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 2017. 09. 12.」
【서울=뉴시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 유진이를 제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고, 저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너무나도 다릅니다.
그러나 저의 길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길을 택하겠습니다.
저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을 믿겠습니다." (322쪽)
이어령(83) 전 문화부 장관이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냈다. 이 전 장관이 크리스천으로서 지성에서 영성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그에 따른 진솔한 생각을 세세히 기록한 책이다. 책 말미에는 여러 언론사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 담겼다.
그는 세례를 받기 전인 2004년 교토에서의 연구소 생활 중 하루를 회상하며 책을 시작한다.
빈방의 어둠이 싫어 불을 켜놓고 다녔던 시절, 슈퍼에서 쌀 한 자루를 사들고 집으로 걸어오다 문득 묻게 된다. 초인종을
누르면 누군가 기다리다 문을 열어주는 작은 행복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일까?
희망의 별도, 동방박사를 인도한 별빛도 아닌, 그저 남의 나라 땅에 놓인 방 한 칸, 그 창백한 형광등 불빛을 향해 걸어가며 어깨를 짓누르는 쌀자루의 무게를 느낀다.
평생 책과 종이, 문자와 정보에 허덕이며 비틀비틀 걸어온 자신의 발소리를 그제야 듣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온 그는
쌀자루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내려놓기 위해서, 이 빈방을 물질이 아니라 영혼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쓰인 시가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다"고 고백하며 시작하는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이다.
저자는 자신이 세례를 받게 된 까닭이 어쩌면 '죽는다는 걸 생각하며 살라'를 의미하는 라틴어 문장 '메멘토 모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4월의 새벽 봄빛이 그렇게 빛나지만 않았더라도
새벽 공기가 푸성귀처럼 그렇게 풋풋하지만 않았더라도 결코 나는 그렇게 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 세례받는다'라고.
아! 하나님. 어쩌자고 자신도 없으면서 이런 맹세를 했을까요.
먼 데서도 민아의 눈에 아침 이슬이 맺혀 있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지요.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땅에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내 딸 민아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164쪽)
"그곳에는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도 없고,
예수님 앞에서 유진이가 엄마 아빠 이혼하고 힘들었던 기간에 흘렸던 모든 눈물들 다 씻어주시고,
그래도 삐뚤어지지 않고 엄마 아빠 사랑하는 좋은 아이로 잘 길러주셔서 우리 아이의 장례식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만 가득하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25년 동안 미워하는 사람,
상처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모두들 그리워하는 아이로 저에게 주셨던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323쪽)
이 전 장관은 "책 제목은 대담하게 붙였지만 나는 아직도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 위에 서 있다"며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도움이 있으면 나는 문지방을 넘어 영성의 빛을 향해 더 높은 곳으로 갈 것이다. 누구보다도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바치고자 한다"고 말했다. 352쪽, 열림원, 1만9800원.
글 - 신효령 기자
출처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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