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미나 - 스페인 너는 자유다」
세네갈 거부가 호의를 베푼 까닭
우연히 만난 친구들 덕분에 아슬아슬한 고비는 넘겼지만 나의 슬럼프는 계속되었다.
새로 이사를 간 집에서 스페인 할머니,
프랑스인 여대생과 함께 살게 된 나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에 휩싸였다.
할머니는 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요즘 젊은 것들이 세상을 망친다며 프랑코 시대가 좋았다고 틈만 나면 불평을 했다.
그런가 하면 심한 프랑스어 억양이 섞인 스페인어를 구사하던 파리 출신의 여대생은
밤마다 그녀의 연애 경험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던 그 시절의 나는
매일같이 강도가 더해지는 문화적 충격으로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할머니의 잔소리를 견디기도 힘들었고,
프랑스인 여대생 때문에 내 스페인어 발음에도 왠지 '숑숑숑'하는 콧소리가 섞여 나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스페인어로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답답했고,
마음과 말이 통하는 친구 다운 친구 하나 없이,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 가족도 없이 1년 넘게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는 내 현실이 너무 서글펐다.
서울에 비하면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닌데
마음이 불안하고 외로워서인지 한 번 걸린 감기는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한국 음식을 먹으면 좀 나을까 싶어 하루는 큰맘 먹고 마드리드의 한 한국 식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눈물을 머금은 채 그 당시 돈으로 만 원도 넘는 거금을 주고 먹은
앙증맞은 크기의 비빔밥은 오히려 나의 향수병만 자극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해서 힘이 들었다.
호주에서의 공부만 마치고 집으로 둘아갈 것을 괜한 욕심을 냈나 싶어서 후회도 많이 되었다.
그렇게 내 마음이 마구 흔들리고 있던 어느 날, 한 선배로부터 매우 구미 당기는 제안을 받았다.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 처음엔 다들 힘들어하더라.
그럴 땐 잠깐 머리를 식히고 오면 좀 나아질 거야.
어차피 내게는 쓸모없게 된 파리행 비행기표가 있는 데, 너 줄까?"
심각한 향수병에 문화적 충격으로 인해
마음속에 스페인이란 나라에 대한 증오심과 거부감이 커져 가고 있었던 차에 귀가 솔깃해졌다.
당장 어디로든 떠났다 오지 않으면 모든 걸 포기하고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멋지게 해내고 돌아오리라'라고 내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심에 너무나 괴로울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마침 파리 근교에 머물고 있던 한 후배를 떠올렸다.
'일단은 파리로 가서 시간을 보내다 사정이 정 여의치 않으면 후배한테 신세를 지지 뭐,
그래 가보는 거야'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창문에 머리를 박은 채 비행기가 이룩하는 것도 모르고 곯아 떨어졌다.
잠에서 깨어보니 내 옆 자리에는 한 중년의 흑인 신사가 앉아 있었다.
베이지색 양복 때문에
피부색이 더욱 검게 보이던 그가 두툼한 입술을 움직여가며 중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가씨, 왠지 많이 아파 보이고 슬퍼 보이네.
아가씨처럼 젊은 사람이 그렇게 몸도 마음도 지쳐 보이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런지 물어봐도 될까?"
참 이상하게도 때로는 낯선 사람에게
오히려 더 편안하고 솔직하게 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질문에 난 기다렸다는 듯 쌓였던 이야기들을 마구 풀어내기 시작했다.
넋두리에 가까운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던 그 흑인 신사는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숙소를 이미 정한 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묵는 호텔에 나를 위한 방을 하나 잡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내 귀를 의심하며 극구 사양했지만 어차피 넉넉한 여비도,
마땅히 갈 곳도 없던 나는 결국 그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후 우리가 탄 비행기는 파리 샤론 드골 공항에 착륙했고
공항 청사를 나서자 그를 마중 나온 기사가 리무진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리무진은 곧장 그가 머무는 호텔로 향했고
그는 부담 갖지 말라며 방을 하나 잡아주고는 어느새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벨보이의 안내를 받아 정말 얼떨결에 그가 잡아준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는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아저씨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호의를 배플 리는 없잖아?
내가 미쳤지, 완전히 미쳤어.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노크를 했다.
그 사람이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뿔싸, 한 발 늦었구나. 어쩔 수 없지.'
나는 무슨 핑계를 대고서라도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내 평생 본 중 가장 아름다운 흑인 여인이
그의 품에 안긴 채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잠시나마 그를 의심한 것이 미안해진 나는 서둘러 표정을 바꿔 반갑게 인사를 했고
그는 아름다운 그의 아내를 내게 소개했다.
그날 나는 그들이 초대받은 파티에 따라가 저녁을 먹었다.
갈수록 이해되지 않는 상황투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편한 마음으로 자기가 해주는 것들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막 잠에서 깨어나려는데 방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봉주르 마드모아젤? 프런트 데스크입니다.
미스터 디엥께서 손님을 위해 특별히 택시 한 대를 대절해 두셨습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내려오시면 파리 시내 어디든 가고 싶은 곳에 모셔다 드릴 겁니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어 보았다.
'분명 꿈은 아닌데....' 믿기지 않는 일들은 그 전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난 그 친절한 흑인 신사가 대절해 준 택시를 타고 파리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다
밤이면 부부의 저녁 모임에 따라가 식사를 하고
그들과 함께 호텔로 돌아와 그가 마련해 준 방에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지내기를 3일,
덕분에 잘 먹고 잘 쉬고 편하게 여행을 해서인지 마음도 편했고 감기도 많이 나았다.
더 이상은 신세를 질 수 없어 후배의 집에 머물기 위해 파리를 떠나기로 한 날,
그는 나를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3일 내내 곰곰 생각해 봤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아저씨가 부자인 것도 알겠고 좋은 분인 것도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 큰 호의를 베푼다는 건 언뜻 이해가 잘 안 되거든요.
이런 질문을 하면 제가 고마움도 모르는 무례한 아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도대체 왜 저에게 이렇게 잘해 주신 건가요?"
그는 마치 내가 그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두 눈을 지긋이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듣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음....
난 말이지,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란다.
사업을 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
그런데 난 사실 세네갈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무척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내게 공부를 한다는 건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지만
난 꽤 총명하고 꿈도 많은 아이였지.
어려운 환경을 딛고 꿈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칠 때마다
내게는 참 힘겨운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누군가가 나타나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호의를 베풀고 용기를 주곤 했단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그래서 나도 언젠가 성공을 하면
젊은 시절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거든.
그리고 며칠 전 비행기 안에서 만난 너에게서 그 모습을 보았어.
꿈을 향해 가고 있는 젊은이가 좌절하고 절망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마음속에 꿈을 간직한 젊은 사람은 아무런 조건 없는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거란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 희망이 없는 얼굴을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무엇이 너를 그리 괴롭고 힘들게 했는지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하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언젠가 꼭 신세를 갚고 싶다고 말하는 내게
그는 자기한테 무언가를 돌려줄 생각 말고 내가 그의 나이가 되었을 때
또 다른 젊은 누군가가 꿈을 향해 가는 길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길 바란다고 했다.
한겨울의 파리 기차역,
기차에 오르기 위해 바쁜 걸음을 옮기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난 그와 말없이 긴 포옹을 나눴다.
"Thank you, Mr. Dieng, Thank you...."
눈에 가득한 눈물 때문에 형체가 또렷하지 않은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내가 혼자 되뇌고 또 되뇐 말이다.
고맙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싶었지만
지금 와 생각해 봐도 고맙다는 말 외에 내가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절망적인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나
거짓말처럼 아무 조건 없이 많은 것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대로 주저 않을 수는 없었다.
미스터 디엥을 만난 파리 여행을 통해 다시 일어설 용기와 힘을 얻은 나는
며칠 후 마드리드로 돌아왔을 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희망과 행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나는 서서히 스페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미스터 디엥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꿈을 향해 가는 길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고 고난의 순간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다면 반드시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그리고 그가 내게 그랬듯,
나도 언젠가 꿈을 가진 젊은이의 수호천사가 돼 주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절망하던 내가 새롭게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준 미스터 디엥,
그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언젠가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이 글은 <스페인 너는 자유다>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손미나 - 스페인 너는 자유다
웅진지식하우스 - 2006. 07. 28.
[t-21.05.10. 20240504-1455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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