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 / 「가람 (절을 찾아서)」
새로운 판을 내면서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는 침묵을 배운다.
그리고 그 너머 오솔길에 존재하는 흐르지 않는 시간들,
끝없는 수레바퀴의 시간 너머 영원의 집을 향하는 방랑자는
방랑의 끝에 안식처를 찾는다.
1991년 봄,
처음 출간된 지 몇 달만에 예상외의 좋은 반응으로 초판이 품절되었으며,
또한 몇몇 학술논문에 그 관점이 소개되는 등 이 책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출판사 사정으로 이 책은 오랜 기간 어둠에 묻혀 있었다.
이제 최초 출간된 지 7년여의 시간이 지난 오늘,
출판사를 바꾼 채 이 책은 다시금 어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 어둠 뚫고 나선 길섶의 한 포기 풀과 같이,
한 가닥 진리의 생명력이 많은 이들의 마음에 번져갔으면 싶다.
불기 2542년 9월.
正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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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伽藍), 절(寺)을 찾아서
절(寺)이란 삶의 나그네가 머무는 곳이다.
속진(俗塵)의 번뇌 떨쳐 버리고자 무수히 긴밤을 세웠던 이들,
그들에게 절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그러나 '머무는 자'는 영구히 머물지 만은 않는다.
어쩌면 '머문다는 것' 자체가 이미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임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머물되 머무름에 안주하지 않는 장소,
머무름의 순간에 조차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자들을 위해 절의 문은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삶의 여행자들을 위한 머뭄터. 그러므로 절에는 주인이 없다.
그 안에서는 누구나 한낱 여행자이기에‧‧‧‧
그럼에도 잠시 머무는 자는 주인이 된다.
또한 일순간, 아침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를 뒤로한 채
걸망을 챙겨 맨 안개 속의 그 사람에게는 나그네란 이름이 붙는다.
그러나 나그네는 떠나되 절은 그자리에 남는다.
절(寺)이란 무엇인가.
흔히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 가르침을 닦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성스러운 곳,
즉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가 모두 갖춰져 있는 곳을 우리는 절(寺)이라 부른다.
또한 <사미율의(沙彌律儀)>라는 책에 의하면
절이란 '출가제자가 불법을 섬겨 받들어 가르침에 의거해 수행하는 곳'이라 하고 있다.
이에 근거해 볼 때, 절이란 곧 수행(修行)의 도량(道場)을 말한다.
거친 번뇌 속에 노닐던 우리 마음을 가꾸는 한편 순간의 잘못을 반성하기도 하는 곳,
그러므로 절은 참회(懺悔)의 도량 이기도 하다.
이렇듯 수행과 참회의 정신이 어우러진 속에서 스님들은 정진(精進)의 길을 걷는다.
남모르게 흐르는 눈물 속의 삶에는 차라리 애련함조차 서려져 있다.
그리하여 한때는 고립을 위하여 스스로 함몰 되어지는 자.
그는 어느 한순간 스스로의 어둠을 깨고 나올 것이다.
스스로 둘러친 단단한 알 껍질을 깨 부숴뜨리고
많은 이들을 위한 교화(敎化)의 길에 나서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스님들만이 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 역시 스스로 기간을 정한 채 참선 및 기도를 위해 모여들며,
오랜 기간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정기적으로 열리는 법회에 참석한 그들은 산사의 깨끗한 물을 담아 가듯,
생명의 양식이 될 부처님 진리를 설하는 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그것을 마음에 새겨 간다.
그들은 재가신자(在家信者)라 불리워진다.
그 중 남자는 거사(居士) 혹은 처사(處士)라 하고, 여자에게는 보살(菩薩)이란 칭호가 붙여진다.
(원래 재가신자는 모두 거사라 하였으나 후에 남자만을 칭하게 되었고,
처사란 용어는 중국 도교와 유교에서 쓰이던 것이다)
우리 말에 '절반'이란 표현이 있다.
'반절'이라 거꾸로 쓰이기도 하는 이것은 한자로는 '折半'이라 하여, '반으로 자른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 한자(漢字)의 의미적 표현과는 관계없이
'반절'이란 '반속(半俗)'이며 '반승(半僧)'의 반(半)에서 나온 말이다.
오랜 역사와 함께 민중들 삶에 깊숙히 뿌리내렸던 불교신앙.
그러므로 한국불교에는 '절반'이 많다.
'절(寺) 반(半)', 그들의 삶의 중심은 절에 있다.
세파(世波)의 표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그늘진 곳(野)에 파묻혀 사는 선비들(處士) 뿐만이 아니라,
비록 세속에 몸담아 있을 지라도 세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여유 자적한 삶을 누리는
'절반'은 틈틈히 절을 찾아 새생활을 위한 새 힘을 얻는 것이다.
이렇듯 절에는 '온절'의 스님들과 '반절'의 신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1과 1/2. 이들이 합해져 절의 구성요소를 이루게 된다.
그럼에도 절이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업과 윤회의 질서에 의해 여러 생, 여러 겁,동안 황폐되어 왔던 고요한 마음을 닦는 곳으로서,
절이란 장소적 공간에서만이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요한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뉘우침의 장소로서 우리 마음과 우리 마음의 법,
우리 마음 속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면,
그곳에도 역시 무형적 공간으로서 절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재재처처(在在處處)가 불찰(佛刹)이요, 불신(佛身)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영가(永嘉)의 <증도가(證道歌)>에서 우리는 다음의 구절을 발견하기도 한다.
“뜬구름 같은 이 육체여
그대로가 부처가 사는 법당인 것을‧‧‧‧“ - p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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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말 (사랑과 사념의 팡세)
햇살 비춰오는 날, 나는 또한 생각하였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평생 처음으로,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마르쿠제(H. Marcuse)의 말을 되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생활의 의미를 배우며 삶을 위한 단순의 의미를 배워간채,
또 다시 생(生)의 열외자인 자신의 부끄러움을 생각하며 괴로워하기도 하였다.
'삶이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해 줄 것이다'라는 지드(A. Gide)의 말의 의미였던가.
그래서 재주넘기를 계속하고 또 다시 계속해야 했던 날,
얼마나 희망을 원해야 비들기가 되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클로텔(J. Cloter)에 대해 당분간의 의견을 같이 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의 만족을 방해했던 무서운 불안,
쾌락으로 절망으로 이끌었던 줄기찬 불안들. 그래서 나는 서적 속으로 찾아 헤매였다.
확실한 것은 나를 기쁘게 하였고, 나는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의 불안은 나에게 경고하였다.
정지하지 말고 만족하지 말고,
사랑에 번민하고 고통하고 또 다시 찾고 허덕이라고 말해왔던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끝끝내 찾아 나서야 할 것임을 강조하곤 하였다.
그러나 삶이란 또 다시 단순해짐을 원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나의 운명만큼의 슬픔을 배우고자 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변화되지 않는 자신을 말한다는 것은 크나큰 공허를 안겨줄 뿐,
내면의 고독만을 일깨워 주기도 할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알았다.
삶이란 결코 변화 속에 머물게 될 부동(不動)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변화와 불변 어우르는 총체적 질서 가운데
역동적 삶의 그림자 내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몽상하곤 하였다.
하늘에 떠있는 조각배들,
그 구름 타고 노니는 생육간의 처절한 질서를 바라보기도 하였다. - p175 -
※ 이 글은 <가람>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입니다.
정각 / 가람 (절을 찾아서)
운주사 / 1998.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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