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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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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 번은 임정로드를 걸어라 - 독립정신 회보

by 탄천의 책사랑 2021. 5. 19.

 


일생에 한 번은 임정로드를 걸어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순례길 위에서의 기억 -
지난 2019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당시 작은 출판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던 나는 오마이뉴스 기자들과 함께 국내 최초 임시정부 여행가이드북 

『임정로드 4000km』를 출간한 바있다. 
책이 출간된 후, 많은 시민들이 상하이로, 난징으로, 충칭으로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아 순례길 여행에 올랐다. 
너 나 할 것 없이 길 위에서 찍은 인생샷을 SNS에 올리는 것을 보면서 기획자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

해가 지나고 2020년이 밝았다. 
그 사이 내 삶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임정로드 4000km』를 만드는 과정에서, 잠시 내려놓았던 역사공부의 꿈을 다시 꾸게 된 것이었다. 
결국 나는 퇴사와 함께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진학을 결정한 뒤에도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다시 공부의 길을 걷는 게 맞는 걸까 
번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백범 김구 선생의 뜻을 계승하고자 만들어진 시민단체 ‘청년백범’에서 

5박 6일의 임정로드 답사단을 꾸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소식을 접하자마자 무조건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생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옳은 것인지 그 답을 임정로드 위에서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청년 백범 답사단의 일원으로 임정로드 순례길에 오르게 되었다.

답사단은 2020년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중국 광저우 (廣州) - 류저우 (柳州) - 쭌이 (遵義) - 치장 (綦江) - 충칭 (重慶)에 이르는 루트를 탐방했다. 
한인 청년들이 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군사 훈련을 받았던 광저우의 황포군관학교, 
임시정부와 대가족들이 적의 공습을 피해 힘겹게 넘어 가야만 했던 72굽이산길 등 
대륙 곳곳에 임시정부와 우리 한인 애국지사들의 흔적이 배어있었다. 
어느 한 군데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우리 역사의 흔적들이었지만, 
지면의 한계상 특히 인상 깊었던 장소 몇 군데를 소개하고자 한다.

시멘트벽에 새겨진 다섯 글자, ‘김원봉 집터’
답사 5일차에 찾은 충칭의 대불단정가(大佛段正街) 172호. 바로 약산 김원봉 장군의 집터였다.
그러나 답사단 인솔자가 
"우리가 오는 게 마지막 일지도 모른다"고 했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주변 풍경이 달라지고 있었다. 
『임정로드 4000km』 편집 과정에서 사진으로 현장을 봤을 때보다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미 주변 건물은 다 헐렸고, 약산의 집터 역시 헐리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었다. 
모두들 철거되기 전에 눈으로나마 담아두자는 생각으로 구석구석 훑어보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벽을 더듬어 보는데 한글로 새겨진 ‘김원봉 집터’ 다섯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이곳을 찾아왔던 그 누군가도 독립투사가 살았던 집터가 철거될 운명에 처한 현실이 안타까웠나 보다. 
시멘트벽에 한글로 김원봉의 집터를 새기고 간 것이다. 
그 글자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혹여라도 누군가 이곳을 찾을 한국인들을 위해, 
표지석 하나 세우지는 못할망정 이곳이 조국독립을 위해 싸웠던 한 애국지사의 집터였다는 사실을 
시멘트벽에라도 남기고자 했던 그 절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이 집터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이 건물이 헐리고 나면 지하철역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그 앞에 이곳이 약산의 집터였다는 작은 표지석 하나만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화상산 한인묘지’
가슴 먹먹함은 다음 코스인 충칭·‘화상산(和尙山) 한인묘지’에서 극대화됐다. 
이곳은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이 잠든 공동묘지다.

이곳에 묻혔던 대표적인 분들을 소개하자면 곽낙원(김구 선생 모친), 김인(김구 선생 장남), 
송병조(임시의정원 의장), 차리석(임시정부 비서장), 이달(조선의용대 본부 선전조장), 
박차정(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선생 등이 있다. 
이외에도 20명에 달하는 조선의용대 대원들 역시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1948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아들 김신을 보내 화상산 묘역에 잠든 한인 유해들의 국내 봉환에 착수한다. 
이 과정에서 곽낙원, 김인, 차리석 선생 등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돌아왔다. 
하지만 다른 분들의 유해를 모셔오려고 했을 때는 이미 한·중 간 교통이 끊겨버렸다. 
그래서 화상산에는 여전히 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들의 유해가 해방 7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상황이다.

우리 갔을 당시 화상산의 상황은 심각했다.
1990년대 이후로 중국 당국이 묘지를 밀어버려 묘의 흔적이 사라졌으며, 
그나마 유해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조차도 공사장으로 변해 굴삭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현장을 답사하면서 유심히 지켜본 결과,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한 발굴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2014년~2016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유해발굴병으로 군 복무를 하면서 
6·25 n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한 바 있다. 
당시 60여년이 지난 유해들이 지표면과 땅속 깊은 곳에서 발굴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온전한 방식으로 매장되지 못하고 산화한 유해들조차 남아 있는 상황에서 
지하에 매장한 유해들의 경우 발굴 가능성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당장이라도 야삽 하나 들고 뛰어 올라가 땅을 파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러 담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야만 했다.

귀국하자마자 화상산 발굴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과 함께 국방부·국가보훈처 등 
유관 부처에도 민원을 넣었다. 
또 문재인 대통령 앞으로 공개서한까지 띄웠다. 
그러나 보훈처는 
“관련 증거를 찾아서 제시하라”는 형식적인 답변으로 일관했고, 청와대 역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당시 우리가 갔을 때 이미 굴삭기가 왔다 갔다 하던 상황이었는데 이곳 역시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우리 정부가 중국 정부와 협의하여 현장에 조사단을 파견해야 할 것이다.

‘백범의 계단’에 서다
답사 마지막 날, 우리는 마침내 임정로드의 종착지, 충칭 연화지 (莲花池)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로 향했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 작은 태극기를 들고 반주에 맞춰 독립군가를 힘차게 부르며 이동했다.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버스는 임시정부청사로 들어가는 골목길 앞에 도착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여덟 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나는 청사를 향해 걸어가며 『돌베개』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 
청년 장준하는 청사 위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온몸이 굳었다고 했다. 
그것은 기쁨, 서글픔, 노여움 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당신도 모르게 나타난 몸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나는 청사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며 그 당시 장준하의 감정을 느끼려 노력했고, 
‘부정시림 국민한대’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27년 동안 대륙 곳곳을 전전하며 힘겹게 싸워나가야만 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설움, 
6천 리 장정 끝에 우리 정부에 도착한 식민지 청년들의 환희 등이 느껴져 
나 역시도 마치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연화지 청사의 상징과도 같은 ‘백범의 계단’에 섰다. 
환국 직전의 김구 주석과 2017년 이곳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이곳에서 굳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마 우리 손으로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여전히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그랬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나는 웃었다. 
앞으로 더 좋은 나라가 탄생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백문이불여일견, 일생에 한 번은 임정로드로 떠나라
이로써 5박 6일의 임정로드 탐방이 끝났다. 
우리야 비행기와 고속철도라는 현대 문명의 도움을 얻어 편히 유람을 다녀온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임시정부 대가족은 툭하면 퍼지는 버스와 장정들이 완력으로 끌고 가야 했던 배를 타고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여정을 27년 간이나 이어가야 했다. 
중국 땅 어디에도 그들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늘 적의 공습이 기다리고 있었고, 중국인들은 망국노(亡國奴)라 부르며 조롱했다. 
그들은 얼마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하는데 무슨 구체적이고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이렇게 돌아올 수 있는 내 나라, 내 땅, 내 집을 찾아주신 데 감사할 따름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독립운동가들이 한 게 뭐가 있냐”, 
“결국 미국의 도움으로 얻어낸 독립 아니냐”고. 
나는 그들에게 백 마디 말 대신 그저 임정로드를 한 번 걸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직접 걸어보면 안다. 
과연 우리의 독립이 남의 손에 의해 얻어진 것인지 말이다.


글 - 김 경 준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석사과정)
출처 - 독립정신 회보 제117호 2021년 5월 14일

[t-21.05.19.  20240508_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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