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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몫의 열쇠 하나와 아내의 外出

by 탄천의 책사랑 2021. 7. 1.

김용범 / 「슈베르트 마을의 우편 마차(고려원시인선 19)」

 

 

슈베르트 마을의 우편 마차(고려원시인선 19) - 고려원 1992. 03. 01.

 

내 몫의 열쇠 하나와 아내의 外出

가끔 나는 나의 집 문을 열지 못해서 복도 끝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빌라 근처의 숲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外出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때가 있다.

몇 시간이고 복도의 끝에 앉아 아내와 아이의 외출을 생각하곤 한다. 
나는 그런 기다림에 익숙해져 있다. 

차라리 닫혀 있는 문 앞에서 가족들을 기다리는 시간은 행복한 것인지 모른다. 

내가 내 몫의 열쇠를 지니고,  
그 텅 빈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 토요일 오후를 온전히 보내기보다는 
닫혀 있는 문 밖에서 두 세 시간쯤 말뚝처럼 앉아 있는 것이 아름답다고 믿기로 했다. 
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몫의 열쇠를 지니지 않기로 했다.   

 

 

호른과 天使
큰 아이는 天使의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의 서랍엔 작년 크리스마스에 받은 카드 한 장이 담겨 있고 
카드 속의 천사는 하프와 호른을 불면서 큰 아이의 꿈속을 활발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큰 아이는 호른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옥타브쯤 낮은 음역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아내와 작은 딸과 내가 산비탈 채마밭에서 삽날을 꽂으면서 
꽃상추의 모종을 심기 위해 땅을 고르는 동안 단조로운 스케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채마밭의 상추는 천사의 음악처럼 연한 잎을 돋아 올릴 것이고
우리는 오랜 동안 알렉산더 실버의 音色만큼 平和로운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와 일요일 오전의 피구
초조할 때 피우는 담배만큼이나 음악은 안정을 준다.
정신의 한쪽 들녘을 쓸쓸한 들판을 만들며 그 들판 가득 흰 눈을 뿌리는 겨울 풍경. 

아이들은 일요일 아침 골목을 막고 피구를 즐기고 있었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무리 지어 공을 피해 다니면서 깔깔 웃고 있었다.

흰 눈이 내리는 들녘의 쓸쓸함을 만드는 것은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이거나 러시아 음악가들의 음악이다.
그렇게 우린 마음의 들녘을 만든다.

그 들녘에서 우리들의 아이들이 경쾌한 피구를 즐기는 환상.
일요일, 12월의 둘째 일요일이었다. 

 

 

강만홍, 다시 나타남
그는 뉴옥의 어느 허름한 모자가게에서 산 낡은 중절모를 쓰고 나타났다.
라마마극장의 낡은 의자처럼 언제나 그의 구레나룻은 익숙했다.

가을날이었다.
우린 값산 담배를 나누어 피면서 귀국 첫 공연에 대해서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등나무 밴취에선 가을 햇살 몇개가 흩어져 있었고,
시청의 비들기들이 아주 한가롭게 햇살을 빼어 물고 날아가고 있었다.

오래전 그가 무명의 연극배우이던 시절,
태영이 형의 조용한 방을 보았던 용산 미 8군 극장에서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아니면 문득 예수가 되었던 인도 유학 후의 슈퍼스타.

그리고 다시 남루한 행랑 하나와 낡은 중절모자를 쓰고 그는 빛나는 예지의 바람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1월 그의 공연을 나는 종내 가볼 수 없었다.

그날 오후,
나는 긴급한 보고서 몇장을 위해서 시간 외 근무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설


시인, 그 存在의 막막한 슬픔 박상천 

김용범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즐겁다.
그의 시를 읽으면 슬픔이 진정한 슬픔으로,  막막함이 진정 막막함으로 느껴진다.

시라는 것이 사실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요.
이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로 많은 이들이 시를 통해 자신의 사고를 전달하려고 애씀으로써
시를 읽는 즐거움을 빼앗아 가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 속에서 김용범의 시를 만나고 그의 시를 읽는 일은 크나큰 즐거움이 된다.
그는 시의 비밀을 알기에 스스로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언어를 가지고 인간 존재의 내면의 슬픔과 막막함을,
그리고 시대의 슬픔과 그 막막함을 이미지로 보여 줄 뿐이다.
슬픔과 막막함이 어디 논리로 설명되고,
그 막막함이 어디 일상의 언어로 다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시만이 진정한 슬픔과 막막함을 맛보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시는 설명되지 않는 삶을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며
그러한 삶의 새로운 체험이 바로 시가 추구하는 삶의 진실이 아닌가.

막막함을 막막함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김용범의 시가 지닌 힘이며 그의 시를 읽을 때 가지게 되는 즐거움의 근본 이유가 된다.

김용범의 시에는 새롭게 체험되는 언어의 힘과 그 힘으로부터 비롯된 시를 읽는 즐거움이 있다.  
그의 시가 이러한 힘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김용범의 시적 창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에 바탕을 둔 시의 창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김용범 시에서의 역설과 아이러니는 
대개의 경우 이러한 두 세계관의 긴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허상과도 같은 이 현실 세계의 삶을 사랑하고,
그러나 저 이상 세계를 끝내 버릴 수 없는 시인의 이 세상을 사는 '막막한 슬픔'을 김용범의 시에서 만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 존재가 다 안고 있는 비극적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섬세한 감각의 시인 김용범이 언어로 빚어낸 

그러한 '막막한 슬픔'은 진정 막막한 슬픔으로 우리들에게 체험되어 삶을 재인식하게 하고, 
새롭게 삶을 지각하게 해주는 것이다.

- 필자, 시인 / 한양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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