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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교육(인문.철학.교양.

김경일-적정한 삶/1. 결정의 순간, 감정에게 묻다

by 탄천사랑 2021. 6. 15.

김경일 - 「적정한 삶



코로나 사태가 본격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자 사회 구성원들의 감정 상태는 거대한 변화의 파도를 타고 있다. 
그것도 최대한 마주치기 꺼려졌던 부정적인 감정으로 말이다. 
바이러스 발생 초기에는 미지의 질병에 대한 불안, 나도 감염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세계를 휘감았다.

이는 곧 방역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집단 감염의 원인이 된 사람이나 단체를 향한 분노로 번지며 
신천지 교인들이나 이태원 클럽 이용자들에 대한 수위 높은 비난과 혐오 언론으로 번졌다. 
정부와 의료진의 노력에도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전반적인 우울감이 감돌았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실감, 나쁜 뉴스를 반복적으로 접할 때마다 느껴지는 슬픔, 
안정되지 않은 경제생활과 앞날에 대한 걱정, 

자포자기 상태와 무기력이 미세먼지처럼 자욱하게 우리를 감싼 것이다.

불안, 공포, 분노, 무기력, 우울. 
앞서 나열한 감정들은 한 인간이 평생 동안 몇 번에 걸쳐 조금씩 느껴도 굉장히 힘든 정서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짧은 기간 안에 강력한 부정적 감정 덩어리에 제대로 얻어맞은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타격은 생각보다 인간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기에 인지심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종류와 강도에 대해 먼저 면밀하게 짚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독자들 중에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크게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감정이란 갑자기 생겨났다가 어느덧 흘러가 버리는 것이고, 
작금의 상황에선 감정보다 더 시급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 수두룩하니 말이다. 
특별히 인지심리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이라면 

기대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이야기가 흘러간다고 느끼실 수도 있다.

인지심리학은 심리학 중에서도 이공계열이라 불리는 학문이다. 
나의 다른 저서인 ≪지혜의 심리학≫이나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등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인지심리학에 대해 정의하자면 ‘생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밝히는 학문’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생각의 작동 원인을 밝혀내서 꾀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역량을 높이는 것이다. 
인간이 더 좋은 판단,  더 탁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고, 
문제해결 능력을 높이며,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인지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목표 중 하나다.

상담심리학이나 임상심리학 등 우리가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다른 심리학들은 
우울, 불안, 강박, 다중인격, 공황장애 등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두운 측면들을 보살피고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들을 한다. 

그에 비하면 인지심리학은 다분히 역량 지향적인 학문인 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인지심리학자라는 작자가 스쳐 지나가면 그만인 감정을 본격적으로 풀어 보겠다고 하니, 
이 책 생각보다 너무 말랑말랑한 게 아닌가! 
그러나 인간의 판단과 결정 능력에 대한 연구를 해 온 많은 학자들이 
감정이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일상과 인생을 지배한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말하자면 이성과 논리만이 역량이 아니라 감정도 엄연한 역량이라는 것이다.

감정이 왜 중요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감정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내린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보이지 않게 감정이 개입한 결과다. 

감정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본 적이 있는가? 
극심한 슬픔에 빠졌을 때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경험쯤은 한 번씩 해 봤을 것이다. 
신체적인 소화의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 뇌의 판단 능력에 대한 이야기다. 
음식을 떠서 먹기 이전에 뭘 먹을지부터 정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비정상적인 감정 상태의 뇌는 중요한 결정뿐 아니라 
내가 뭘 먹어야 하는지와 같은 쉬운 문제조차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다. 
실제로 심리학에서는 결정장애와 정서장애를 동의어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는 fMRI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버드 대학의 제니퍼 러너 교수 연구진에 의하면 판단과 결정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 뇌에서는 감정을 다루는 영역인 변연계와 전두엽에 불이 켜진다. 
한편 술김에, 홧김에 엉뚱한 결정을 할 때는 전두엽과 변연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엔 최소한 나에 비해 감수성이 발달한 아내의 결정력에 감탄할 때가 많다. 
크고 작은 집안일에 대해 같이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가도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라고 시원하게 말해 주거나 
“이건 아닌 거 같아.”라고 딱 잘라 결정 내려주니 말이다. 

저녁 반찬 같은 사소한 문제부터 아이 교육에 대한 중대한 문제까지 결정은 번번이 아내의 몫이었다. 
요즘 난 그냥 아내가 선택한 걸 얌전히 따르는 편이다.

비단 우리 집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전통적인 한국의 가정에서 상당 부분 여성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결정권이 어머니에게로 넘어가는 현상 또한 자주 볼 수 있다. 
감정이 발달해야 결정도 잘 된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감수성이 발달한 여성이 결정을 잘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짚고 넘어가자면, 남녀의 선천적인 뇌의 차이점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남녀의 뇌는 분명히 다르지만 특별한 결과를 이끌어 내기에 미미한 수준이다. 
당연히 여성보다 감수성이 발달한 남성도 있고, 결정을 어려워하는 여성도 얼마든지 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감정이나 결정력에도 후천적인 영향이 존재하며 
다른 역량들과 마찬가지로 갈고 닦고 개발해야 하는 영역이란 것이다.

전통적인 한국 사회에서 남자아이들의 감정은 여자아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억압받아 왔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기쁜 일이 있을 때 교실 안에서 좋다고 팔짝팔짝 뛰며 박수를 치는 건 
여자아이들이고 남자아이들은 애써 심드렁한 척한다. 
가슴 아픈 순간에도 여자아이들은 소리 내어 울지만 남자아이들은 슬픔을 표현하지 않으려 애쓰지 않는가. 

안타깝게도 나이가 먹을수록 그 경향은 강해진다. 
근거를 들어 설득하려고 애쓰다 보면 논리력이 향상되듯, 
감정 또한 폭넓게 이해하고 정교하게 표현하다 보면 개발되고 다듬어진다. 
살면서 감정 연습을 멀리한 한국 남성들이 나이가 먹을수록 중요한 결정 앞에서 
하염없이 주저하거나 판단을 미루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남성 독자들이 한국 여성들을 덮어놓고 부러워할 건 아니다. 
감정의 억압으로 인해 생겨난 세계 유일의 정신 질환이 우리나라에는 있으니, 

‘화병’이라고 들어보셨는가. 
미국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인 DSM-IV에는 이 질환의 명칭을 
‘Hwa-Byung’이라는 한국식 표기 그대로 등재해 놓았다. 
이만하면 한국 여성 고유의 증상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한국 사회는 여성의 감정 표현에 대해 관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부정적이고 격한 감정 표현만큼은 엄격하게 통제해 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특별히 표출해야 해결되는 ‘화’라는 감정이 오랜 시간 속박되다 보니 
많은 여성들이 가슴통증, 속쓰림, 이명, 근육통 등의 여러 신체적 질병 증상을 호소하곤 한다. 
사회가 인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지 않으면 결국 병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 다스리는 것은 불쾌감을 피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다가 아니다. 
우리가 감정을 알아야 하는 진짜 이유는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판단의 질을 향상시켜 탁월하고 유능한 인재가 되기 위함이다. 

같이 일하기 정말 힘든 상사는 못된 상사, 

게으른 상사가 아니라 결정을 내려 주지 않는 상사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면서 방금 저 문장을 언급하면 

자리에 앉은 80% 이상의 청중들이 목이 뽑혀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일이 진전되지 않아 고통스러웠던 경험, 

목적과 방향이 결정되지 않아 헤맸던 경험이 뼈에 사무쳤단 소리다.

좋은 결정은 그만큼 중요하다. 
기업의 높은 직책에서 인정받는 사람 중에는 소위 말하는 좋은 ‘촉’을 뽐내는 분들이 있다. 
촉이 좋다는 것은 감수성이 좋다는 뜻인데 이를 있어 보이는 말로 바꾸자면 ‘멘탈 시뮬레이션’이다. 
이들은 느낌이 좋으면 온 힘을 다해 진행하고 뭔가 께름칙하면 잠시 멈추어 살핀다. 
얼핏 보면 비과학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그동안 축적된 경험적 데이터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사실 ‘싸하다’는 기분은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겪고 기분이 몹시 나빴던 경험적 판단이 발동한 결과니 말이다. 
이처럼 정보가 들어온 찰나에도 뇌 안에서는 인지, 해석, 판단, 결정 등 

오만 가지 일들이 상호작용하여 벌어진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와 같은 단순한 결정을 할 때에도 머릿속은 바쁘다. 
과거의 경험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위험 요소를 피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상대와 공동체의 분위기를 읽어 내야 한다. 
두 시간 반 뒤에 돈가스를 먹어야 기분이 좋아질지, 

설렁탕을 먹어야 흡족한 오후가 될지 순간적으로 가까운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그것을 해내는 것은 놀라운 능력이며 이때 바탕이 되는 것은 감정이다. 
정서가 발달해야 예측력 또한 좋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일 중에 예측과 결정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 보니 정서에 기반을 두어 일관적이면서도 확실한 결정을 내려 주는 상사가 있다면, 
그 조직은 여타의 평범한 조직과는 다른 면모를 보일 수밖에 없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금세기 최고의 혁신적인 기업가로 손꼽힌다. 
그가 살아생전 내놓았던 많은 제품들은 세계인을 매료시키고 마니아층을 형성하였으며
IT뿐 아니라 인류의 새 역사를 썼다고 평가받는다. 

그 대단한 스티브 잡스가 제품 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요인이 

다름 아닌 감수성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제품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탁월하고 시장 경쟁력이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소비자들은 어떤 생각의 작동을 통해 제품을 구입하는가. 
디바이스에 대한 분석이나 경제적 평가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움직여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은 강력한 감정이다. 
기술을 내세우기보다는 고객을 감탄하게 만들고 애착을 불러일으키는 감성을 공략하라. 
이러한 철학을 기반으로 감수성을 건드리는 제품을 요구했으니, 
기능을 중시하던 엔지니어들은 CEO의 확인을 받을 때마다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2007년에 아이폰 개발 시기엔

파워 버튼이나 홈 화면 같은 사소한 디자인들 때문에 번번이 퇴짜를 놓기 일쑤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고집스러운 CEO의 팔에 소름을 돋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제품은 
이제 인류의 생활사를 바꿔 놓은 중요한 상징으로 불리게 되었다. 
감정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기업가가 이끈 변화가 아닐까.

나의 뇌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활동을 명확히 인지하고, 조절하고, 풍요롭게 표현하는 것. 
더 나은 일상과 인생을 열어 주는 작지만 위대한 비밀이다.   
이제, 억눌리고 속방당해 왔던,

망가지고 다쳐도 무심하게 내버려졌던 인간의 감정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살펴볼 시간이다.

역사적인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인해 처절하게 혹사당하고 있는 나와 

주변인들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실험 테이블 위에 올려 보자. 

괜찮은지 물어보며 하나씩 하나씩 공부해야 한다. 
나의 감정을 잘 알아야 감정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p27)
※ 이 글은 <적정한 삶>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경일 - 적정한 삶
진성북스 - 2021.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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