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꽃도 처음 보는 꽃이려니와
서울 아이들도 자연에서 곧장 먹을 걸 취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꽃을 통해서였다.
잘 먹는 아이는 송이째 들고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따 먹듯이 차례차례 맛있게 먹어 들어갔다.
나도 누가 볼세라 몰래 그 꽃을 한 송이 먹어 보았더니 비릿하고 들척지근했다.
그리고는 헛구역질이 났다.
무언가로 입가심을 해야 들뜬 비위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 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 p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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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빠와의 친밀감을 과시하기 위해
멀리까지 가서 조리 풀을 따다가 오빠한테 붙들게 하고 조리를 엮었다.
조리풀을 뜯을때마다 습관적으로 먹을 풀을 찾았지만,
선바위 주위 척박한 땅에는 모질고 억센 잡풀밖에 자리지 않았다
가끔 나는 손을 놓고 우리 시골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하염없이 생각하곤 했다.
말수 적은 오빠도 내 향수를 알아차리고는
여름방학이 며칠 안 남았다는 걸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여 주곤 했다. - p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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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개성역이었다.
엄마는 여름 교복을 산뜻하게 차려입은 아들과
물방울무늬 내리닫이로 양장을 한 딸을 자랑스럽게 앞세우고 역에 내렸다.
할머니는 나를 안아 보고 나서 등을 들이대면서 자꾸만 업히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다.
고향 산천은 온통 푸르고 싱그러웠다.
고개를 넘고 들꽃을 꺾고
개울물에 땀을 닦으며 여름내 서울을 못 벗어날 서울 아이들은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들판의 싱아도 여전히 지천이었지만 이미 쇠서 먹을 만하지는 않았다. - p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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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우리 엄마만큼 삼국지를 재미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엄마가
"옜다 조조야, 칼 받아라." 하면서 그 동작까지 흉내 내느라 바느질하던 손을 높이 쳐들었을 때
엄마의 손끝에서 반짝이는 바늘 빛은 칼빛 못지않게 섬뜩하고도 찬란했고,
나는 장검을 휘들러도 시원치 않을 우리 엄마가
겨우 바느질 품밖에 못 파는 게 안타까워 가슴 속에 짜릿하니 전율이 일곤 했다.
가장 궁핍했던 시절 엄마의 이야기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된 것은 사실이나 나쁜 영향도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소학교 다니는 동안 동무 없이도 심각한 불행감 없이 그 외톨이 상태를 거의 즐기다시피 했는데
그건 내 머릿속에 잔뜩 들어 있는이야기가 나에게 그런 건방진 능력을 준 것이 아니었을까.
훗날 돌이켜보면 해 본 공 없는 생각이다.
육 년 동안 서울에서는 드물게 산을 넘어 통학을 하면서도
무섭다거나 심심하다는 생각이 조금도 안 들었고
어쩌다 길동무가 생기는 경우도
서로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귀찮아서
혼자 다니는 걸 그중 편하고 자유롭게 여겼다. - p107 -
박완서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닷컴 / 1992.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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