잊는 편이 멋지지 않은가!
신혼 시절, 하루는 그런 내 성격이 또 한 번 불을 내뿜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때 나는 신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었고 아내는 교사로 학교에 출근하느라, 살림은 어머니가 맡아주고 계셨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내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고부 갈등 때문에 집안에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날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아예 짐을 챙겨서 기도원으로 가버리셨다.
경제생활 책임지랴, 시어머니 눈치 보랴, 부담이 만만찮은 아내의 심정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연로한 어머니 한 분을 제대로 모시지 못해서 가출까지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버럭 울화가 치밀었다.
때마침 아내가 아침상을 들여왔는데, 도저히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잔뜩 부어 있는 아내 얼굴을 대하는 순간, 기어이 큰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 얼굴이야?
어머니가 나가셨으니 속이 시원해?" 아내라고 해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그동안 꾹꾹 눌려 참은 일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남편에게서 핀잔까지 들었으니 말투가 고울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자제력을 잃어버렸고, 결국은 하지 않아야 할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아니, 수녀 생활을 10년 넘게 했다는 여자가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거야?"
"뭐라고요? 그럼 어머니는요?
전도사 생활을 10년 넘게, 아니 평생 하신 어머니는 왜 그렇게 이해심이 없는 거죠?"
평소 조용한 성품이던 아내도 그 말만은 넘길 수 없었는지 가시 돋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순간, 나는 들고 있던 수저를 쾅, 소리가 나도록 내팽개치고 뛰쳐나와버렸다.
부서질 듯이 문을 닫는데, 돌아앉아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내의 뒷모습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둔 채, 나는 학교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분이 안 풀리기는 마찬가지 었다.
그런데 얼마나 달렸을까.
돌아앉아서 우는 아내의 모습이 떠오르더니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 것이다.
사실,
수녀로서 수도원 생활에 만족하고 있던 아내에게 반해서 종신 서원까지 무너뜨리게 한 장본인은 바로 나였다.
어렵고 어렵게 결혼에까지 이르렀지만, 나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임은 커녕 아내가 버는 돈으로 학비까지 충당하는 실정이었다.
더구나 어머니는 수녀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처음부터 아내를 마뜩잖아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한 집에 살면서 며느리에게 고운 눈길을 보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아내는 아내대로 안팎에서 얼마나 시달렸을 것인가.
학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저 1초라도 빨리 아내에게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공중전화를 보자마자 대뜸 아내의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직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1교시가 끝난 후,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집에서도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날 내내 전화를 했지만 아내는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학교는 결근해버리고 집 전화는 선을 빼놓은 것 같았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아침에 앉아 있던 자리에 그대로 엎드려서 아직도 울고 있었다.
어지러운 밥상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종일토록 꼼짝도 하지 않고 그렇게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내 곁으로 다가가서 얼른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아내는 몸을 일으킬 기미도 보이지 않고 울기만 했다.
"당신도 내 성격 급하다는 것 잘 알잖아. 이제 그만 마음 풀어요."
"..."
"날 좀 이해해줘. 내가 이렇게 사과하잖아. 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자, 그만 마음 풀어요."
"....'
"우리 약수터에 갔다 올까? 기분이 한결 나아질 텐데."
"..."
아무리 달래도 아내는 묵묵부답이었다.
답답증이 일 지경이었다.
나는 아내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그만해요. 당신도 알다시피 난 욱하는 성질만 있지, 뒤끝은 없잖아.
인간성 좋은 건 당신도 잘 알면서 왜 그래."
"..."
"자. 이제 그만 좀 하라니까!" 그때였다. 아내가 얼굴을 들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
"인간성이 좋다고 그랬어요?"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내가 성격은 좋잖아."
"그게 좋은 성격인가요?"
"사람들이 다 나한테 성격 좋다고 하던데..., 맺힌 데 없고, 친구 많고."
"아니, 그 성격이 정말로 좋은 성격이에요?"
"뒤끝이 없잖아..., " 순간, 아내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성격에 뒤끝까지 있으면 그게 인간이에요?
그 뒤끝 없다는 성격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을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어요?"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망치로 한 대 단단히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때까지 나는 욕설이든 고함이든 직설적으로 내뱉고,
돌아서면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는 내 성격이 참 좋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알고 보면 '뒤끝'이 없다는 건, 오로지 나 자신만 깨끗해지는 느낌을 가진다는 뜻이었다.
실컷 화낸 사람도 나였고, 씻은 듯이 감정 정리를 끝내는 사람도 그저 나 혼자였다.
상대방은 내가 내뿜는 화염에 데여 화상을 입다 못해 짓무를 지경인데,
시간이 갈수록 상처가 쓰려오는데, 나 혼자 손바닥 탁탁 털며 이렇게 주장하는 꼴이었다.
"난 벌써 깨끗이 잊었어요.
그러니 내가 일으킨 화재도 없었던 걸로 합시다."
그날도 나는 채 한 시간도 안되어 혼자 상황을 종료시켰지만, 아내는 온종일 방바닥에 엎드린 채 아파했다.
모두가 상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내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결과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뒤끝 없이 화끈한 내 성격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대부분 가족들 앞에서 너무 쉽게 화를 낸다.
남들 앞에서는 침 한번 꿀꺽 삼키고 참을 수도 있는 문제를 가족이라는 이유로 못 참아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서로 허물없다는 이유 때문에,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는 편한 관계라는 핑계로
발가벗은 감정을 폭발 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가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뜨거운 불은 화살을 남기게 마련이다.
불을 지른 쪽은 멀쩡할 수 있지만 불길에 휩싸인 쪽은 크건 작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불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입은 화상이야 말로 오래오래 흉한 자국으로 남는다.
내 곁에 가까이 있어서 나 때문에 가장 다치기 쉬운 사람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화상 자국을 가족들에게 남겨왔던가. (p29)
※ 상기는 <참으로.... >에 실린 글을 필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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