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 - 「언어의 온도」
버스 안에서 일흔쯤 돼 보이는 어르신이 휴대전화를 매만지며 ‘휴~’ 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는 모습을 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창밖 풍경과 전화기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어르신은 조심스레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우연히 통화 내용을 엿들었는데 시집간 딸에게 전화를 거는 듯했다.
“아비다.
잘 지내? 한 번 걸어봤다...”
대게 부모는,
특히 자식과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는 “한 번 걸었다”라는 인사말로 전화 통화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왜 그러는 걸까,
정말 일상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그냥 무의식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통화 버튼을 눌러보는 것일까 심심해서?
그럴 리 없다.
정상적인 부모가 자식에게 취하는 모든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추측은 이렇다.
당신의 전화가 자식의 일상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에,
“한 번 걸어봤다"는 상투적인 멘트를 꺼내며 말문을 여는 것은 아닐까.
행여나 자식이
"아버지,
지금 회사라서 전화를 받기가 곤란해요” 하고 말하더라도,
"괜찮아 그냥 걸어본 거니까" 라는 식으로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덤덤하게 전화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냥 걸었다는 말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고 표현의 온도는 자못 따뜻하다.
그 말 속에는
"안 본 지 오래됐구나.
이번 주말에 집에 들러주렴”
"보고싶구나, 사랑한다." 같은 뜻이 오롯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주변을 보면 속 깊은 자식들은 부모의 이런 속마음을 잘 헤아리는 듯하다.
그래서 그냥 한 번 걸어봤다는 부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평소보다 더 살갑게 전화를 받는다.
전화기가 얼굴에 닿을 정도로 귀를 바짝 가져다 댄다.
거리에서 혹은 카페에서
'그냥...,' 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청아하게 들려올 때가 많다.
퇴근길에 부모는
"그냥 걸었다"는 말로 자식에게 전화를 걸고,
연인들은 서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라며 사랑을 전한다.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의미로 '그냥'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 - p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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