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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

안도현-연어/연어, 라는 말속에는 강물 냄새가 난다.

by 탄천사랑 2021. 6. 22.

안도현 / 「연어

 

 

그래도, 아직은, 사랑이,
낡은 외투처럼 너덜너덜해져서
이제는 갖다 버려야 할,
그러나, 버리지 못하고,
한번 더 가져보고 싶은, 
희망이, 이 세상 곳곳에 있어,
그리하여, 그게 살아갈 이유라고
믿는 이에게 바친다.   - 작가의 말 -

 

--

연어, 라는 말속에는 강물 냄새가 난다. 

 

--

"은빛연어야,
 네 동무들이 너를 별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니?"

은빛연어는 별종, 이라는 말의 뜻을 그때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뭇연어들과 자신을 구분 짓는 말이었다.
갑자기 은빛연어는 자신이 먼 바다에 홀로 뚝 떨어져 있는 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 오직 혼자밖에 없다는 외로움,
외로움은 두려운 게 아니라 슬픈 것이다
자신의 몸이 온통 은빛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은빛연어는 이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삶이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 속의 또 다른 은빛연어가 말했다.
'삶이란 그래도 견더야 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 속에 두 마리의 연어를 갖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은빛연어는 동무들에게 말했다.
"내 몸의 비늘보다 마음속을 들여다봐주렴."
가까이서 한두 마리의 연어가 귀찮은 표정으로 몇 마디 물었다.
"마음을 어떻게 들어가본다는 거지?"
은빛연어는 자기 말에 관심을 가지는 연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 기뻤다.
"그건 말이야,
 외양보다 내면을 본다는 건데.
 음.....,"    - p21 -

 

--

그 후로 은빛연어는 점점 외톨박이가 되어갔다.
수많은 연어들 중에 그의 말 상대가 되어주는 연어는 그래도 누나뿐이었다.

"내 동무들은 왜 나를 따돌리지?"
"왜 따돌린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너를 감싸고 있잖아?" 누나는 무엇이든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려고 한다.
그게 은빛연어는 답답했다.
누나는 아니다. 라는 단어를 모르는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나는 보호받으면서 따돌림당하는 것보다는, 
 보호받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싶거든"
"자유?"  
누나는 자유, 라는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자유, 라는 말은 연어들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 중에 하나다.

반향, 가출, 불복종, 자항, 파괴, 혁명 등의 단어와 함께,
이 단어들을 쓰면 고향으로 돌아가 알을 낳을 수 있는 연어는 
한 마리도 남지 않을 거라고 턱큰연어는 경고하곤 했다.

"나도 자유롭게 헤엄을 치고 싶어.
 바닷속을 마음껏 구경하고 싶다구.
 나는 이 바다의 모든 것을 내 눈 속에 담고 싶거든."  

누나는 누가 듣지는 않는지 주변을 한 바퀴 들러본다.
"물론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단다.'
 하지만...," 
누나는 언제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건 모두 다 너를 위해서야.
 너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단다.
 그래야 나중에 커서 훌륭한 연어가 되지."  

은빛연어는 답답해서 아가미가 터질 것 같다.
"나는 네가 참 걱정스러워."
그러나 은빛연어는  누나가 훨씬 더 걱정스럽게 여겨진다.
그래서 그는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누나는 늘 걱정만 하는 존재다.
 누나는 나를 왜 옆에서 보지 못할까?
 불곰과 물수리가 위에서 물고기를 내려다보듯이 누나도 나를 위에서 보려고 한다.
 또한 누나는 걱정하는 척하면서 간섭하려 든다.
 간섭하는 게 사랑의 표시라도 되는 듯이,

 누나는 사랑이 간섭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오히려 묵묵히 바라보거나 나란히 헤엄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누나는 정말 모르는 것이다.'   - p26 -

 

--

새우 특유의 고소한 맛은 언제나 입안에 군침을 감돌게 하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과식은 하지 않는다.
자기 욕망의 크기만큼 먹을 줄 아는 물고기가 현명한 물고기라고, 그는 생각한다.
연어는 연어의 욕망의 크기가 있고, 고래는 고래의 욕망의 크기가 있는 법이다.
연어가 고래의 욕망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연어가 아닌 것이다. 

고래가 연어의 욕망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고래가 아닌 것처럼,
연어는 연어로 살아야 연어인 것이다.  - p30 -

--
그리움, 이라고 일컫기에 너무나 크고,
기다림, 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넓은 이 보고 싶음. 
삶이란 게 견딜 수 없는 것이면서 또한 견뎌내야 하는 거래지만. 
이 끝없는 보고싶음 앞에서는 삶도 무엇도 속수무책일 뿐이다.  - p39 -

 

--

은빛연어는 눈맑은연어에게 말했다.

"우리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이유가 오직 알을 낳기 위해서일까?
 알을 낳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 
 그게 우리 삶의 전부라고 너는 생각 하니?  아닐 거야.
 연어에게는 연어만의 독특한 삶의 이유가 있을 거야.
 우리가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하면 우리 삶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글쎄, 네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어.
 어쨌든... 나는... 알을 낳아야 해.
 그 누구도 아닌,  너와 나의 알을 말이야."  

눈맑은연어는 은빛연어에게 부풀어 오른 하얀 배를 보여주고 싶었다.
은빛연어에게 마음의 눈으로 알을 한번 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상류로 가서 뱃속에 있는 알을 낳는 일, 그 중요한 일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은빛연어가 자꾸 안쓰럽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 p53 -

 

--

은빛연어가 말을 잠시 멈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아버지 연어와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알 수 없는 감격 때문에 마음을 가누기가 힘든 것이다.
은빛연어의 눈은 
아버지와 자기 자신 사이에 연결된 보이지않는 한 가닥 끈을 보고 있었다.

그 끈은 살아 퍼덕이는 강물 같기도 했고,
강물이 내쉬는 푸른 숨소리 같기도 했다.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은빛연어는 어느새 옛날의 그 늠름한 은빛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연어들이 알을 낳는 게 중요하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알을 낳고 못 낳고 가 아니라, 
 얼마나 건강하고 좋은 알을 낳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우리가 쉬운 길을 택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새끼들도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할 것이고, 
 곧 거기에 익숙해지고 말 거야. 
 그러나 우리가 폭포를 뛰어넘는다면, 그 뛰어넘는 순간의 고통과 환희를 
 훗날 알을 깨고 나올 우리 새끼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게 되지 않을까? 
 우리들이 지금,  여기서 보내고 있는 한순간, 
 한순간이 먼 훗날 우리 새끼들의 뼈와 살이 되고 옹골진 삶이 되는 건 아닐까? 
 우리가 쉬운 길 대신에 
 폭포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뿐이야.'

은빛연어는 이미 예전의 나약하고 부끄럼 많던 연어가 아니었다.   - p107 -

 

--

드디어 폭포를 뛰어오르는 순서가 정해지고,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은빛연어가 눈맑은연어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눈맑은연어가 말했다.
"나도 그래.
 뭔가 가슴에 자꾸 사무치는 것 같아."

은빛연어는 목이 메인다.
이제 폭포를 뛰어오르기만 하면 고향이 바로 눈앞인데도 그는 즐겁지가 않다.
뛰어오르는 일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사무친다는 게 뭐지?"
"아마 내가 너의 가슴속에 맺히고 싶다는 뜻일 거야"
"무엇으로 맺힌다는 거지?"
"흔적..........
 지워지지 않는 흔적"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의 차례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 p109 -

 

--

물길이 점점 좁아자고 앗다.
눈앞에 큼직한 바윗돌 몇 개가 그들을 가로막는다.

"너는 누구니?"
"나는 징검다리야." 하고 징검다리가 대답한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은빛연어가 물었다.
"사람들을 건네주는 일을 한단다."

가만히 보니 징검다리는 인간들의 발자국이 여럿 찍혀있다.
아까 만났던 어린 인간의 발자국도 예쁜 무늬처럼 찍혀 있는 게 보인다.
징검다리는 물 속에 서서 
인간들을 이쪽저쪽으로 실어 나르느라 몸이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다.
​은빛연어는 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프지 않니?"
"괜찮아."
"인간들이 너를 마구 짓밟는데도?"
"짓밟히지 않으면 내가 살아갈 이유가 없어.
 나는 짓밟히면서 발걸음을 옮겨주는 일을 하거든."
"아, 그렇구나." 은빛연어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뚝뚝해 보이는 징검다리도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 
 그가 짓밟히면서도 즐거워하는 것은 살아가는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이야. 
 징검다리는 물의 흐름을 막지도 않으면서 의연하게 제 할 일을 다하고 있구나. 
 나는 저 징검다리에 비하면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지..., '  - p119 -

 

--

눈맑은연어의 주둥이가 해진 헝겊처럼 닳아가고 있다.
그녀는 피곤한지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녀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은빛연어를 바라본다.

"은빛연어야" 
그녀의 그 맑던 눈에도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것은 세월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한 연어의 초상이었다.

"너는 삶의 이유를 찾아냈니?"
은빛연어는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그는 알을 낳는 일보다 더 소중한 삶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그가 찾으려고 헤맸던 삶의 의미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다른 연어들처럼 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강하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폭포를 뛰어넘었고, 이제 상류의 끝에 다다랐을 뿐이다.
 
"삶의 특별한 의미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야."
"너는 어디엔가 희망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럼 결국 희망을 찾지 못했다는 말이니?"

은빛연어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희망을 찾지 못했어.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한 오라기의 희망도 마음속에 품지 않고 사는 연어들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연어였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어.
 우리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연어들이 많았으면 좋겠어."  

눈 맑은 연어는 은빛연어가 그동안 어느 먼 곳을 여행하다가 
이제 막 고향으로 돌아온 연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구름과 무지개를 잡으러 떠넜다가 
이제 한 마리의 연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 p125 -

 

--

초록강에는 겨울이 올 것이다.
겨울이 오면 강은 강물이 얼지 않도록 얼음장으로 만든 이불을 덮을 것이다.
강은 그 이불을 겨우내 걷지 않고 연어 알을 제 가슴속에다 키울 것이다.
가끔 초록강의 푸른 얼음장을 보고 누군가 지나가다가 돌을 던지기도 할 것이고,
그때마다 강은 쩡쩡 소리 내어 울 것이다.

봄이 올 때까지 조심하라고,
가슴 깊은 곳에서 어린 연어가 자라고 있다고.  - p132 -

--
연어, 라는 말속에는 강물 냄새가 난다.   - p133 -

 

 

 

 

안도현 / 연어
문학동네 /  1996. 03.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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