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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로 성공적인 삶을 살던 마리아는 공황장애로 인해 빌레트에 입원 중
남편으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고 방황하지만 시한부 죽음을 피아노를 치며 달래던
베로니카의 연주를 들으며 아이들이 있는 세상으로 돌아갈 희망을 품고 준비를 시작한다.
이고르 박사는 힘든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보람은 있었다.
과학자로서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지키고 싶었지만,
터질 듯한 기쁨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비트비올 중독의 치료와 관련된 테스트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오늘은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데요."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온 마리아에게 그가 한 말이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사실은 박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왔을 뿐이에요."
"오늘은 다들 의견만 물으러 오는군."
성(性)에 관한 베로니카의 질문을 떠올리며 이고르 박사는 생각했다.
"에뒤아르가 금방 전기쇼크를 받았어요."
"전기경련 치료지요.
부탁건대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주세요.
누가 들으면 우릴 야만인으로 알겠어요."
이고르 박사는 놀라움을 감추면서
그 짓을 한 녀석을 나중에 찾아내어 혼쭐을 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 주제에 관해서 내 의견을 듣고 싶으시다구요.
요즘에는 TEC를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시행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위험한 치료법이에요."
"아주 위험하죠.
예전에는 적절한 전압도,
전극을 꽂아야 할 적절한 위치도 몰랐어요.
그래서 치료 도중에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한 환자들도 많았죠.
......
자,
내 의견을 모두 말씀드렸으니,
이젠 다시 일을 해야겠군요."
마리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박사님께 여쭤보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에요
사실은,
제가 여기서 나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어요.
하지만 부인은 항상 되돌아오셨죠.
부인 자신이 그걸 원하고,
부군께서 이처럼 비용이 많이 드는 병원에 부인을 의탁하실 정도로 아직은 돈이 많으시니까요
모르긴 해도 부인은 오하려 '제가 나았나요?'라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난 부인께 '무슨 병이요?'라는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겠어요.
그럼 부인께선
'공포증이요. 패닉 신드름이요'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럼 난 다시 부인께 말하겠어요.
그건 삼 년 전에 이미 사라졌어요'라고."
"그럼 전 나은 거군요."
"물론 이니죠.
부인의 병은 그게 아닙니다.
슬로베니아 과학아카데미아에 제출하기 위해 지금 쓰고 있는 논문에서
(이고르 박사는 비트리올에 관한 세세한 내용까지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난 소위 '정상적'이라는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
단추를 셔츠 앞쪽에 다는 것은 논리의 문제겠죠.
단추들을 옆에 달아놓는다면 채우기가 아주 어려울 테고,
등뒤에 달아놓는다면 아예 불가능할 테니까요.
하지만 다른 것들은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그래야만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정상으로 치부되는 겁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죠.
타자기 자판의 문자들이 왜 그런 식으로 배열되어 있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의문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요."
....
"피렌체에 가보셨나요?"
이고르 박사가 물었다.
"아니요."
"한번 가보세요.
멀지 않아요.
이제 두 번째 예를 들죠.
피렌체 성당에는 1443년 파올로 우첼로가 디자인한 아주 아름다운 시계가 있어요.
그 시계에는 한 가지 신기한 점이 있죠.
다른 모든 시계들처럼 시간을 가리키기는 하는데,
시곗바늘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요."
"그게 제 병과 무슨 상관이 있죠?"
"들어보세요.
파올로 우첼로는 독창적인 시계를 만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
아마 피렌체의 공작한테 오늘날 우리가
'옳은' 방향이라 부르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시계가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결국 그런 시계가 유일한 것으로 자릴 잡고 말았어요.
그러자 우첼로의 시계는 하나의 탈선,
광기가 되어 버린 거죠."
이고르 박사는잠시 뜸을 들였다.
그는 마리아가 자신의 추론을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부인의 병으로 돌아옵시다.
개개의 인간은 유일해요.
자기 자신만의 자질,
본능,
쾌락의 형태,
모험을 추구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사회는 집단적인 행동 양식을 강요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게 되죠.
그들은 그걸 받아들여요.
타자수들이 아제르티 자판이 최선의 자판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 들었듯이.
시계바늘이 왜 왼쪽이 아니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미친 사람 아냐!'라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
자,
이제 부인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죠.
다시 한번 말씀해보세요."
"제가 나았나요?"
"아니요.
부인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다른'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닮기를 원하죠.
그건 내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르다는 게 심각한 병인가요?"
"모든 사람과 닮기를 자신에게 강요하는 게 심각한 거죠.
....
하지만 부인은,
부인이 다르다는 걸 미친 걸로 생각하죠.
그래서 빌레트에서 지내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여기서는 모두가 다 다르기 때문에,
부인은 모두와 닮아 있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과 다른 존재가 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의 순리에 역행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체는 비트리올
(혹은 사람들이 속되게 부르는 식으로 말하면, 아메르튐)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죠."
"비트리올이 뭔가요?"
이고르 박사는 자신이 잠시 흥분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서둘려 화제를 바꾸었다.
※ 이 책에서 말하는 이고르 박사의 비트리올은,
.......
이런 식으로, '정상적인' 사람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성적 일탈행위를 다른 그 유명한 논문
(그 논문에는 그 외에도 파트너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 자신이 오르가즘을 누릴 각 개인의
권리를 옹호했다)에 기순된 성적 환상들을 털어놓았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를
한 여자들은 능욕당하기를 꿈꾸었고, 정장과 넥타이 차람의 고위 공무원들은 오로지 발바닥을
핥기 위해 루미니아 창녀들에게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고 고백했다.
소년들은 소년들을 좋아했고, 소녀들은 학교 친구들과 사랑에 빠졌다. 남편들은 외지인이
제 아내를 범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고, 아내들은 남편에게서 간통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자위를 했다. 가정주부들은 초인종을 누르는 첫번째 배달원에게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다스려야만 했고, 아버지들은 국경의 엄격한 검문을 가까스로 통과한 흔치 않은 여장남자들과
나눈 은밀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p178)
"비트리올이 무엇이든 그건 중요치 않아요.
내가 말하려는 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부인이 아직 낫지 않았다는 겁니다."
마리아는 다년간의 법정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즉시 그걸 활용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첫 전략은,
또 다른 추론을 전개할 때 상대방을 손쉽게 함정으로 몰아넣기 위해 우선은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는 척하는 것이었다.
"제 생각도 박사님과 같아요.
저는 패닉 신드름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이유로 이곳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직업도 남편도 없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자신이 없다는 아주 추상적인 이유로 결국 이곳에 머물렀죠.
사실이예요.
저는 제 삶을,
또 다시 하나하나 습관을 들여야만 할 새 삶을 다시 시작할 의욕을 상실했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기쇼크(죄송해요) 박사님이 원하시는 대로 TEC라고 해두죠.
......
그런데 지난밤,
한 여자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어요.
흔히 들을수 없는 훌륭한 연주였죠.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서,
저는 그 소나타,
그 전주곡,
그 아다지오 들을 작곡하기 위해 고심했을 사람들을 생각했어요.
당시 음악계를 지배하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든 작품들(모두 유니크한)을 선보였을 때,
그들은 분명히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당했을 거예요!
난 누군가가 재정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나서기 전에 그들이 맞닥드려야 했을 생활고,
쓰디쓴 모멸감,
그들이 창조해낸 새로운 하모니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청중들이 보냈을 아유를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바로 이 생각이었어요
'저 곡들을 만드느라 작곡가들은 고통을 당했고,
저 아이는
자기가 곧 죽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온 영혼을 바쳐 저 곡들을 연주하고 있어,
그럼 나는,
나 역시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 아닌가?
나 역시 내 삶이라는 음악을 저토록 열정적으로 연주할 수 있길 바라는데,
난 내 영혼을 어디다 내팽겨쳐 버린 것일까?"
이고르 박사는 입을 다물고 듣고만 있었다.
" ....
말씀하시는걸 들으니 많이 좋아진 것 같군요."
이고르 박사가 지적했다.
"저는 빌레트를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었어요.
문을 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모든 걸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어요.
그리고 박사님이니까 말씀드리는 건데,
그 아이의 머지않은 죽음이 저로 하여금 제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많이 좋아진 게 아니라 기적적으로 완쾌되셨군요.
그래,
앞으로 뭘 하실 작정인가요?"
이고르 박사가 웃으며 말했다.
"엘살바도르에 가서 아이들을 돌볼 생각이에요."
"그렇게 멀리까지 가실 필요 없어요.
사라예보가 여기서 이백 킬로도 되지 않는 곳에 있어요.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죠."
"그럼,
사라예보로 가도록 하죠."
이고르 박사는 서랍에서 용지한장을꺼내 꼼꼼히 채우고는 마리아를 문까지 배웅했다.
"행운이 따르기를."
그가 말했다.
그는 곧 문을 닫고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좀처럼 환자들에게 애착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아의 경우만은 어쩔 도리가 없이 마음이 간다.
빌레트에선 다들 한동안 마리아를 그리워할 것이었다. (p212)
※ 이 글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파울로 코엘료 /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역자 / 이상해
문학동네 / 2001.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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