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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스물다섯 살에는 생이 변하는 순간과 떠나가는 순간,

by 탄천사랑 2021. 6. 27.

전경린 / 「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1

 

 

-사랑했던 여자 아닌가요?
-사랑이란 동시성을 잃고 시간 밖에서 생각하면 늘 그렇듯이 의심스러운 거요.
 그건 어느 시기에 두 사람의 발이 한데 묶였던 어떤 사건일 뿐인지도 몰라.
 발이 풀리고 난 뒤에 생각하면 그런 공속은 아무런 실제성도 없어요
 에테르처럼 증발되어 버리지.
 두 사람이 사랑했는데도 추억 속엔 자신밖에 없어

 자신조차도 어딘가 변형되고 과장되어 있어.  서글픈 모노드라마지...,

-그 여자는 왜 떠났을까요?
 집을 이렇게도 빈틈없이 채워놓고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지 않다면 내가 아직도 이렇게 기다리고 있겠어?
 그녀는 나를 위해 아파트를 얻고 
 미친 듯이 살림을 사들여 집을 빈틈없이 채운 뒤에 갑자기 사라졌어.
 첫날은 나에게 화가 나서 나갔나 보다 생각했고  다음 날은 교통사고가 난 게 아닐까 생각했고
 셋째 날은 다른 남자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어.
 그리고 넷째 날엔 슈퍼마켓에 다녀오다가 슈퍼마켓과 집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블랙홀에 빠져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지.

-몹시 상심했군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해 무엇 하느냐는 뜻 같았다.
입을 다물고 눈을 내려 뜨자 그의 얼굴 윤각은 마음이 얼어붙도록 완벽했다.

-그녀가 돌아와야 해.  난 떠난 이유를 굳이 묻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  그녀가 돌아오면 떠날거야.

-어디로?
-어디든....,  이스탄불이나 케냐 같은 곳, 상하이나 아리까, 그라나다 같은 곳.
-아리까가 어디에 있어요?
-페루에 있지
-어디를 가장 가보고 싶어요?
-그런 곳은 없어. 

 어디에 가든 상관은 없어.

 떠난다는 게 문제일 뿐.
...
저녁을 먹고 돌아와 몹시 슬프게 느껴지는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들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엄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이 주제가 된 곡이야.

브람스가 끝나자 그는 자신이 편집해 녹음했다는 테이프를 넣었다.
<캐리 온>이 흘려나오고 <올드 맨 송>과 <심풀 맨>, <노킹 온 해븐스 도어>,
<스트리트 오브 필라텔피아>,<블로잉 인 더 윈드>, <위쉬 유 워 히어>가 흘려나왔다.   
요즘은  아무도 듣지 않는 오래된 노래들이었다.

-오늘은 엄마가 죽은 날이야.
 5주기야.  혼자 보내기도 싫었지만,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과 보내기도 싫었어.
 이해할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모르는 사람만이 위로가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함께 있어 주어서 정말 고마워.
나는 음악을 다시 브람스로 바꾸었다.
교향곡 4번은 제사에 꼭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 p1/76 -


--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식은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지 않아 달큰한 쉰내가 났다.
고단하고 외로운 냄새였다.  싫지 않고 오히려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깊은 곳의 살 냄새처럼,  나는 그의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수염이 얼굴 피부를 부드럽게 찔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유경이 긴장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단추를 하나하나 풀고 등 뒤로 손을 돌려 브래지어의 훅을 열었다.
그는 망설이며 나의 가슴 위에 얼굴을 가만히 놓았다.
어찌나 슬퍼 보이는지 가슴 위에 눈물이라도 떨어질까봐 아슬아슬했다.
나는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안고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슬퍼 보이니?
-지난 3일 동안 뭘 했니?   

  무슨 일 있었니? 

  자세히 이야기를 해 줘!.  

이진의 키스가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도 곧장 오겠다던 약속을 까마득히 무산시키고 나에게 그렇게 냉담했다니,
 이상해.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도 상냥하게구니...,

-네게 냉담했던 게 아니야. 

 나에게 냉담했던 거야.  
 가끔 나 자신에게 완전히 무관심해져 버리거든.

 일종의 자기 방어인지도 몰라.
 오늘은 아침에 잠이 깼을 때 미칠 것 같이 네가 그리웠어.
 
그는 고개를 숙이고 여러 개의 아주 작은 단추를 입술로 풀려는 듯 유두를 핥았다.
유경의 머리에서 나는 짙은 체취가 프리지어의 새벽 풀밭 같은 싱그러운 냄새와 뒤섞였다.
창으로 들어온 오후 네시의 환한 빛이 그의 등과 나의 가슴에 쏱아지고 있었다.
나의 눈 속도 하얀빛으로 가득찼다.

그는 나의 바지를 벗기고 팬티도 벗긴 뒤 가만히 바라보았다.

-배를 완벽하게 반으로 나누어 놓은 것 같아...,
-배를?
-응, 아주 단단하고 속이 희고 신선한 배.
-왜 하필 배지?
-모르겠어. 왠지 배가 떠올라.
그는 코를 한번 누른 뒤 가만히 옆얼굴을 댔다.

-네가 준 흙 화분 속에서 히야신스가 피었어.
-..... 보러가야겠네.
-향이 아주 짙어.  거의 향수를 엎지른 듯해.  - p1/194 -

--
-언젠가 우리가 알 수 있게 될까?  서로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유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우리는 근친상간을 두려워하는 남매 같았다.
눈을 꼭 감고 누워 있으니 우리의 머리와 얼굴 위로 동시에 떨어진 

같은 꽃잎들이 어둠 속에서 분분히 흩날렸다.
나는 이곳에 온 것을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젠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물다섯 살에는 생이 변하는 순간과 떠나가는 순간,
그리고 영원히 머무르는 순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p1/232 - 




전경린 /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1
생각의나무 / 2001.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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