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정우 - 걷는 사람, 하정우」
하루 10만 보, 가능할까? 뭘 고민해? 일단 해보는 거지!
멤버들은 디데이를 앞두고 체력 관리에 들어갔다. 10만 보 걷기란 약 84킬로미터를
하루 만에 걷는다는 것이다. 마라톤 풀코스의 두 배 정도 되는 거리이고 보통
걸음으로 약 스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하와이에서 평균 4만 보 정도를 찍는 걷기 베테랑들이라고는 해도,
어느 날 갑자기 10만 보를 덜컥 걷기는 힘들다. 5만 보 정도까지는 별다른 준비
과정이 없어도 다들 해내는 편이지만, 10 민 보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10만 보의 날'을 위해 서서히 걸음수를 늘려나가면서 몸이 놀라지 않도록
준비하기 시작했다. 며칠에 걸쳐서 4만 보에서 5만 보로 슬쩍 늘려서 걷고,
그다음에는 5만 보에서 7만 보로 또다시 늘려 걸으면서 계속해서 몸을 적응시켜 나갔다.
2016년 10월 15일, 드디어 찾아온 하와이 10만 보의 날. 우리는 한국 시간 기준으로
핏빗의 걸음수가 0보로 세팅되는 새벽 5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걷는 날에는 흡사 육상선수처럼 기는성 운동복을 갖춰 입는다. 통기성이 좋은 반팔티에
반바지, 그리고 사뿐한 운동화를 착용한다. 특히 반바지는 관절이 계속 접혔다 펴지는
무릎을 스치지 않도록 무릎 위에서 딱 떨어지는 길이로 선택한다.
한참 걷다보면 아무리 깃털 같은 옷자락이라도 관절에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도
성가시고 힘들어지는 법이니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처음엔
제 몸통만 한 배낭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컵이며 옷을 가방에 주렁주렁 걸고 걷다가,
나중에는 하나하나 내려놓고 짐을 버리며 걷게 된다 하지 않던가.
평소에 무던하던 사람이라도 체력적으로 한계 상황이 오면 한없이 만감 해질 수 있다.
뾰루지 난 피부에 스치는 깔깔한 옷의 감촉, 미처 자르고 오지 않은 거스러미 등
작은 불편함조차 지옥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나는 출발 전 양말의 탄성까지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발을 너무 옥죄어서 갑갑하게
느껴지거나 반대로 너무 헐거워서 발목에서 줄줄 흘러내리지 않는 양말을 신어야 한다.
몸이 받는 하중은 최소화할수록 좋으니 가방은 간편한 히프쌕 정도로 준비한다.
그 안에 넣을 필수품은 선불록과 파우더, 걷다 보면 계속 땀이 나기 때문에 살이 접히는
부분이 쉽게 짓무르고 땀띠가 난다. 아침 출발 전에 바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쉬는 시간마다 부지런히 덧발라주어야 한다.
10만 보 대장정의 날, 우리는 종일 걸었다. 새벽 5시에 출발해 아침 9시까지 걷다가
아침밥을 먹고 잠시 휴식 시간을 기진 뒤, 낮 12시부터 점심을 먹고 또 걸었다.
자정까지 계속 걸었다. 물론 걷는 시간 1교시 오십 분, 쉬는 시간 십 분은 꼬박꼬박
지켜가면서,
날씨가 적당히 흐려서 좋았다. 걷기에는 뙤약볕이 내리쬐고 일교차가 큰 맑은 날보다는
구름 지붕이 드리운 흐린 날이 좋다. 게다가 이날은 도중에 부슬비까지 내려서 더위와
열기를 식혀주었기에 걷기에는 최적의 날씨었다.
만약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첫 10만 보 여정에 낙오자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10만 보를 완주하려면 '하늘의 도움'도 약간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1만 보 걷기도 어려워하는 판에 그 열 배인 10만 보를 하루에 다 걷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자의 '깡다구'가 필요하다. 돌아보면 다들 대체 어떻게 해낸 건지 놀랍기만 하다.
일단 5만 보까지는 괜찮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두들 컨디션이 좋았고,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낙관이 멤버들 사이에 흘렸다. 표정도 밝고 대화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런데 5만 보가 지난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급변했다. 사람마다 그 고비가
찾아온 시점에 약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5만 보를 넘어서자 어김없이 위기가 찾아왔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자연히 대화도 급격하게 줄어든다.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면서 가보려는데, 다리는 돌덩이처럼 무겁고 발바닥이 화끈거려서
땅을 디딜 때마다 너무 아팠다. 무엇보다 숨이 가쁘고 열이 올라서 도저히 더는 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점(死點)이다.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은 순간, 옷은 땀에 푹 절었고 머리칼은 만신창이다.
몸도 몸이지만 무엇보다 더 이상 걷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난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포기 선언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그 고통을 문장으로
엮어서 입 밖에 내보낼 힘조차 없다. 그냥 걷는다. 무아지경 상태로 걷는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버터서 7만 보까지 찍으면 아까 사라 젔던 낙관이 잠시 찾아든다.
어쩐지 해볼 만한 것 같고, 곧 길 끝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의 순풍이 살짝 볼을 스친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라. 여기서 5천 보 가량만 더 걸으면 글쎄 그 마음이 또 뒤집히니까.
'아까 진작 그만뒀어야 했나'하는 후회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린다. 다리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동하는 고장 난 부품 같다. 한 보 한 보가 너무나 힘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귀찮다'는 생각마저 든다. 고통보다 사람을 더 쉽게 무너뜨리는 건, 어쩌면 귀찮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다 견뎌내면 의미가 있으리라는 한 줌의 기대가 있지만,
귀찮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거니까, 이 모든 게 헛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는 거니까.
아니 대체 하와이까지 와서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뭐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가고 있는 거지? 10만 보를 걸어서 뭐하자고? 근본적인 회의까지 들기 시작한다.
걷자면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참 모르겠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걷는 목적을 잃어버렸다.
그 당시에는 다들 이런 고통과 회의에 푹 잠긴 상태로 계속 걸어서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흥미롭게 느껴진다. 하와이에 왔으니 10만 보 걷기에 도전해
보자며 다 함께 목표를 설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걷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으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 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 해 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
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포기할 만하니깐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
장거리를 걸을 때는 지치기 쉽다. 판단력도 흐려진다. 그러므로 걷는 시간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때가 있다. 바로 '쉬는 시간'이다. 평소보다 많이 걸을 때는 운동화 속의
아주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가 발바닥 전체를 망가뜨릴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면 잘 참고 걸어왔던 그간의 시간도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쉬는 시간에는
지쳤다고 숨만 훅훅 몰아쉴 것이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운동화 속과 두 발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며 다음 오십 분을 준비해야 한다. 지쳤다고 그냥 늘어진 채로 목구멍에
물만 들이부으면 영락없이 탈이 난다. 누구도 쉬지 않고 계속 걸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곧 10만 보 고지가 가까워온다. 목표점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다들 조금씩
여유를 되찾는다.
도저히 나가서 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혹은 걷다가 체력이 달려서 집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었던 날, 그런 순간들을 견디게 만든 것은 결국 걷기를 다 마치고
돌아올 때의 성취감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그러니 어쩌면 한 걸음 한 걸음은
미래를 위한 저축 같은 것이다. 지금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이고 오히려 괴롭기까지
하지만 훗날 큰 감동과 의미를 선물해주니까.
마침내 우리는 그 숱한 고뇌와 체력의 한계를 딛고 10만 보를 찍는다. 터널 터널
걸음 속도를 늦추면서 서로 간격을 좁히고 핸드폰 카메라 앞에 옹기종기 모인다.
웃는다. 장난치고 떠든다. 사진을 찍는다. 일상의 어느 때처럼,
가끔 그날의 동영상을 꺼내서 바라본다. 지쳤지만 만족스러운 표정, 떠들썩한
환호성이 그날을 웃으며 떠올릴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다시 10만 보에 도전하겠냐고
묻는다면 쉽사리 당장이라도 다시 하겠다고 대답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은 그날의 경험은 내게 자신감을 더해주었다.
앞으로의 내 삶에 어떤 날들이 펼쳐지든 건강하게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만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는 겸허함도 덤으로, 그저 다리를 뻗고 팔을 흔들며 끝까지
걸었을 뿐인데, 내 삶의 어떤 터닝포인트도 살짝 넘어선 것만 같다.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언젠가 나의 인생길에도 시점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때도 나는 하와이에서 10만 보를' 찍었던 기억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버티고 걸어 나갈 것이다. - p82 -
※ 이 글은 < 걷는 사람, 하정우 >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하정우 - 걷는 사람, 하정우
문학동네 - 2018.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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