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배
종이배가 떠온다
초등학교 적의
내 동요(童謠)가 떠온다
어느 소녀의 눈빛을 싣고
흘러와서 맴돌다가
내 마음도 함께 싣고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가 되어
떠니깐 종이배
동화는 소설이 되고
냇물도 눈물이 되어
출렁이는 바닷가에
내 다시
무엇을 꿈꿀 수 있다고
종이배는 떠와서
맴을 도는가.
아직은 눈발도 안 보이는 황량한 겨울이다.
초록빛이 사라진 거무튀튀한 잿빛 계절에 문득 겨울같이 삭막한 나이를 느껴 본다.
정녕 지금의 나는 눈부신 봄철이 아니고, 칠칠한 여름도 아니다.
그렇다고 가을 같은 정취도 없으니, 아무렇게나 꺾어지고 부러지고 버려진 빈 터의 잡초 모양
잿빛 겨울철의 삭막함과 을씨년스러움과 황량함이 오히려 내게 어울리는 듯, 그냥 겨울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훌쩍 찾아온 곳이 섣달의 바닷가.
전철을 타고 마냥 흔들리며 종점까지 올 때만 해도, 서울이란 곳과는 다른 무엇을 기대해 보았다.
서울이라는 번잡하고 정신없는 분위기와는 다른 분위기가 기다려줄 것만 같았다.
모두가 자신 있게 어깨 겨루며 용기 있게 살아가는 속에서,
나만은 왜 늘 이리저리 치이고 밀려나는 듯한 패배와 소외와 단절을 느껴야 하는지,
나이가 겨울철에 비견될 만큼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느껴지니 어느 정도 체념도 될 만큼 되었을 텐데,
왜 늘 혼자이고만 싶은가?
아무도 없는 곳, 그런 곳이 어디일까? 아무것도 가로막히는 것이 없고 눈길이 모자랄 정도로 아득한 곳,
가슴이 탁 트이는 듯 시원하게 열린 곳이 어디인가?
꼴찌도 일등도 비교도 경쟁도 없는 혼자일 수 있는 그런 곳이 어디인가?
따라서 소외감도 패배감도 느껴지지 않는 그냥 편안한 곳은 정녕 없는가?
묻고 물었다. 벼르고 별러왔다.
그래서 찾아온 곳이 고작 이 바닷가이다.
그러나 정작 어디의 어떤 곳이기를 구체적으로 기대하지 못했으므로,
느껴지는 실망은 차라리 얼어붙은 빙판이 오히려 나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아닌가.
얼어붙은 빙판보다, 눈 덮인 산야보다, 마른풀들이 북풍에 허리 꺾여 우는 들녘보다도
더 고적하고 더 암담한 곳이 아닌가. 더 기막히고 더 막막하고 더 적막한 곳이 아닌가.
눈길 가는 어디든 오로지 잿빛뿐이다.
내 이제 잿빛 겨울 같은 가슴으로 찾아온 곳마저 잿빛뿐이라니.
끝없이 흐려진 잿빛 속에 바다와 하늘은 맞물려 휘어졌을 뿐이다.
모래밭마저도, 바다 물빛마저도 온통 짙은 잿빛일 뿐이다.
둔중한 종소리도 잿빛 바닷물 속으로 잠겨 든 듯, 낮은 파도는 계속 출렁일 뿐이다.
아니 그 여운만 잿빛 모래밭에 안개처럼 쓸리고 덮여져 갈 뿐이다.
바람결은 약해도 내 머리칼은 쥐어뜯기고 할퀴어지고,
인적은커녕 물새 울음소리조차, 그 발자국조차도 찾을 길 없다.
가슴이 탁 트이고 열리고 씻기어 후련해지기는커녕,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하늘과,
그 하늘을 향해 입 벌리고 기다리는 듯한 잿빛 바다에서도 찝찔한 소금기는 얼굴과 손등으로
차갑고도 끈끈하게 느껴지고, 생미역 내음 같은 갯내음이 바위를 역겹게 건드릴뿐이다.
내 하는 모든 짓이 늘 그러하듯 오늘도 후회 후회를 되씹으며,
어쩌랴 걷지 않고는 다른 무슨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암담한 잿빛 천지에도 불타는 여름 태양이 내리퍼부어졌고,
오대양을 달려온 쪽빛 파도가 주저 않아 통곡했으리라고는 어찌 상상하랴.
하물며 요란스런 기타 선율과 싱싱한 젊음의 목청들이 파도소리보다 높게
그 낭만을 구가했으리라고는 더욱 상상할 수 없으리니,
이는 마치 지금의 내 초라하게 일그러진 겨울같이 황량한 모습에서,
봄- 여름- 가을- 같은 젊은 한때도 있었으리라고 상상해볼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
겨울 바닷가. 잿빛 잿빛 잿빛의 암담함 뿐인 겨울 바다.
사방은 온통 짙은 잿빛뿐이어서 오히려 아득한 태고적의 그 음침한 흔들림만 있는 듯,
천천히 미동하는 생명체가 잿빛 바다와 하늘을 흔들며 태어나고 있는 듯한 착각,
어둠과 빛이 분화되기 전 태초의 움직임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 듯,
표정 없는 얼굴로 어늘한 몸짓으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생명의 원형이 나타날 듯,
그런 분위기가 적막한 잿빛 겨울 바다라고 할까.
그럴지도 모르지. 바로 이런 잿빛 미분화 속에서 미생물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며,
움직이면서 천천히 좀 더 복잡하고 고등한 생명체로 진화되어 갔을 것이며,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다가는
마침내 인간은 그 첫 모습으로 이 바닷가 모래밭에 서게 되었으리라. 정녕 그러하였으리라.
그래서 최초로 인간이 태어난 산실은 산도 들도 아닌 바다라 했지.
정녕 그 말이 그럴듯하게 여겨질 정도로,
나는 지금 태초의 인간 그 첫 모습으로 이 바닷가에 서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는 지금 막 태어난 미명의 잿빛 세상을 한 번 휘이 들러보고 있는지도 모르지.
망상은 망상을 낳고, 망상의 꼬리는 결코 끝을 보여 주지 않았다.
내 버릇 그대로 허황되고 엉뚱하고 그러면서도 어둡고 습기 찬 백일몽에 사로잡혀 걷고 걸었으리라.
얼마나 멀리,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춥고 다리가 아팠다. 지치고 피곤했다.
얼굴과 손이 시려서 만져 보니 끈적거렸고,
마른 입술로 침을 삼키니 찝찔한 눈물인가 소금기가 느껴졌다.
걸음을 멈추고 앉을 곳을 찾았으나 끈끈하고 습기찬 회색 모래 밭일뿐,
눈을 드니 앞길은 잿빛 모래밭이요, 돌아보니 걸어온 길도 잿빛 모래뿐이었다.
문득 발 아래, 젖은 모래가 묻어 엉망이 된 내 발 아래, 굵은 밤톨만 한 종이배가 보이지 않는가?
아니 흔들리고 있었음을 나는 몰랐다. 쪼그러 앉아 가만히 들어다 보니,
가벼운 물살에 불안스럽게, 아니 측은하고 안쓰럽게, 너무도 가볍게 흔들리는 종이배.
이 거대한 잿빛 바닷물에 작디작은 종이배 하나, 이 얼마나 애처로운 대조인가.
너는 어디서 무얼 하려고 이곳에 왔니? 내가 묻자 그 어린 종이배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대를 태워서 이 바다까지 데려왔지.
그러고 보니, 왠지 내가 금방 타고 온 바로 그 배는 곧 이 종이배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이 작디작은 종이배 한 척을 타고, 나는 얼마나 멀고 먼 향해를 했을까?
시냇물을 거쳐, 강물을 지나, 동요를 부르다가,
동화의 세계를 꿈꾸면서 얼마나 신나는 모험 길에 올랐을까?
처음 보는 세상들과 처음 만나는 진귀한 풍경.
죽을 뻔한 두려움과 겁나는 위험들을 얼마나 수없이 겪어 내고 살아 남았을까?
한참이나 들어다보고 있노라니, 뀬형 잡히지 못한 연필 글씨가 가로 누워 있었다.
초등학교 꼬마가 그의 헌 노트쪽을 찢어 만든 것이 분명한듯,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으리라. 만나본 적 없는 어느 소년의 깡마른 얼굴이 떠오르고,
짓굿은 장난기와 어린이만의 외로움이 서린 눈길이 떠오르고,
외로움을 따라가는 소년의 꿈길마저도 내 눈에는 선연하게 보이는 듯.
꿈길을 따라가는 소년의 눈빛은 그의 공책 뒷장을 찟어 내게 했고,
그래서 마침내 이 종이배는 만들어졌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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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에는 흑백의 필름 몇 장이 계속 거꾸로 돌아가고,
나는 그 필름을 따라 과거로 옛날로, 내 유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재잘재잘 소리내며 흘러오는 시냇물을 타고 종이배 한 척이 갸웃갸웃 떠내려온다.
한 곡의 동요처럼 작고 어여쁘게 흘러오는 종이배. 나는 초등학교 아이였으리.
종이배를 바라보고 기다려 서 있으면서, 피리 부는 소년의 모습과 , 그의 동요 한 곡과,
그 아이의 꿈과, 그 아이의 눈빛과, 그 아이의 쓸쓸함과 외로운 마음을 종이배 속에서
볼 수 있었으리. 종이배가 내 앞에까지 다가오길 기다리며, 나도 따라서 동요를 불렀으리.
흐름을 타고 떠내려온 종이배는 내 앞에 와서는 몇 번이나 맴돌았을까?
좀처럼 흘려서 떠내려가지 않았고, 나는 그 뜻을 알아차릴 만큼 속이 찬 아이였을까.
나는 선뜻 내 마음을, 내 꿈을 그 종이배에 함께 태우고,
내가 알지 못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상을 찾아 함께 모험 길에 올랐으리라.
우리는 함께 동요를 불렀으나 더 이상 동요는 아니었으리.
우리는 한 편의 동화가 되어 어디론가 멀리멀리 흘러갔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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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마침내는 겨울같이 황량한 이 나이에는 거대한 눈물이 잿빛으로 차오르는
짜디짠 소금물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겠지.
제아무리 평탄하고 유복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도
그의 한 생애는 한 편의 소설감이 될 만하다 하였으니, 동요가 동화되고,
다시 소설이 되는 과정이야말로 우리의 인생, 그 역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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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물에 젖어 가라앉을 듯한 지친 종이배는,
허클베리 소년의 모험을 치른 뒤의 피곤 같다 할까?
톰 소여의 모험으로 다시 나를 꾀는 걸까?
종이배를 만들어 내게로 띄워 보내준 소년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내 손으로 종이배를 만들어 띄워본 적 없음에도
나는 왜 나의 전생에 꼭 그런 소년이 있었을 것만 같이 느껴질까?
아니 그런 소년과 함께 모험의 과정을 거쳐 지금 이 바다에까지 이른 듯이 착각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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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곳에도 정박할 수 없는 종이배는, 아무리 지치고 피곤할지라도,
또다시 이 광막한 바다를 향해하지 않으면 안 될까?
또 얼마나 무섭고 큰 항로가 이 작고 여린 목숨을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껏 살아온 시냇물과 강물의 생애보다
수십 수백 배나 험하고 거친 길목들을 지나야 한단 말인가?
내 이제 다시는 되풀이하여 살고 싶지 않은 지난 생애일진대,
무엇을 다시 꿈꿀 수 있을까?
손끝으로 종이배를 밀어내여 보았다.
바다 멀리,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먼먼 곳으로 사라져 가라고 떼밀어 내었다.
그러나 물살은 계속 밀물로 밀려오는지,
종이배는 다시금 돌아와 내 발 아래 머뭇머뭇 맴돌고만 있다.
몇 번이나 밀어내어도 다시금 돌아와 맴돌고 있다.
내가 떠나야지.
아무리 그립고 안타까운 유년의 동요일지라도,
아름답고 황홀한 동화일지라도 눈감고 뒤돌아서야 한다.
내 이제 다시 어떤 모험 길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바다를 등지고 돌아왔으나,
얼굴에도 머리칼에도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갯내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잿빛 바다와 잿빛 모래밭도 가슴 가득 출렁이고 서걱이고 있었다.
따라서 종이배의 그 지친 모습도 내 망막에서 사라지지 않고,
몇 줄의 시 속에서 나울나울 흔들리며 맴돌고만 있었다. - p66 -
※ 이 글은 <종이배>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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