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2」
나는 손가락으로 유경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내가 언제부터 너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아니?
-처음 본 날이겠지?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사랑은 말이야.
처음부터 시작돼, 탄생과 함께.
그러니까,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만날 사랑을 키우면서 성장하는 거야.
그런 느낌, 그런 손의 촉감, 그럼 냄새, 그런 눈빛, 그런 손의 형태,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
그래서 어느 날 사랑에 빠지면
그 모든 것이 옛날에 일어났던 어떤 기억을 일깨우는 것 같이 전율이 일지.
-사랑 지상주의자 같이 말하는 구나.
-이건 분석인 뿐이야.
그래서 사람은 일생 동안 사랑을 발견하려고 해.
자기 속에 묻혀 있는 사랑을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은 합리적인 갈망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본능이지.
-왜 그런 생각을 했어?
- ..... 오래전에 너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내가 뱃속에 과일 씨눈처럼 박혀 있었을 때도, 다섯 살 때에도, 열두 살 때에도,
사랑은 그렇게 모여들어서 어느 날 딱 마주치는 거야.
유경은 나를 안았다.
-그런 걸 확신할 수 있어?
-아니, 그냥 흐릿한 느낌이야. 아주 먼 곳에서 감지되는, 심장의 아픔같이,
그러니 이렇게 안는 거야.
유경은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 p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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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사랑에 대한 과대망상 따윈 없다.
삶이 그렇듯 사랑 역시 매우 사적이고 애매하고 미결정적이며,
성향에 따라 운명에 따라 깊이도 형태도 비중도 천차만별인 것이다.
진실이나 거짓, 품위와 욕망, 고급과 저급, 물질과 정신, 이성간과 동성 간,
이중 연애와 삼각관계,정상적인 것과 도착적인 것, 고상한 것과 음란한 것....,
삶이 깊어지면 개념은 없어진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규정된 관념이 아니라 그 너머 저마다의 낯선 벼랑길을 걷는다.
그래서 생은 여전히 미확인적인 유혹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 p2/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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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류이든, 욕망에 빠져드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넘쳐보지 않고는, 자신을 바닥까지 뒤집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이제 스물다섯 살을 훌쩍 지나 서른 살이 되었다.
그리고 머리에 물그릇을 인 여자처럼 많이 조심스러워졌다.
우아함이란 존재의 여분에서 생겨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거리를 유지하면서 만나는 한가한 즐거움도 알게 되었으며,
상처를 최소화하여 흔들림 없이 살아남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전에는 예외적인 특별한 경험만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든 하루하루가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하루하루가.
...
운명은 매듭을 지을 수 없다.
그리고 사소한 순간에 풀려버리는 그물코....,
새로운 니트의 본을 만들 때면 나는 늘 레이스 마을의 풍경 속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옷을 만드는 동안 긴 오르막 길을 당나귀와 함꼐 올라가는
단 한 명의 레이스 마을 주민이 된다.
그 레이스 마을 주민은 황무지의 환으로부터 생겨나
다시 거대한 황무지로 명멸해 갈 자신의 은밀한 삶과
신기루 같은 육체에 이따금 전율과 같은 애정을 느낀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열 손가락을 활짝 펴고 얼굴을 감싸안는다.
<끝> - p2/198 -
전경린 /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2
생각의나무 / 2001.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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