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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자기혁명/세상의 모든 문제는 내게서 출발하고, 그 답 역시 내 안에 있다.

by 탄천사랑 2021. 8. 25.

박경철 / 「자기혁명

 

 

방황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모든 방황에는 이미가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고민하며 방황하고 노력하는 것은

바른 길을 찾기위한 여정이다.  인생은 고민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계속 방황하며 노력하는 것,

주저앉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실존이고 나의 삶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파우스트(Faust)에서 신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지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금하지 않겠노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

 

여기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라는
이 마지막 구절은 파우스트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괴테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이 욕망과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할 수밖에 없는 선(善)'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악마 메피스토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언제나 악을 원하면서도 언제나 선을 창조하는 일부분'이라고 답하기도 한다.
역시 전율스러운 문장이다.

 

방황은 노력의 다른 이름이다.

주인공 파우스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 자연의 이치까지 꿰뚫었지만,
지식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절망과 한계에 부딪힌다.
그는 이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악마와 계약을 해서 '젊음'을 얻고,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순수한 여인의 '사랑'까지 얻게 된다.

 

하지만 행복이란 언젠가 다가올 불행의 전주곡에 불과한 것!
악마는 이 사랑을 비극적 결말로 유도하고,  파우스트는 다시 좌절하게 된다.
이때 사랑 다음으로 그를 유혹한 것은 '욕망'이었다.
그는 또다시 악마의 도움으로 이번에는 욕망의 대상인 그리스 최고의 미인 헬레나와 권력을 얻지만,
악마와의 계약이 파놓은 함정에 다시 빠지고 만다.

 

이렇듯 탐욕은 늘 비극을 잉태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어리석음과 방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구원을 받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방황은 노력의 증거'라는 것이다.
생의 과정에서 온갖 유혹에 의해 무너지고,  죄를 짓고,  심지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은  '노력하는 한' 구원의 길(올바른 길)을 찾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다.

 

인생에서 방황은 곧 시행착오일 뿐인데 우리는 이것을 죄악시하곤 한다.

방황은 죄악이 아니다.
인간에게 방황이 없다는 것은 나아가려는 의지가 없다는 말과 같다.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며,  그 욕망은 더 나아지려는 의지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방황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험이며 그것을 넘어선 것이 성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험난하더라도 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이다.
순간을 쉽게 모면하기 위해 타협하거나 우회하면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갇히게 된다.
한계를 회피하려는 유혹은 악마의 키스처럼 유혹적이다.
하지만 여기에 말려드는 순간 우리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 신세가 된다.

 

즉 욕망은 개선을 위한 의지인 동시에 자칫하면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제단 위에 자신의 피를 뿌리는 어리석은 충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순한 욕망의 좌충우돌은 생에 대한 모독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결과만 보고 과정을 무시하며 달리는 사회적 환경은 우회와 타협의 결과다.
국가는 잠재성장율(정상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성장잠재력)을 넘는 GDP 성장율을 목표치로 내세운 후,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몇몇 대기업에 국가의 자원을 집중 배분하고 토목사업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경제성장율을 달성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곳에 가야 할 자원, 사회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 투자해야 할 자원들이
모두 한곳에 집중됨으로써 성장율이 높아졌음에도 정작 국민은 불행해졌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단지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만 움직인다면 당장 임금과 고용을 줄이고

사회에 대한 공헌을 외면하면 국가 권력과 결탁해 불법과 탈법을 서슴지 않게 된다.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 역시 단지 살아남기 위한 경주를 벌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과정은 언제나 무시된다.
학교는 교육을 포기한 채 입시를 향해 질주하고,
학생들은 생존을 위해 대학, 취업, 승진, 성공과 같은 허울 좋은 목표만 좇는다.
사회 전체가 헬레나의 입술을 얻기 위해 악마와 계약한 파우스트 박사의 아바타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것이 방황이 죄악시된 이유다.
'뭘 그리 고민하냐?
 적당히 눈감고 넘어가면 되지'라는 악마의 목소리에 따르는 것은 방종에 불과하지만,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내려는 방황은 아름다운 것이다.
남이 가는 길을 가면 편안하지만 종속되고,  새로운 길을 가면 험난하지만 독립적으로 서게 된다.
우리는 우주 그 자체이지 결코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내게서 출발하고,  그 답 역시 내 안에 있다.

 

그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고민하며 방황하고 노력하는 것은 바른 길을 찾기 위한 여정이어야 한다.
고민이 없다면 당연히 방황도 없다.
우리가 캄캄한 동굴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때로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고 때로는 발목을 접질리더라도 출구를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만 한다.
물론 그 결과 더 깊숙한 미로 속에 갇힐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서워 그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닌다.
그런 이유로 파우스트 박사처럼 겉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갖춘 듯한 사람도 나름의 고민으로 방황한다.
고민과 방황은 마치 숨 쉬고 밥 먹는 것처럼 우리와 함께한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방황하며 노력하는 것,  주저 않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삶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다.

대신 노력하지 않는 방황이나 방종,  즉 욕망의 좌충우돌은 생에 대한 모독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며 황무지를 여행하는 것만이 진정한 방황이다.
그 과정에서 살이 찢어지고,  고름이 흐르고,  굳은살이 박혀 나무껍질처럼 단단해질 때,
비로소 온전한 내가 세워지는 것이다.
고민을 두려워 말자.
그리고 우리 마지막 순간까지 방황해보자. (p20)

 

 

박경철 /  자기혁명

리더스북 / 2011. 1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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