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21 - 2018 창작21 가을호 신인상 소설 당선작 / 오늘의 좋은 소설」
유토피아의 땅
박세환
희망의 기운과 사랑의 기쁨이 가득 찬 꿈의 세계. 그런데 없었고, 없는, 또 어쩌면 없을 곳, 그런 곳을 가리켜 ‘유토피아’라 부른다. 동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험심이 남다른 사람, 또 지금 현실의 고통 속에서 시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곳을 꿈꿔봤을 것이다. 너무 간절한 나머지 현실 같은 꿈을 꿈속에서 봤을지도 모르겠다. 꿈을 깨고 나선 진한 여운을 느끼면서도 현실과의 간극에 못내 아쉬워했을지도.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다만, 꿈이 실현되기 위해선 그곳을 향한 발걸음을 정진해야 한다. 꿈속에서의 걸음은 그저 꿈에 머물 뿐이다.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 발을 딛기 시작할 때, 비로소 꿈은 꿈이 아닌 현실에서 나타나고, 그토록 마음속에서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상상한 세상은 실제가 된다. 유토피아는 결국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현실과 맞닿은 세계이다. 우리가 발로 내디디고 있는 현실에서의 땅이 출발선이다. 이 선을 넘으면 유토피아이고, 출발하지 않으면 그대로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일단 현실이 된 유토피아는 곧 현실로 굳어진다. 그때, 어쩌면 우리는 또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며 땅 위에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으리라.
이처럼, 동기(動機)를 품은 채 변화하는 세계의 꼭대기에서 마치 달처럼 은은한 빛을 발산하는 유토피아는 우리 가까이 있었고, 있는, 어쩌면 이제 곧 가까이할 곳이다.
며칠 전부터 국경에선 포성(砲聲)이 울리고 있었다. 어제 오후 국경 근처에서 나무를 하다가 군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걸 봤노라고 단골 술집 지스타(G'star)에서 우연히 만난 중년 남성은 말했다. 남성은 자신이 도시 외곽에서 벌목꾼으로 일을 한 지 벌써 스물다섯 해가 넘었음을 우선 소개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야.” 남성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운을 떼곤 예사롭지 않은 근거를 털어놓았다. 곧 좌우로 고개를 돌려가며 그와 바텐더를 차례로 바라보곤 오백 밀리미터 유리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남성의 울대가 언젠가 책에서 본 밤나무 애벌레처럼 상하로 움직이는 것을 보며, 막심은 앞에 앉은 남성의 양손에 들렸던 꼭두각시처럼 그의 손동작에 맞춰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알아챘다. 남성은 밤 아홉 시가 되자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그와 바텐더에게 손을 들어 인사한 후 손녀에게 주려고 샀다는 인형을 챙겨 출입구 쪽으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몇 시간 만에 통나무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를 끌고 산책 나온 모습으로 보름달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사내가 떠난 후로도 삼십 분간 술을 더 마시다가 버스가 끊기기 전 일어났다. 그와 마주한 바텐더 그레고리는 언제나 그렇듯 미소를 짓곤 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막심 씨, 다음 주말에는 다른 외산(産) 술을 준비하죠. 정부에서 정한 가격은 같습니다.” 막심은 문을 나서기 전, 술집 안을 한 번 둘러봤다. 예전과 같은 풍경이 그를 서글프게 했다.
황색 나트륨등(燈)이 어둠을 밝힌 거리엔 주말 저녁의 여흥(餘興)을 가라앉히고 이제 귀가하려는 시민들이 형형색색의 무리를 이루어 곳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의 교통망은 도시의 혈관이었다. 이산화탄소처럼 시민을 들이고 산소처럼 밖으로의 배출을 반복하며 도시를 마치 숲처럼 유기적으로 살아 숨 쉬게 했다.
그때, 포성이 조그맣게 막심의 귓전을 때렸다. 방향을 정확히 짚어서 말할 순 없지만, 소리가 대충 어느 곳에서 시작해 도시로 흘러드는지는 알 수 있었다. 벌목꾼의 말처럼 도시에서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북쪽 국경 부근이 틀림없었다. 이스타리카의 수도(首都) 이호세를 가로지르는 카스틸로 강으로 검정 구정물이 조금씩 흘러들고 있었다. 습기가 찬 버스 창(窓)처럼 그의 눈도 뿌옇게 흐려졌다.
밤 열 시가 조금 넘어 귀가한 그를 부인은 현관 앞에 서서 맞았다. “오늘도 두 잔 마셨어요?”라고 묻는 부인에게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고선 곧장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다섯 살 난 딸 소피아가 입을 벌린 채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달빛에 그녀의 이마와 볼이 광채를 냈다. 그는 딸의 오른쪽 볼 위의 빛에 입을 맞추곤 욕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씻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곧 서둘러 나왔다. 그런 그를 부인은 소파에 앉아서 쳐다보곤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좀 깨끗이 씻지 그래요?” 오늘 밤은 당신과 더 오래 보내고 싶어서, 라고 그는 둘러댔다. 그녀는 그의 대답에 썩 만족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불쾌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의 왼쪽 옆에 앉아서 그녀의 왼쪽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눈길을 느낀 그녀도 그를 빤히 쳐다봤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그녀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갸웃하며 그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당신 울었어요?”
포성은 밤새 창의 미세한 구멍을 뚫고 집안에 울려 퍼졌다. 지루한 소리에 항복이라도 하듯 월요일 아침 햇살이 창안으로 거칠게 쏟아져 내렸다. 아침을 서둘러야겠는데, 막심은 침대 옆에 누운 부인을 흔들었다. “오, 지금 몇 시예요?” 그는 손가락 아홉 개를 그녀에게 내보였다. 대중식당(大衆食堂)은 아침 여덟 시 반부터 문을 열어서 딱 한 시간만 아침 식사를 제공했다. 소피아는 내가 유아원에 데려다줄게.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부인은 욕실과 방을 바쁘게 오갔다. “당신, 소피아 데리고 가서 식사 먼저 하세요. 전 준비할 게 좀 있어요.”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는 그러겠다고 답변하곤, 곧장 작은방에 가서 꿈나라에 머물러 있는 딸을 흔들어 깨웠다. 딸을 씻긴 후엔 서둘러 집에서 이백 미터 거리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아파트 출입구 위에 붙은 아날로그시계는 아홉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굶어야 했다. 하루 세끼는 정해진 시간(아침 8시 30분~9시 30분, 점심 12~13시, 저녁 18~19시)에만 배급이 됐다. 대중상점(大衆商店)에서 요기할 거리를 구할 수는 있지만, 습관이 안 됐을뿐더러 그게 식사라고 하기엔 간식거리 수준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무상(無償)이 아닌 것에 허투루 돈을 썼다가는 그가 좋아하는 술을 줄여야 했다. 다행히 어린 딸도 식당 음식을 즐겼다.
늦은 시간인 까닭인지 식당 안은 한산했다. 그는 딸이 먹을 요구르트와 신선한 과일, 빵 따위를 먼저 챙겼다. 그가 좋아하는 너무 딱딱하지 않은 마늘 빵과 삶은 닭고기, 커피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막심 씨, 모레 아침은 저와 아침 식사 당번을 해야겠네요.” 하얀 나무 의자에 앉아 마늘 빵을 뜯고 있는 그의 곁에 이웃 주민인 블레어가 만면에 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그렇군요. 아침 일곱 시에 주방에서 뵙지요, 라고 그가 말했다. “주민들뿐 아니라 내 가족을 위한 식사 준비이니만큼 이번엔 맛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게 좋겠지요? 다른 분들도 그 부분을 강조하더군요. 타인을 위한 식사를 손수 준비한다니 영광스러운 일 아닌가요?” 블레어 씨는 내뱉듯 말하곤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대중식당은 순전히 주민들에 의해 운영이 됐다. 조리와 배식, 설거지도 고스란히 주민의 몫이었다. 기름을 포함한 식자재는 정부에서 무상으로 제공했다. 무상급식이지만 급료에서 제외하니 무상이라 하기도 모호하긴 했다. 대략 한 달에 한 끼는 직접 당번으로 식당에 나가서 봉사해야 했다. 그래도 매일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 편하기도 하고 시간도 아끼면서 다양한 음식을 정해진 시간에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막심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누가 요리를 하느냐에 따라 확실히 맛이 달라지긴 했다. 그에겐 사소한 문제였다. 그는 소피아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좀 지루해지자 기웃하며 식당 이곳저곳을 살폈다. 이웃들의 표정은 평소와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딸의 손을 잡고 식당 밖에 나와 근처 시계탑을 보니 오전 열 시가 조금 지났다. 막심은 딸과 함께 마을의 어귀에 있는 유아원으로 향했다. 걷는 내내 간간이 포성이 들렸다. 어젯밤보다 소리가 커진 것 같은데, 라고 그는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그를 딸이 올려다보곤 웃었다. “아빠, 무서워?” 그는 딸을 향해 잡지 않은 손으로 괜히 가슴을 치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소피아는 이 년 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전까진 탁아소에서 국가가 맡아 키웠다. 출산 직후 이 년의 양육을 국가가 대신했다. 연장도 가능했다. 물론, 탁아소에 보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들 부부는 후자를 택하진 않았다. 그래서 출산 후에도 부인은 전처럼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그녀는 책을 만드는 일을 정말 사랑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책과 연애했을 거라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곤 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주말에 한 번씩 딸을 만나서 그런지 두 해의 공백이 그들 세 식구에겐 어떤 감정적 틈새와 서먹함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소피아가 돌아온 후, 그녀는 겉으로 표가 날 정도로 힘들어했다. 이전(以前) 그녀의 일상이란, 일과(日課) 시간에 일하고, 퇴근 후에는 작정하고 쉬는 거였다. 그 안으로 비일상적인, 즉 감싸고 보살펴야 할 대상이 들어온 거였다. 그래서 그런 거라고,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수 있다고, 그는 이해했다.
멀찌감치 유아원 입구에 남자 교사 한 명이 나와 있는 게 보였다. 얼굴이 보이자 교사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막심 씨. 오늘 좀 늦었네요?” 미안합니다, 선생님. 늦잠을 자버렸네요, 라고 그는 변명했다. “오늘은 다섯 시 정시에 소피아 데리러 오실 수 있죠?” 그는 시간을 꼭 지키겠노라고 약속했다. 지난번 늦어서 선생님이 퇴근도 못 하고 딸과 함께 정문 앞에 서 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전 아이를 사랑합니다. 독신이기 때문에 오후에 시간도 자유롭지요. 뭐 가끔 남자친구와 함께하긴 합니다만…… 무엇보다 소피아가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교사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래도 타인에게 폐를 끼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교사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곧 딸의 볼에 뽀뽀한 후, 직장으로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막심이 일하는 인쇄소는 시내에 있었다. 천팔백 제곱킬로미터 넓이의 소국(小國) 이스타리카에 있는 몇 안 되는 인쇄소 중 가장 큰 규모였다. 나라의 수도 한복판에, 그것도 정부청사와 인접해 자리한 이유였다.
열 시 사십오 분에 인쇄소 건물로 들어선 그의 눈에 복도의 유리창을 통해 바삐 움직이는 동료들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동료 몇 명은 목례(目禮) 후 다시 일했다. 마침, 부소장이 복도를 바삐 지나가다가 그를 보곤 인사했다. “막심 씨, 자제분은 유아원에 잘 데려다줬나요?” 막심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오른팔 안쪽에 서류뭉치를 끼고 있던 부소장은 이마의 땀을 왼손으로 닦으며, 좀 쉬었다가 열한 시부터 일을 시작하라고 당부한 후 급하게 돌아섰다. 아들딸을 유아원 또는 학교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는 직원은 한 시간 늦게 출근하여 삼십 분 일찍 퇴근하는 게 관례였다. 오늘 그가 왜 시간을 강조하는지 의아했다. 그의 눈빛에서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았지만, 아침에 먹은 음식 때문이거나 다른 개인적인 일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막심은 부소장과 헤어진 후, 곧장 자신의 작업장인 제이실(第二室)로 들어섰다. 흰색 작업복을 입은 동료 보리스가 윤전기(輪轉機)의 판통과 블랭킷(Blanket)을 살피고 있는 게 보였다. 뭐가 잘 안 풀리는지 그 앞에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막심은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오늘은 얼마나 인쇄해야 하는지, 어느 곳의 인쇄물인지를 평소처럼 물었다. 그는 “정부에서 급하게 인쇄해야 한다고 하던데. 양도 상당해.”라고 무뚝뚝하게 답변했다. 놀란 표정을 짓는 막심을 보며, “어쩌면 오늘은 오후 그룹이 와서 작업해야 할지도 모르겠어.”라고 마저 말을 이었다. 인쇄소 오후 그룹이라면 좀처럼 없던 일 아닌가, 라고 막심은 재차 물었다. 그는 “그렇긴 하지.”라고 무심히 대답하곤 손을 바삐 놀렸다.
막심이 알기론,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주중 근무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국가 안전을 위해 일하는 군인을 포함한 소수의 노동자는 특별히 삼교대(三交代) 또는 사교대로 일했다. 그 외에 오후 다섯 시부터 오후 열 시까지 일하는 그룹이 있었다. 퇴근 후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려는 시민을 위해 열리는 오후 상점과 술집, 도서관, 극장, 운동센터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오전 그룹보다 매주 열 시간 적게 일을 하기에 그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일했다. 그러니깐 보리스의 말에 따르면, 이처럼 오후의 작업 그룹이 만들어져 지원자들이 인쇄소에서 일한다는 거였다. 농한기(農閑期)에 있는 농부나 공장에서 생산할 목표량을 이미 채워 그곳에서 더는 작업이 필요 없게 된 노동자들이 다른 일, 특히 하고 싶은 일을 신청하고 기다렸다가 차례로 안배된 일을 했다. 그래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서 잉여 자원은 사회 곳곳에 먼저 배치되었다가 빈 곳이 생기면 그때 보충이 됐다. 어린이나 청소년, 노인, 환자를 제외하고 일하지 않는 시민은 없었다. 어느 그룹에 속해 어떤 일을 하든, 또 사업장의 매출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정부는 동일한 월급을 최소한으로 지급했다. “덜 해서도 더 해서도 안 된다.”라는 구호는 이스타리카뿐 아니라 주변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 국가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하나의 가치였다. 비록 급여는 적지만, 교통비, 식비, 교육비, 의료비 모두 무상이었기에 막심은 부족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다만, 술을 좋아하는 그에게 그것은 유상이어서 조금 부담이 됐다. 나라 안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은 인터내셔널에 속한 타국(他國)에서 들여왔다. 많이 나는 석탄과 가공한 목재는 이웃의 필요한 나라가 들여가고, 대신 부족한 공산품과 수산물을 들여오는 식이다. 물물교환이 기본이지만 통합된 화폐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수입에 차질이 생겼다. 그러니깐 며칠째 포성이 울리는 지점인, 이스타리카와 북쪽 국경을 마주한 이웃 국가인 미카라과에서 군부가 쿠데타를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직후다. 그들은 조직에서 일방으로 탈퇴한 후 경제적 고립을 선택했다. 곧, 미카라과에서 들여오던 철재와 각종 금속은 더는 수입이 되지 않았다. 불편한 건 분명했다. 재작년이 특히 그랬다. 다행히 이스타리카 정부는 매년 필요한 것을 정확히 통계 내고 계획하여 생산과 수입을 하였기에, 이후 오십 만 국민이 생활하기에 부족과 불편의 체감은 작았다. 물론, 남는 것도 없었다. 혹시 부족한 게 있으면 어렸을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학습하고 체득한 상호부조(相互扶助)의 원칙에 따라 서로 아껴 쓰고 스스럼없이 도왔다. 그들에게 모든 시민은 형제이자 자매인 셈이다.
막심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보리스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자기 일은 윤전기가 작동하고 나서, 엉덩이인 배지장치로 배설되는 인쇄물의 삼색(三色)이 서로 어긋나지 않았는지 혹시 번지지 않았는지 출력상태를 꼼꼼히 확인하고, 급지장치의 입에 물린 종이가 부족하다 싶으면 소에게 여물을 주듯 보충해 쌓는 거였다. 혹시 잉크가 부족한 것 같으면 보리스를 불렀다. 오늘처럼 멈춰선 기계를 두고 그가 할 일은 없었다. 아니, 손쓸 수 없었다.
몇 분 후에야 기계가 웅장한 소리를 방출하며 되찾은 생명을 자축했다. 통꾸밈 아래 기계의 뻥 뚫린 옆구리로 녀석이 삼킨 종이가 쏜살같이 대장으로 넘어가는 게 보였다. 곧장 항문으로 배설된 종이는 고얀 잉크 냄새를 풍겼다. 그는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따끈따끈한 배설물에 시선을 꽂았다. “이스타리카 총통 페레르”라는 문구가 하단에 선명하게 큼직이 박혀 있었다. 페레르는 지난해에, 그러니깐 매년 연말 있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였다.
그는 항문 아래서 빠른 속도로 쌓이는 전지(全紙) 더미에서 숙달된 손놀림으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눈동자를 좌우로 바삐 굴렸다.
친애하는 이스타리카 국민에게 고함;
사랑하는 나의 이웃이여, 형제여, 가족이여, 오늘 우리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했다. 우리 모두 주지하다시피, 인터내셔널은 선조들이 수백 년 전에 이룩한 고귀한 혁명이요 선의요 미래다. 그들의 인도에 따라 우리는 호혜주의와 상호부조의 원칙 속에서 줄곧 서로 돕고 평화롭게 살아왔다.
그런데 재작년 이웃 국가인 미카라과에선 불온한 사상을 가진 급진주의자들이 이러한 공식(共識)을 파괴하였다. 그들은 약육강식의 밀림을 꿈꾸는 자들이다. 밀림의 질서를 숭상하는 늑대들인 그들은 정부의 수장과 정부 요인들을 살해했다. 총칼을 앞세워 자국민을 겁박하고 곧장 사회를 통제하였다. 별도의 화폐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노동을 계급처럼 구분하여 임금을 차별하였다. 이로써 노동자들이 서로 시기하고 불신하게 조장하였다. 상급의 노동자가 하급의 노동자를 차별하도록 방임하였다. 상급자들이 그것을 특권으로 여겨 정부에 충성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렇게 창조된 소수의 부르주아지는 정부의 묵인하에 사업체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최대 이익을 내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기에 이른다. 남은 노동자에게 떠난 노동자의 일을 전이하는 방식으로 하급 노동자에 살인적 노동을 강요하였다. 이처럼 저임금 노동이 집중되고 실업이 증가하면서 나라 곳곳에 부랑자가 양산되었다. 이에 항의하고 반항하는 자들은 부르주아지의 요청에 따라 정부의 무지막지한 탄압을 받았다. 오늘, 밀림의 미카라과는 이처럼 계급의 분화와 계급을 통한 사회 통제 속에 새로운 경제 제도를 만들기에 이른다. 그것은 노동을 시간으로 계산하고, 또 나름의 효율성 이론에 대입하여 노동의 가치를 매겨선 급여를 차등 지급하는 제도이다. 그 이론이란 것이 논리성을 갖고 과학적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이 이 제도를 통해 국가와 사회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분명하다. 상급 노동자는 더 상급으로 분화되어 다른 이름으로 칭송되고, 하급 노동자와 중간급 노동자는 신분 상승을 위해 이전투구처럼 하고 있다. 헐벗은 시민들이 닭장 안의 닭처럼 서로의 목을 조르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이처럼, 미카라과는 불과 일 년 만에 완벽한 밀림으로 탈바꿈했다.
미카라과 정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정부 요인과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극대화할 요량으로 넘치는 철광석과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지난해부터 군수공장을 세웠다. 곧 무기를 대량 생산하게 됐다. 생산한 물건은 소비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더는 생산을 할 수 없다. 이제 그들은 생산과 소비의 순환을 위해 이웃 국가를 무력으로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우리의 이 땅을 말이다.
사랑하는 이스타리카의 국민이여, 북녘의 포성이 들리는가? 지금 적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 수백 년 자유와 평화가 자라던 밭을 엎어버리고 그곳에 폭력을 심으려는 자들이다. 우리 형제자매를 자신들 제도의 노예로 삼으려는 자들이다. 분개하라! 우리의 군인들은 참말로 용감히 싸웠다. 가족과 이웃을 위해 총을 든 무고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변변한 무기도 없는 우리의 군대는 이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 정의롭고 용맹하나 무력한 우리 군대를 부디 찬양하라! 그들이 흘린 피가 우리의 땅을 적시다 결국, 카스틸로 강으로 찰 때쯤이면 우리의 둑도 침략자들에게 무너질 것이다. 범람한 폭력에 우리 도시는 무참히 파괴될 것이다. 지금 나의 마음은 깨진 유리잔처럼 상처로 가득하고 되돌릴 수 없다.
나는 이스타리카의 최고 지도자 자격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히 청한다. 아니, 명령한다. 이웃의 인터내셔널로 도망하라. 여의치 않다고 해서 폭력에 절대 몸을 맡기지 말라. 차라리 생명을 소중히 여겨 적에 투항하라. 나는 이스타리카를 가슴에 간직한 채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스타리카의 국민에게 자비를. 이스타리카의 선조여, 칠흑의 밤하늘에 만월(滿月)이 되어 우리를 비춰 주소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인도해 주소서. 인민 만세!
막심은 수전증 환자처럼 자신의 손이 떨림을 알아차렸다. 손뿐 아니라 심장도 인기척이 없는 집의 닫힌 문을 두드릴 때처럼 박동이 점점 커졌다. 그동안의 불안이 암전된 무대에서 쓸쓸히 퇴장했다. 곧바로 공포와 아릿한 슬픔이 올라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굴욕적인 감정만 온 건 아니었다. 화염 같은 분노가 그것의 뒤꽁무니를 밟았다. 그는 이렇게 쉽게 모든 걸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곧장, 기계 옆에 붙어 냉각수를 채우는 중인 보리스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전단 내용을 읽어봤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몇 번 고개를 돌려 막심을 쳐다봤다가 소음 속에서 큰소리로 “안 읽어봤네. 그래도 부소장이 내용을 말해줘서 대충 알고 있지. 오늘 밤에 전역에 뿌려진다고 하더군. 그때 라디오 방송도 같이할 모양이야.”라고 또렷하고 태연하게 답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막심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주시하는데도 그는 끝내 눈길을 주지 않았다. 보리스는 숙련된 노동자이자 성실한 시민으로서 묵묵히 제 일만 할 따름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시민 대부분 자유의 소중함과 소소한 행복의 가치를 모른다. 너무도 익숙한 그것을……. 문 반대편의 벽시계는 열두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점심은 인쇄소 근방의 대중식당에서 배식(配食)했다.
막심은 점심을 거른 채 서둘러 작업실로 돌아왔다. 손엔 식당 주방에서 몰래 가져온 성냥이 들려 있었다. 인쇄 후 재단(裁斷)을 위해 작업장 구석에 적재해 놓은 전지(全紙) 더미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 하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마그네슘이 부족한 사람의 것처럼 떨리는 두 손을 몇 번 기운 내 털었다. 그래도 바람 속 갈대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다시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성냥 하나에 신중히 불을 붙이곤 망설임 없이 하얀 종이 덩어리 위에 던졌다. 화염이 기름진 활자를 따라 글씨 연습을 하듯 노랗게 붓질을 하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전체로 빨갛게 올라탔다. 불 속에서 문자들이 항복을 외치듯 심란한 비명을 내질렀다. 불의 기운이 강해지는 것에 정비례하여 흡사 까마귀 소리 같은 기분 나쁜 울부짖음도 점차 커졌다. 그때 마침, 일찍 점심을 마치고 돌아온 동료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의 아우성이 경보음처럼 시끄럽게 작업장을 울렸다. 그는 소동을 뒤로하고 당당히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곧장 시내의 광장으로 향했다. 카스틸로 강변의 하얀 자갈을 깔아 만든 바닥을 밟는 발바닥에서는 어느새 돌처럼 단단한 의무와 책임감이 느껴졌다.
머리 위로 내려앉는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그는 점심시간 휴식을 즐기는 군중 속으로 오수(汚水)처럼 조용히 스며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의 한가운데에 다다른다. 광장에서 서성이는 주위의 시민들을 향해 북녘을 가리키며, 함께 싸우자, 고 외치는 모습은 마치 자유와 희망을 찾아 거대한 로마제국에 대항한 검투사처럼 용맹스럽다.
순간, 막심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급히 돌렸다. 소피아의 목소리였나? 아내인가? 누군가 그를 부른 것 같다, 고 생각하며…….
아, 누구지? 몽롱한 안개 속에서 분명히 누군가 부르고 있었다. 뿌옇게 발목까지 차올랐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가 싶었다. 이제 비교적 또렷하게 들렸다. “민수야, 일어나! 곧 여덟 시인데 출근해야지!”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모든 게 꿈인 걸 알자, 해변에 쌓은 모래성을 향해 밀어닥치는 차가운 밀물을 보듯 허무함이 들이찼다. 이미 아침 햇살은 커튼 틈 사이로 몽정 직전 성기처럼 잔뜩 발기돼 있었다. 그 앞엔 지난 밤 먹다 남긴 족발 몇 조각과 쌈장, 마늘, 풋고추 토막들이 이제 필요 없는 기계의 부품처럼 해체돼 있고, 막걸리병도 속이 비어 균형을 잃은 채 앞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아, 너무나 생생한데. 마치 현실인 것 같았어. 그는 입안에 남은 돼지기름을 쩝쩝거리며 기억과 함께 다셨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직도 자니? 밤새 술 마신 거야? 에고, 빨리 장가나 가야지. 빨리 씻고 밥 먹어!” 어머니였다. 싸늘한 면박과는 달리 그녀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 차 보였다.
그는 집 건너편 공원 앞에 세워둔 자신의 흰색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노쇠한 말처럼 느끼한 저음을 내리깔며 계기판에 불이 들어왔다가 곧 식었다. “오늘은 일찍 올 거지?” 현관 앞에서 발에 운동화를 꿰신는 그를 보며 어머니는 물었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어머니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꼭 일찍 와.”라는 말로 배웅한 건 분명한데, 그 중간 그가 한 말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숙취 탓이라고 생각하곤 입에 바로 왼손을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술 냄새가 조금 나는 것 같긴 했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차키를 보자, 한번 왼쪽으로 돌려볼까, 하고 뒤틀린 생각이 뒷골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곧 덧없는 웃음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차키를 다시 오른쪽으로 힘껏 돌렸다. 계기판의 램프가 아까와 달리 이번엔 또렷한 빛을 간직했다. 뻑뻑한 핸들을 왼쪽으로 천천히 돌리며 액셀러레이터를 살짝 밟았다. 학창시절 잠깐 즐겨들었던 엘피판의 고전음악 같은 엔진 소리를 의사(意思)와 상관없이 억지로 감상하며, 털털거리는 차와 함께 그는 직장으로 향했다. 도로엔 출근 행렬에 오른 차량이 콩나물처럼 벌써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간혹 들리는 경적만이 그들이 식물이 아닌 인격체의 분신임을 항변하는 듯했다.
명인인쇄소. 회색 건물 옆구리를 따라 수직으로 길게 매달린 간판 아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에 주차할 곳이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흥분이 됐다. 그는 서둘러 차를 그곳으로 댔다. 콘크리트 턱을 힘겹게 오른 왜소하고 연로한 차량이 모처럼 노련미를 십분 발휘했다. 여유만큼 완벽한 주차였다. 차키를 왼쪽으로 돌려 엔진을 식혔다. 삐걱 소리의 마찰음과 함께 손끝에서 부조화를 느끼며 차 문을 열자, 이번엔 불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어젯밤 퇴근 전까지 듣지 못한 생경한 소음이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꿈속에서 들은 포성 같은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설마 그럴 리가 없지, 라고 작은 미소를 입꼬리에 물고 단정 지었다. 주차한 차의 꽁무니를 스치듯 지나서 인쇄소의 통유리 출입문의 한쪽을 살짝 밀었다. 펼쳐진 복도 정면으로 벽시계가 보였다. 아홉 시 팔 분. 복도를 향해 난 창(窓)을 통해 바삐 움직이는 동료들이 어른거렸다. 그들에게 들킬세라 그는 급히 허리를 숙이고 불편하게 걸음을 옮겼다. 제이실의 문 앞에 서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깊은 들숨과 날숨을 교대로 몇 번 뱉은 후, 티크(Teak)로 짜인 고동색 미닫이문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밀었다. 어릴 적 즐겨 놀았던 사방놀이를 떠올리며 문턱 안으로 발을 조심히 들여놓았다. 그리고 머리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제야 평소와 달리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서서히 고개를 들자, 동료들이 사슴의 순진한 큰 눈을 하고 멀뚱멀뚱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사장이 마을 어귀의 고목(古木)처럼 떡하니 버티고 섰다. 곧 소의 울음처럼 우렁찬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자네, 지각질인가?” 사장의 도톰한 입술은 부른 배보다 더 앞으로 나와 있었다. 민수는 차량 정체를 핑계 대며 다시는 지각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장은 입술이 조금 떨리는가 싶더니, 마지막 경고라는 말과 함께 눈을 사납게 흘기곤 총총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실장이 그런 그의 뒤통수에 대고 직각에 가깝게 넙죽 절을 했다.
“민수 씨, 어제 인쇄 상태 꼼꼼히 살펴봤어?” 어느새 직각에서 평각으로 돌아온 실장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는 물었다. “인쇄물 대부분 잉크가 번졌더라고.” 그는 당혹스러웠다. 야근(夜勤)까지 하면서 꼼꼼히 살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가사의’라는 낱말로밖에는 형언이 안 됐다. 에이(A) 혈형(血型)으로 매사에 살얼음 걷듯 신중하고 철두철미한 그에겐 적잖이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저 어젯밤 야근하면서까지 꼼꼼히 검수했는데요, 라고 용기 내어 실장에게 말했다. “그래서?” 실장은 뻣뻣하게 그를 내려다봤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다시 한 번 지지 않고 맞섰다. 그 한 번의 용기에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어 내부로 가라앉음을 느끼는 사이에, 실장은 이번엔 듣는 척도 없이 한마디 말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손해 본 종잇값은 네 월급에서 깐다.”
동료들은 점심을 먹으러 한참 전에 나갔다. 민수는 홀로 작업실에 남았다. 구석진 한곳에 적재된 인쇄물 사이를 오가며 검수하다가, 뒷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열두 시 이십 분. 늦은 시간의 두 배만큼 일을 더 하라는 실장의 분부가 있었다. 그는 그제야 작업을 멈췄다. 그리고 동료들보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작업실 문을 열었다. 불이 꺼진 복도는 가장자리 끝에 걸린 벽시계의 초침의 메아리가 선명하게 울릴 정도로 적막했다. 그는 회색 시멘트 바닥을 밟고 출구를 향해 내딛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문을 두 손으로 조심히 열었다. 갑자기 밀어닥친 빛으로 눈이 부셨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출근할 때 들은 소리가 여전히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그는 왕복 이차 선을 끼고 인쇄소와 마주보고 있는 분식점, 그리고 주변을 힐끔 둘러봤다. 평소 같지 않게 도로에 차들은 없었다. 도로 양옆의 보도에도 행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도로를 가로질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점심을 해결하려면 빨리 나오는 분식이 아무래도 좋을 거라는 분명하진 않지만, 경험상 거의 확실한 생각만이 머리 안을 오래된 유령처럼 맴돌았다. 무단횡단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가게 앞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분식점 안엔 주변 인쇄소와 출판사에서 일하는 구면(舊面)의 몇몇 직원이 보였다. 그가 눈으로 쑥스럽게 인사하자, 마침 소리 나는 입구 쪽을 바라본 그들도 반응하여 인사했다. 일부는 귀찮은지 그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출구 바로 앞 탁자가 비어있음을 발견했다. 의자는 이미 탁자에서 반쯤 나와서 볕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누가 덥혀놓은 자리처럼 따뜻했다. “뭘 드릴까?” 주인이 주방에서 하관 가득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나오며 물었다. 그는 김밥 한 줄만 썰어서 어묵과 함께 달라고 했다. 주인의 손에는 설거지용인지 조리용인지 모를 고무장갑이 씌어 있었다. 장갑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조개의 껍데기처럼 하얗게 반짝였다. 기름이 범벅된 모양이었다. 정신이 온통 주방으로 향해 있는 사이, 안쪽 테이블에 앉은 직원들의 대화에 귀가 번쩍 뜨였다. “오늘 꽤 시끄러운데!” “무슨 일이에요?” “혹시 알아요?” “근처 공단(工團)에서 시위한다잖아요.” “시위요? 무슨 시위?” “최저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을 단축해 달라는 거지, 뭐.” 그녀들의 대화가 그를 둘러싼 하얀 빛의 성안으로 화살처럼 날아들어선 귀에 사정없이 꽂혔다. 티브이(TV) 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주인에게 소리를 줄여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두 귀를 미어캣(meerkat)처럼 앞으로 쫑긋 세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시위하는데 왜 이리 시끄러워?” “경찰과 대치한다고 하던데. 에이, 몰라! 내 알 바 뭐야!” “공단 사람들 너무 하는 거 아냐? 우리 거래처에서 차량이 진입을 못 한다고 난리던데.” “그래? 그런데 그 사람들 대우가 좋아지면 우리 삶도 변하는 거 아냐?” “몰라! 내 알 바 뭐야! 바빠 죽겠는데.” “배가 부른 거지. 일하면 엄연히 알아서 돈 주겠다. 굶어 죽는 사람 없는 이런 좋은 나라에서…… 유토피아 좋아하네. 유(You) 터써야다. 유 텄어야.”
그는 점심을 입으로 먹었는지 귀로 먹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작업실로 돌아와 있었다. 한 시 십 분 전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인쇄기는 이골이 난 장인처럼 세 개의 통들을 유려하게 굴리고 있었다. 실장은 두 대의 인쇄기가 나란히 놓인 중간의 석 자도 안 되는 틈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그를 쳐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못 본 체하고 뒤돌아섰다. “어이, 민수 씨!” 실장이 부르는 소리가 기계음 속을 헤치고 그의 두 귀를 붙잡았지만, 그는 이번엔 못 들은 것처럼 그냥 인쇄기 배지부(delivery)로 발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등 뒤에서 고통을 느꼈다. 실장이 손바닥을 그의 등에 대고 있었다.
“민수 씨, 불렀는데 그냥 가면 어떡해?” 그가 못 들었다고 답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척한 말이 쏟아졌다. “그건 그렇고. 오늘 야근 좀 하지?” 네, 라고 한 음절에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도 할 일도 없잖아? 요즘 선거 홍보물 찍느라 바쁜 거 알지?” 그런데요, 라고 재차 볼멘소리를 냈다. 짧은 단어 하나하나를 뱉을 때마다 엄청난 체력이 소모되었다. 지쳐갔다. “그런데요? 이 봐, 여기 직원들은 다 가정이 있다는 거 알잖아. 재단하던 이씨도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못 나온데. 자넨 시간 많잖아. 그러니 자네가 배려를 해야지.” 제가 왜? 부당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자네, 이럴 거야? 남이냐고? 그리고 문 옆에 똥차 민수 씨 꺼지?”
민수는 제이실 옆 재단실에 혼자 남아서 오후에 옮겨진 전지를 살폈다. 나방처럼 천장에 달라붙은 여섯 개의 형광등은 다 켜지지 않고, 그 반인 세 개만 빛을 냈다. 창문도 없이 침침한 공간과 아련한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도계장(屠鷄場)에서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기다리는 육계(肉鷄)처럼 토막 나길 기다리는 전지와 전지, 그리고 무수한 전지뿐이었다. 순간 어렴풋이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급히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조금 전에 누굴 생각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실장은 현관 앞 임원 자리에 주차를 문제 삼으며 전지를 재단해 놓으라고 위력을 실어 당부했다. 말이 당부지 협박에 가까웠다. 그는 억울함과 침통함에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서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조그만 생명이 꿈틀거렸다. 휴대전화의 진동이었다.
“민수니? 퇴근 아직 안 했니?” 전화기 너머에서 들린 건, 마치 수심(愁心)이라는 날실과 모정(母情)이라는 씨실의 거미줄에 속박된 듯 미세하게 흔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만약 그녀를 볼 수 있다면, 그녀는 그 순간 불안감에 여린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을 거다.
“저, 오늘 일이 많아서 야근 중이에요.”
“그래…… 밥은 어떡하고?”
“실장님이 시켜주셔서 직원들과 함께 먹었어요.” 그는 천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좋은 분이구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머니는 미련이 남은 듯 그가 전화를 끊기만 기다렸다. 뭔가 애처로움을 느끼며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전원 버튼을 눌렀다. 곧 어머니가 전화한 이유가 궁금했다. 오전에 한 말과 상관이 있을 테지만, 그 말의 연유를 알 수 없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오늘 날짜를 떠올리며 아무리 연관을 찾으려고 해도 그가 출근길 중간에 한 말도 그렇고 오늘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그에게 전화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결국, 근래 들어 늦은 귀가가 잦아서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왠지 찝찝한 기분을 머리에서 지우지 못한 채, 그는 적당한 양의 전지 묶음을 안아서 재단기로 옮겼다. 재단기 위로 뭉치를 올려놓은 후 굽은 어깨를 폈다. 그때 그의 눈동자와 망막 사이에서 지난밤의 꿈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이상야릇하다. 어찌 내가 의식 속에서 뇌수(腦髓)로 조합하여 내 입으로 뱉은 말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나의 뇌수가 무의식중에 만들어낸 형이상학적인 환상이 현실처럼 이리도 선명하게 떠오른단 말인가! 혹시…… 치매? 그는 자신의 나이를 세어 보곤 서른 중반에는 너무 이르다고 고쳐 생각했다. 그런데도 앙상한 나뭇가지에 남아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처럼 불안은 미처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전지를 살짝 들어 절단하기 좋게 칼날에 맞춰 놓았다. 그러자, 다시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또렷한 영상이 가슴을 차고 올라왔다. 그래, 이거는 아니야!
민수는 복도 끝에 있는 사장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몇 번 심호흡했다. 문의 손잡이를 잡고선 사장과 악수한 적이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기억이 없었다. 기억은 이곳에서 수혜(受惠)한 부당한 노동과 차별로 빼곡했다. 다른 기억은 섣불리 들어올 수 없을 정도다. 그는 이번엔 확고했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오른쪽 손끝으로 문 옆의 전원 스위치를 찾았다. 이미 학습된 촉각대로 스위치를 위로 올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왔다가 되돌아갔던가, 기억을 더듬으며 수효를 세고 있는 사이에 밝아진 공간 안이 환히 보였다. 그의 집에 있는 식탁보다도 더 큰 고동색 책상, 그 앞엔 응접용 탁자와 사인용(四人用)으로 보이는 가죽 소파가 동색(同色)으로 어울려 있었다. 흰옷을 입은 그와는 좀체 동화될 수 없는 색깔로 보였다. 책상에 꼭 끼인 의자 뒤로는 그의 키보다 더 크고 너비는 여덟 자는 족히 돼 보이는 책장이 병풍처럼 자리했다. 그는 곧장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서 의식(儀式)을 치를 깨끗한 종잇장을 찾으려는 생각이었다. 사직서를 쓰기에 적당한 게 있는지 서류를 뒤적였다. 그때 전화기 옆에 놓인 서류철이 눈에 띄었다. 앞에 쓰인 글자가 무척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임민수 보고”. 그는 묘한 흥분을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서류의 덮개를 열었다.
민수는 통유리 현관문을 두 손으로 힘껏 열어젖혔다. 밤공기엔 분노인지 슬픔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감정이 유령처럼 서성거렸다. 달이 밤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달에서 어른거렸다. 무슨 일로 어머니가 전화한 건지 다시금 궁금해졌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곤, 꼭꼭 힘을 줘 화면 속 숫자를 눌렀다. 연결음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어머니의 흔들리는 음성이 들렸다.
“어머니, 아까 왜 전화하신 거예요?”
“…… 또 잊은 거야? 오늘이 네 아비 제삿날이잖니……”
민수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두 달 전, 이곳 인쇄소에서 재단 일을 하던 아버지는 오른쪽 손가락 네 개가 두 마디씩 절단되는 사고를 입었다. 그 후, 부친은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평소 앓던 당뇨의 합병증으로 결국 사망했다. 위로는커녕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너무도 급작스러운 죽음에 그의 어머니는 인쇄소를 거의 매일 찾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는 날짜를 지정하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수개월째 방에 틀어박혀 지내던 그에게 인쇄소에 출근하라고 말했다. 어린 그였지만 어머니가 사장에게 부탁한 게 뭐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의 검정 눈동자에는 절망과 희망의 빛이 교차해 아른거렸다. 그때부터 생전의 아버지가 몰던 자동차는 자연스레 그의 출퇴근 수단이 됐다. 그리고 십 년 넘게 일하며 그는 많은 동료를 사귀었다. 아니, 사귀었었다. 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그네처럼 미련 없이 떠나갔다. 그 중엔 노동시간 엄수를 요구하다 쫓겨난 이들도 있고, 노동조합을 만들려다 해고된 이들도 있고, 사장이나 실장의 눈 밖에 나 일을 그만둔 이들도 있었다. 강산과 나라가 변하는 사이에 그도 노동운동이 뭔지 궁금해, 그들과 가까이 지내며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난 후, 그는 주인 없는 암자처럼 외톨이가 되었다. 사장은 그런 그가 눈엣가시였던 거다.
그간 불합리함의 근원이었다니. 굵은 매듭으로 엉켜 풀 수 없을 것 같던 실타래가 풀리자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그렇게 체증이 가라앉는 걸 느끼는 사이, 출근길에 그가 모친에게 한 말이 슬며시 머릿속을 채웠다.
“오늘은 빨리 올게요.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와 엄마 단둘뿐인데.”
오늘 올게. 빨리 올게. 빨리. 아빠 엄마 나. 오늘. 나 엄마. 단둘. 나. 세상. 기억의 편린(片鱗)과 함께 엄습한 복잡하고 착잡한 심경의 수렁 속에서 그는 의식을 놓치고 말았다. 순간, 휴대전화가 그의 손에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 속에 도시가 잠긴 게 꼭 귀머거리가 된 것 같았다. 이제 검정 선글라스를 쓴 것처럼 사방이 숯처럼 새까매졌다. 별안간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올라왔다. 그로써 숨구멍이 막혔는지 갑갑해졌다. 답답함에 가슴을 부여잡고 걷고 있으려니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하늘은 어제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물이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건지, 가슴에 불덩이가 분출하면서 뚫린 심장의 중심부에서 시작해 몸 전체로 마치 지하수 펌프처럼 점점 차오르는 건지는 자각(自覺)할 수 없었다. 그래도 물기는 강물의 하얀 소용돌이처럼 분명히 그의 전신을 휘감았고, 그는 그렇게 뜨거운 습기에 젖어 피켓을 든 시위대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달무리가 동그라미를 또렷하게 그린 보름달 아래서 군중은 모두 하얗게 보인다. 그들의 힘찬 구호 소리에 도시의 밤은 검정 망토를 드리운 채 그 속에 얼굴을 숨기고, 경찰의 뒤편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는 현란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서 시민들은 연인의 팔짱을 낀 채, 여름 한낮의 모래사장에 피어오른 아지랑이와 같은 금빛 환상을 꿈꾸며 만면 가득 웃음을 늘어트려 걷고 있다. 밤하늘을 향해 별빛 같은 희망을 갈구하며 내민 손바닥에, 숱한 발걸음들이 지나간 유토피아의 땅 위엔 어느새 빗물이 고이고 있다.
(끝.)
글 - 박세환
출처 - 창작21 / 2018 창작21 가을호 신인상 소설 당선작 https://cafe.daum.net/changjak21/C6YT/5
[t-21.02.04. 20210204-17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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