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낙산사(洛山寺)!라고 말해야 한다.
그곳에는 반드시 감탄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해 낙산사가 큰 절이어서가 아니다.
신라 불교의 오랜 절이어서도 아니다.
그 절은 바로 동해와 합쳐져서 이름이 불려지기 때문이다.
창연 망망한 동해와 더불어 오랜 세월을 그 파도소리에 싸여서 살아온 낙산사를
어찌하여 감탄사 없이 부를 수 있겠는가.
커다란 바다는 그의 모든 파도를 가지고 바닷가로 몰려온다.
웅장한 적이다.
그 파도는 영원한 분노를 일으켜서 동해안의 모든 바위와 모래밭을 향해서 몰려온다.
최남선의 신시 '처얼썩 처얼썩 쏴아'의 의성어로는 도저히 동해 파도를 묘사할 수 없다.
누구도 그 파도소리를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파도의 크기가 저 해돋이 수평선으로부터 몰려와서는
겨우 모래밭의 햐안 거품으로 마칠 때의 깊은 허무감은 무엇인가.
모든 힘을 합쳐서 만든 막강의 파도가 한낱 힘없는 거품으로 모래밭에서 패잔 해버리는 비극감은 무엇인가.
그런 파도의 사망을 경험하는 여행자의 무상감은 또한 무엇인가.
그러다가 그 여행자는 바다 앞에서 그 바다가 아무리 커다란 파도를 거품이 되게 하는 패배를
되풀이하더라도 사람보다 거대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알기 시작한다.
한낱 터럭에 비유되는 자기 자신 앞에서 바다는 너무나 큰 것이다.
누가 이런 바다 앞에서 '영원'이라든가 '무한'이라는 추상어를 만들지 않는단 말인가.
동해 낙산사에 가서 그 말을 쓰지 않으면 그런 여행자는 천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 마침내 동해는 그 동해와 사람을 똑같이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범아일여(梵我一如)가 된다.
바다와 나,
우주와 나는 같은 것이다.
동해에 가서 부처가 되지 못하는 바보도 있는가.
동해는 부처다.
동해는 관세음보살이다.
그 바다를 바라보면 바라보는 여행자의 여수(旅愁)야말로 법열(法悅)인 것이다.
그래서 바다와 여행자는 한꺼번에 부처가 되어서 파도치고,
파도치는 소리를 듣고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법열(法悅)의 동해 낙산사에서 한 여행자는
그가 살아온 많은 행복을 잠깐 제 주머나 깊이 넣어 두고 오직 이 낙산사와 보덕굴,
의상대에 서린 해기(海氣)를 대할 수 있다.
.... 바다를 보다가 돌아다보면, 금강, 설악, 오대 그리고 저 남쪽의 태백까지 잇는
험준한 이 나라의 허리 태백산맥이 푸른 산으로 자하(紫霞)를 입고 있다.
신라 문무왕 시대의 의상(義湘)스님이 귀국 직후 창건한 절이다.
문무왕이라면 동해에 그의 왕릉을 지정할 정도로 신라 사직과 불교를 함께 숭상한,
불교적인 너무나 불교적인 왕이었다.
그 왕조의 한 불교 지도자는 동해의 관음수기(觀音授記)를 받고 절을 세운 것이다.
.... 일연(一然)의 ≪유사(遺事)≫는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조에서 그런 의상을 극히 고대의 종교적 체험으로 서술하고 있다.
의상은 귀국 직후 동해 바닷가의 석굴 안에 대비(大悲) 관세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그곳을 그는 낙산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불교의 인지(因地)인 서역에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7일 동안의 기도를 회향하자 용천팔부시중(龍天八部侍衆)이 그를 굴 안으로 인도했다.
거기서 하늘과 바다의 용이 준 수정 염주 한꾸러미와 여의주 한 알을 얻고 다시 7일 동안 기도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진신(眞身)으로서의 관세음보살을 만날 수 있었다.
낙산사의 옛 모습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낙산사는 그 이름이 이름난 것만큼 웅장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초라하다 할지언정 그 절은 동해를 등지고 있지 않은가.
많은 절이 명산의 주봉을 등에 지고 있는 것처럼 낙산사는 광겁(曠劫)의 바다 동해를 등지고
어떤 초라한 기왓장으로도 관세음보살의 대가람이라고 할 수 있게 부유한 것이다.
그 휑뎅그렁한 마당의 마른 흙, 그리고 관음죽(觀音竹)이 있던 곳에 솟아오른 늙은 해송들의 솔바람 소리,
절 경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동해 일망무제의 의상대, 그리고 조산(造山) 해수욕장의 빈 모래밭,
이런 것으로 여행자는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
.... 그러나 낙산는 무엇보다도 낙산사를 세상에 떨치게 한 조신(調信) 스님의 '꿈'이다.
그것은 이광수 소설 <꿈>이 풀어놓기도 했지만 그 꿈이야말로
불교의 무상관(無常觀)을 잘 알려주는 대설법이다
조신 스님은 아마도 여행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애욕에 연연하고
우스꽝스러운 세속 인연에 급급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온몸으로 설법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 다시 돌아다본다.
금강산에는 장안사, 유점사, 신계사들이 내외 금강에 자리 잡고 설악산에는 신흥사, 백담사 등이 있다.
오대산에는 월정사, 상원사가 있다.
그 산줄기로 내려가면서 헤아릴 길 없는 사암(寺庵)들이 산기슭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동해를 바라보면 동해 낙산사도 없고 의상대도 없는 것이다.
.... 여행자여,
그대 혼자 가도 좋다.
그러나 낙산사에는 그대가 낳아서 가난하게나마 길러낸 아들과 딸들을 데리고 가면
그것처럼 좋을 수 없는 것이다.
동해는 그런 여행자를 아주 친절하게 맞이하면서 동해의 지혜를 선사한다.
동해는 외로운 여행자에게는 그 자신의 외로움을 더할 뿐 더 큰 것을 감춰버린다.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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