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 「적정한 삶」
우리 집 구급상자에는 언제나 몇 종류의 진통제가 상비되어 있다.
타이레놀 계열과 아스피린 계열. 이따금 만성적인 허리 통증이나 두통에 시달릴 때,
식구들이 한 알씩 복용하는 용도다.
진통제의 부작용도 있지만 통증 자체가 지속될 때의 부작용이 더 크다 보니,
전문가들도 성분을 잘 따져서 지혜롭게 복용하라고 권유하곤 한다.
그렇다면 허리가 아플 때마다 먹었던 타이레놀의 약효는 어디로 흘러들어 갈까?
아픈 허리 근육으로 향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허리에는 고통을 느끼는 센서가 없으니까. 진통제가 작용하는 부위는 다름 아닌 뇌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뇌중에서도 아주 일부 지역에서만 통증을 담당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머리 양쪽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세게 눌러 보자.
당신의 두 손가락이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고 치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뇌 깊숙한 곳에 작은 영역이 만져질 것이다.
전두엽 한가운데에 있는 ‘엔테리어싱글레이트’ 이곳이 바로 고통의 중추라고 불리는 곳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전측대상회’라고 하는데 얼핏 들으면 가게 상호 같기도 한 복잡한 명칭이다.
매번 말하기에도 복잡해서 심리학자들은 간단하게 ‘ACC’라고 부른다.
아무튼 허리가 아프거나 손가락이 아프거나,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이가 아플 때,
내가 참다 참다 꺼내 먹은 진통제는 통증이 있는 신체 부위로 가지 않는다.
체내에서 분해되어 뇌로 흘러가 엔테리어싱글레이트에 위치한 세포들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마음이 아플 때는 어떨까?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일로 상처를 받는 순간이 온다.
사랑이 끝났을 때,
가족 중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유 없이 모함을 당하거나 친했던 사람들과 갈등이 빚어질 때,
험담의 대상이 되거나 언어적 폭력을 당할 때,
주변에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이 홀로 남겨질 때, 우리는 ‘상처 받았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는다.
고통을 견딜 수 없는 경우 삶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심리적 고통은 이제 너무 익숙한 것이 되었다.
물리적으로 바이러스에 감연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다.
공포, 불안, 혐오, 분노, 우울과 상실감이 켜져 간다.
사회적 만남을 박탈당하고, 외로움이 쌓인다.
소속감에 대한 두려움과 비대면 소통으로 인한 오해와 따돌림이 만연한다.
그러다 보니 사회 전반적으로 마음에 상처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이렇게 사람 간의 관계에서 생겨난 아픔을 처리하는 뇌 영역은 어디일까?
바로 엔테리어싱글레이트. 허리 통증을 처리하는 영역과 같은 곳이다.
우리 뇌가 이렇다.
허리가 부러진 고통과 상실감으로 인한 고통을 하드웨어적으로 구분 못한다는 얘기다.
심지어는 마음의 고통을 겪을 때 진통제를 먹으면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UCLA 심리학과 나오미 아이젠버그 교수 팀의 연구를 보면 사회적 왕따를 당한 피실험자에게
3주 동안 타이레놀을 복용시켰더니 그렇지 않은 상태보다 상실감이 훨씬 완화되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비교적 최근 결과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당연히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이 많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연구의 오류를 밝혀내기 위해 다양한 경로로 유사 연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뇌가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같은 고통으로 받아들인다는 결과가 뒷받침되기도 했다.
그동안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은 분리해서 생각해 왔던 통념들,
정신과 신체를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을 마치 비과학적인 것처럼 대했던 사회 분위기를 뒤집은 연구였다.
이처럼 현대 과학은 연구하면 할수록 정신과 신체를 이분법적으로 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지심리학자들은 이제 나오미의 연구를 중요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
잘못 생각하면 ‘마음이 아플 때 진통제를 먹어라.’라는 가르침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연구는 약 처방에 대한 내용이 절대 아니다.
심리적 고통은 어떤 태도로 대할지에 관한 가이드로 봐야 한다.
당신이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누구한테 맞아서 어디 한군데라도 부러졌다 치자.
아마 빠른 속도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법을 포함한 모든 제도가 다친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설계된 덕분이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태도 또한 각별하다.
가족이나 동료가 큰 수술을 하고 회복중이란 말을 들었을 때 우리의 반응을 생각해 보자.
일단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
아파 죽겠다는 사람을 피곤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가능하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몸에 좋은 것을 먹으라고 권한다.
고민거리가 많거나 처리할 업무가 몰려 있다면 평소에 좀 얄미운 인간이더라도 이번만큼은 도와준다.
그뿐인가.
수시로 괜찮은지 물어보고 상처가 덧나거나 잘못되진 않을까 내내 노심초사다.
그런데 이별과 갈등을 경험한 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했던가.
키우던 고양이가 죽었거나,
애인과 헤어졌거나,
외부에서 심한 욕설을 듣고 와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어떤 배려를 해 주었는지 생각해 보자.
“그깟 일 가지고 뭘 그리 유난이야.”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지 뭐.”
“한잔하고 그냥 잊어.”
그 고통이 어떤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라면 별거 아닌 것으로 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상처에 소금이나 뿌리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인지심리학은 심리적, 사회적 고통 또한 신체적 고통 못지않게 다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내 눈앞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을 모른 척 하지 않듯
타인이 겪고 있는 내면의 상처 또한 심각하고 아프게 바라봐야 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지금 혹시라도 마음이 아프다면 나 자신을 환자처럼 대해 주면 좋겠다.
편안한 자리를 깔아 주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이자.
괜찮은지 물어보며 괜찮아질 때까지 좀 쉬라고 다독여 주자.
마음을 다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진통제는 사랑과 배려다.
내가 해 주는 만큼 마음도 금세 회복될 테니 말이다. (p34)
※ 이 글은 <적정한 삶>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경일 - 적정한 삶
진성북스 - 2021.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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