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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사람 시학회-늙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by 탄천사랑 2013. 12. 8.

「늙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응시자로서의 시인되기」

 

 

응시자로서의 시인되기
시는 몸인가 마음인가. 시는 몸이지만 마음이다. 시는 형상을 갖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형상의 모습을 한 비형상이다. 형상의 재료로부터 최대한 끌어다 쓰고 있지만 따라서 결국 시는 형식이라기보다는 내용인 것이다. 시는 내용을 형식에 담지만 시의 내용은 형식을 바꾼다. 시의 문법, 즉 형식은 변화한다. 시조에서 정형시로, 정형시에서 자유시로 산문시로 시의 문법은 모습을 달리해 왔으며 지금도 현재의 형식, 시문법이 불편하고 진부하다고 바꾸고자 도전하는 시인들이 있다. 이들은 형식의 틀도 바꾸려 하지만 기존 내용의 틀도 파괴하고 새로 구축하고자 하고 있다.


시의 내용은 이미지이다. 시 이미지의 내용은 소리와 색과 빛과 어둠과 그늘이다. 소리와 색과 빛과 어둠은 점과 선과 면과 부피를 만들어서 깊이, 높이, 넒이, 두께, 무게, 질감을 갖는 입체를 만든다. 이것들은 풍경을 만든다. 풍경은 사건풍경, 이야기풍경, 인물풍경, 심리풍경, 등이 된다: 사건, 이야기, 인물, 심리가 개입하지 못한 단순한 자연풍경은 시의 축에 들지 못한다. 풍경과 버무려진 시간과 공간은 자유자재하다. 이러한 풍경은 관찰자를 부른다.


시는 아름다운 나무의 몸에 관한 것인가 그 나무의 마음에 관한 것인가. 시가 아름다운 나무의 몸에 관하여 묘사하는 데 그친다면 그 시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영화의 장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시가 아름다운 나무의 마음에 까지 다다른다면 시는 비로소 대상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상대가 될 것이다. 이 때 시인은 주체와 객체의 역할 을 바꿔가며 나무와 대화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시인 자신과도 새로운 대화를 할 수 있다.


시는 이성인가 감성인가. 시는 논리인가 비논리인가. 시는 알려주는 것인가 보여주는 것인가. 시는 가르치는 것인가 배우는 것인가. 시가 이성이라면 시는 연설문이나 설교문보다 못하다. 시가 논리라면 시는 사변적인 철학에세이보다 못하다. 시가 알려주는 것이라면 시는 정보서나 각종 기사보다 못하다. 시가 가르치는 것이라면 시는 교과서나 교본보다 못하다.


시는 합리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는 그 어떤 이성적인, 논리적인 글보다도 말보다도 그 어떤 안내서보다도 교재보다도 묘하게 더 파고드는 것이 있다.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깊고 세밀하게 파고들어 은밀하게 어떤 비의를 전해준다.


시는 사실인가 의견인가 신념인가. 시는 신념이 있는 의견이다. 세계관이 있는 의견의 미장센이다. 시는 강요하는 의견인가. 시가 강요하는 의견일 때 시는 주장이 된다. 우렁찬 구령이 될지는 모르지만 간절한 절규가 되지는 못한다. 힘차보일지 모르지만 아프도록 아름답지는 못하다. 힘찬 것은 생명으로 가득하고 생명으로 가득한 것은 죽음이 없고 죽음이 없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욕망의 시가 될 수 없다. 이러한 것은 세밀해질 때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시는 큰 붓으로 쓴 글씨인가 작은 세필로 쓴 글씨인가. 시는 작고 가늘고 깊고 좁은 것이다. 과학 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위치와 시간이다. 가장 정밀한 생각이고 가장 세밀한 감정이다. 더 작아 정밀하고 더 깊어 자세한 묘사와 진술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몸도 더 들여다보아야 하고 마음도 더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의 몸과 마음을 더 들여다보아야 하고 세계의 몸과 마음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세계는 온갖 것들이다. 들여다보고 부족하면 들어본다. 문질러 보고 만져보고 냄새 맡다본다. 그리고 관찰하고,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어느 식당 입구에 턱 걸려 있는 '佛'이라는 단 한글자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나 바로크 거장들의 세밀화가 더 와 닫는 것이다.


관찰이 버거워지면 흔히 관조적이 된다. 관조한다는 말은 알만큼 알고 성숙해졌다는 말일까. 이해할 수 있고 배려할 수 있는 지경에 도달했다는 뜻일까. 이제 도인이 되었다는 뜻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관조한다는 말은 이제 게을러졌다는 말이고 귀찮다는 말이고 노쇠해졌다는 말이고 곧 죽게 되었다는 말이고 삶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심으로 향하여 돌진하고 있거나 중심의 눈에 있을 때보다는 주변으로 밀려날 때, 그리고 어떤 경계를 서성일 때, 타자가 될 때 주위에는 더 많은 생각들이 들끓게 된다. 대상들은 더 잘게 쪼개진다. 이 때야 말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관찰할 수 있다. 오감과 직관의 촉수를 더욱 세워 들여다보고 듣고 느끼고 문질러 보아 더 세밀하게 묘사하고 진술할 수 있는 장이 선다.


이 때 필요한 것은 호기심이다. 그럼 무엇이 호기심을 잃게 하는가. 당연히 노화가 호기심을 잃게 한다. 늙은 몸과 마음은 스스로 보고 생각하기에도 볼품없다. 찬양할 것이 하다도 없다. 더군다나 늙은 몸과 마음을 노래할 기력도 없다. 이렇게 정리 정돈한다. 그리고 볼품없는 몸과 마음과 똑같은 시를 가끔씩 쓴다. 이 것이 노화이다. 그러나 시인이라면 적어도 비상식적일 필요가 있다.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계몽적이고 비현실적인 시와 더욱 가까이 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 다만 한 해 한 해, 하루하루,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더욱 큰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함으로써 시인은 저 인간세상의 중심이나 젊음의 중심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고, 다가오는 죽음을 놀랍도록 정밀하고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귀에 대보고 가슴에 문질러 볼 수 있다. 중천에 쓰여 있는 시보다는 아무래도 서녘하늘에 쓰여 있는 시가 아름다울 것이다.


삶을 놀랍도록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시, 죽음을 경이롭도록 가까이서 자아화 해보고 대상화 해보는 시를 늙은 시인 당신이 더 잘 쓸 수 있다. 늙고 낡고 게으르고 힘없고 쭈글쭈글하고 비참하고 가엾고 병들고 아프고 희미하게, 그러나 정밀하고 세밀하게 또 더욱 정밀하고 세밀하게, 그리고 지극 정성으로 공들여 가장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계몽적이고 가장 말도 안 되는, 그러나 섬뜩하게 빛나는 시를! 당신은 쓸 수 있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가지고 응시하는 끈질고 고요한 늙은 시인이 되라.   <2013. 7. >

 

- 김민휴 -

시와사람 시학회 https://cafe.daum.net/eyepoemtree/8QWO/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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