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경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짐을 챙겨 들고 나섰다.
결정에서 실행까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에 시동을 거는데 상쾌한 바람이 나를 묵적지까지 데려다 놓을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나는 바람에 떠밀려 가면서 오랜만에 깊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혼자라서 좋은 건 바로 이런 때다.
가사와 육아로 힘들어하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결혼을 반납하고서라도 다시 찾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자유라고,
누구에게도 제한받지 않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
한 번 잃고 나면 다시는 찾기 어려운 싱글의 자유를 아직까지 내가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이 참 경이로웠다.
'혼자'라는 단어는 상태에 대한 정의이지 감정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혼자라고 하면 으레 '외로움'과 동일시한다.
그건 마치 '결혼'이라는 상태와 '행복'이라는 감정을,
'실직'이라는 상태와 '괴로움'이라는 감정을,
'가을'이라는 상태와 '쓸쓸함'이라는 감정을 똑같이 의식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상태는 상태이고 외로움,
행복,
괴로움,
쓸쓸함은 그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태를 곧 감정인 것처럼 착각하고 빠져드는 오류를 범한다.
게다가 사람에겐 내가 집중하고 있는 것만 보게 되는 묘한 구석이 있다.
혼자라서 쓸쓸하다고 생각하면 쓸쓸한 이유만 떠오르고,
혼자라서 좋다고 생각하면 좋은 이유만 두서없이 솟아오른다.
그러니 굳이 우울한 상황에 내 생각을 고스란히 쏟아 놓을 필요가 없다.
창문을 열고 속력을 냈다.
갈 곳을 정하지 않고도 길을 따라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우리는 언제나 목적지를 정해야만 시동을 거는 인생에 익숙하니까.
동해안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로 가 볼까.
안면도로 빠져 석양을 보고 올까.
아니면 별빛 쏱아지는 강원도의 밤을 지내고 채식으로 차린 아침 정찬을 먹을까.
단꿈을 꾸듯 표류하는 상상력에 미소가 떠올랐다.
혼자라는 건,
최고의 선택인 거야.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p120)
허밍버드 / 201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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