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신기루이며, 구름의 성,
꿈이요, 환영인 줄을.
본질은 없고, 보이는 성질만 가지고 있는 것.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달이 호수로 옮겨간 일이 없는데도
밝은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비친 것과 같음을.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메아리는 음악에서 소리와 흐느낌을
얻어 지니지만 그러나
메아리 속에는 멜로디가 없다.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마술사가 말과 황소와 수레와 또 다른 것들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는 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사마디라자수트라
불교의 중심요소 중 하나는 수냐타, 즉 공(空)의 철학이다.
나는 처음에는 이 개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몇년 동안 타시 랍기아스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분명해졌다.
"말로 하기는 쉽지 않고 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라고
그가 한번은 내게 말했다.
"그것은 깊은 생각과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순한 방법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아무것이나 예로 들어봅시다. 나무같은 것으로요.
나무에 대해 생각할 때 당신은 그것을다른 것과 구별하여 분명하게 정의된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어떤 수준에서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차원에서는 나무는 독립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관계의 그물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립니다.
잎사귀에 떨어지는 비와 나무를 흔드는 바람과 그것을 받쳐주는 땅이
모두 나무의 한 부분을 이룹니다.
생각을 해보면,
궁극적으로는 우주 속의 모든 것이 나무를 나무로 만들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립될 수 없습니다.
그것의 본성은 순간순간 변합니다.
그건 한 순간도 똑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공(空)의 의미입니다.
사물이 독립된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불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도 않고,
어떤 식으로든 염세주의를 장려하지도 않는다.
그 반대로 불교는 우리가 일단 우주의 본성을 이해하면, 바깥의 일들의 덧없는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한 행복을 깨달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무지(감각과 개념화를 통한 세계 경험)가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고
항구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상적' 세계 너머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이런 '무지한' 방법으로 보기를 고집하는 한,
우리는 삼사라, 즉 존재의 바퀴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불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새상의 '존재'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사물을 자각하는 한 사물은 실제로 존재한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고 숨쉬기 위해 공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무엇에 중점을 두는가이다.
우리의 감각이 인지하는 세계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관점으로 보라는 것이다.
부처는 우리의 감각과 한계가 만들어낸 이 세계 너머에서는 현상의 세계가
역동적인 과정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린다고 가르쳤다.
실제의 진정한 본질은 언어와 선형적 분석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이다.
타시는 저명한 학자 나가르쥬나(龍樹)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존재를 믿는 사람은 소처럼 어리석다.
그러나 비존재를 믿는 사람은 더 어리석다.
사물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둘다가 아닌 것도 아니다"
우주는 끝없는 강과 같다고 한다.
그 전체는 변하지 않지만 동시에 그것은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 있다.
전체로서 강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말할 수 없다.
흐름을 멈추고 조사해볼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움직임속에 있고 분리해낼 수 없이 얽혀 있다. -p85-
...
"무지가 있는 한 의식이 필요합니다"라고 스타크나 승원으 우두머리 라마승이
나에게 말한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수준의 영적 발달에 도달하고 나면
버려도 되는 사다리 같은 것입니다"
라다크에서 풍성한 행사와 의식은 종교적 수행에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겉보기만큼 중심적인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라다크에서 불교의 가장 심오한 표현은,
가장 단순한 놈부에서 많은 교육을 받은 승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한결 섬세한 가치관과 태도에 있다.
삶에 대한(그리고 죽음에 대한)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무상(無常)함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와 그에 따른 집착의 부재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나는 나의 라다크 친구들에게서 이런 태도를 되풀이해서 보아왔다.
사물이 어떠해야 된다는 생각에 매달리기보다 그들은 복되게도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추수를 하는 도중에 눈이나 비가 와서 여러 달동안 애써 잘 보살핀
밀이나 보리를 망치는 일이 있다.
그래도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의 곤경에 대해 농담을 하며,
전혀 심란스러워하지 않는다.
죽음조차도 비교적 쉽사리 받아들인다.
내가 라다크에 가 있은지 두번째 해에 나의 좋은 친구 하나가 두달된 아기를 잃었다.
나는 그녀가 제 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분명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는 몹시 슬프기는 하지만 윤회를 믿기 때문에
죽음은 서구인에게 그런 것과 같은 완전한 종말의 느낌을 주는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라다크 사람들의 실재개념은 순환, 즉 끊임없는 회귀이다.
이번의 삶이 유일한 기회라는 느낌은 없다.
죽음은 끝인 만큼 시작이기도 하다.
죽음은 하나의 태어남에서 다음의 태어남으로 가는 과정이며,
최종적인 해체가 아니다.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명상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깊은 명상은 승원 밖에서는 별로 행해지지 않지만
사람들은 상당한 시간을 준명상적 상태에서 보낸다.
특히 나이든 사람들은 걷거나 일을 하면서 진언을 왼다.
흔히 대화중에도 진언을 한마디씩 넣는다.
말을 하다가 어조를 바꾸지도 않고 한숨에 '옴 마니 밧메 훔, 옴 마니 밧메 훔" 한다.
최근 서구에서의 연구에 따르면,
전체성이나 패턴을 지각하는 의식형태가 명상 속에서 커진다고 한다.
이것이 라다크 사람들의 전일적인, 혹은 전체적 인 맥락을 중시하는 세계관
(불교의 가르침에 관해 별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특징적으로 갖고 있는 세계관)
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라다크의 언어도 불교의 흔적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서구언어와 비교해도
라다크 말은 상대성(相對性)에 더 큰 강조를 두는 것 같다.
그 언어는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전후맥락을 더 중시하도록 만든다.
특히 놀라운 것은, 동사 '이다, 있다'는 특정한 상황에 따라서,
특히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주제에 대한 상대적인 친밀도에 따라서
스무가지나 되는 변형을 가지고 있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직접 참여하지 않은 일은
무엇이든 그들의 지식이 제한된 것임을 나타내는 동사를 사용하여 묘사한다.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만일 누구에게 "그 집이 큽니까?" 하고 물으면,
그 사람은 아마도 "제가 보기에는 컸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직접 경험을 한 경우에도 그들은 우리처럼 분류하고 판단하려고 하지 않는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빠른 것과 느린 것,
이곳과 저곳이 현저하게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라다크 사람들은 예컨대 정신과 육체,
이성과 직관을 근본적인 대립의 관계로 보지 않을 것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세계를 그들이 '셈바'라고 부르는 것
(번역하자면 '마음'과 '가슴'의 중간)을 통해 경험한다.
이것은 지혜와 자비심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p93-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
역자 / 김종철 / 김태언
녹색평론사 / 1996.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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