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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by 탄천사랑 2021. 4. 23.

이기주 - 「언어의 온도

 

 

버스 안에서 일흔쯤 돼 보이는 어르신이 휴대전화를 매만지며  ‘휴~’ 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는 모습을 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창밖 풍경과 전화기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어르신은 조심스레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우연히 통화 내용을 엿들었는데 시집간 딸에게 전화를 거는 듯했다.

“아비다. 

  잘 지내? 한 번 걸어봤다...”

대게 부모는, 
특히 자식과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는 “한 번 걸었다”라는 인사말로 전화 통화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왜 그러는 걸까, 
정말 일상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그냥 무의식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통화 버튼을 눌러보는 것일까 심심해서? 

그럴 리 없다.
​정상적인 부모가 자식에게 취하는 모든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추측은 이렇다. 
당신의 전화가 자식의 일상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에,
“한 번 걸어봤다"는 상투적인 멘트를 꺼내며 말문을 여는 것은 아닐까.

​행여나 자식이
"아버지, 
 지금 회사라서 전화를 받기가 곤란해요” 하고 말하더라도, 
"괜찮아 그냥 걸어본 거니까" 라는 식으로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덤덤하게 전화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냥 걸었다는 말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고 표현의 온도는 자못 따뜻하다.
​그 말 속에는 
"안 본 지 오래됐구나.
  이번 주말에 집에 들러주렴” 
"보고싶구나, 사랑한다." 같은 뜻이 오롯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주변을 보면 속 깊은 자식들은 부모의 이런 속마음을 잘 헤아리는 듯하다.
그래서 그냥 한 번 걸어봤다는 부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평소보다 더 살갑게 전화를 받는다. 
​전화기가 얼굴에 닿을 정도로 귀를 바짝 가져다 댄다.

​거리에서 혹은 카페에서 
'그냥...,' 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청아하게 들려올 때가 많다.
퇴근길에 부모는 
"그냥 걸었다"는  말로 자식에게 전화를 걸고, 
연인들은 서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라며 사랑을 전한다.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의미로 '그냥'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   - p33 -

 

 

 

이기주 / 언어의 온도
말글터 / 2016.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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